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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위기십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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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위기십결
2007-04-06     프린트스크랩
차가운 소주병이 놓였다. 왜 가게에선 한결같이 차가운 소주를 내주는 걸까. 
옛 어른들은 거냉(去冷)을 주도의 원칙이라 하였다며 소주조차 데워 내게 했던 과거의 직장 상사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양반,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공 과장이 소주 한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빈 잔에 또 한 잔의 술을 겹쳐 쌓으며 물었다. 
 
“이제 슬슬 털어놓지?” 
 
공 과장의 얼굴이 엄숙해졌다. 나는 신으로부터 계시를 듣는 예언자의 심경이 되어 사뭇 긴장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김치전을 찢는 공 과장의 손놀림이 돌판에 계명을 새기는 신의 손놀림처럼 신비로워 보인다. 
 
공 과장. 그의 진정한 가치가 빛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사실 가치는커녕 그는 어느 회사에서든 몇 명씩은 있게 마련인, 이른바 무능한 직원의 대명사로 꼽히던 인물이다. 어느덧 10년 가까이 달고 있는 과장의 딱지가 그의 무능과 안일함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동료들이 차장으로, 다시 부장으로 한 명 한 명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동료들의 승진턱 자리에서 가장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떠드는 인간은 다름 아닌 공 과장이었다. 남들은 ‘속없다’라고 욕을 했지만 지극히 혜안을 가진 일부는 달리 보았다. 그리고 꽤 설득력이 있는 결론을 내놓았다. 공 과장. 그는 도인임에 틀림없다. 혹은 속뿐만 아니라 뇌조차 비었거나. 
 
공 과장이 회사내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이미 말했다시피 지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한 달 전 최 부장이 명퇴를 당한 것이 계기였다. 최 부장은 회사에 남은 공 과장의 마지막 동기였던 것이다. 
 
앞서 나갔던 동기들은 줄줄이 앞서서 ‘회사를’ 나갔다. 그렇다. 최후의 승리는 살아남은 자의 몫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공 과장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면도조차 제대로 안 해 추레한 그의 얼굴조차 번쩍번쩍 빛이 나 보였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어떻게 하면 회사에 그토록 질기게 붙어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ant 샐러리맨들의 꿈인 정년퇴직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인지. 공 과장은 진정 회사의 ‘밥 아저씨’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연히 공 과장을 ‘모시기’ 위한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공 과장에게 술과 밥을 사고 싶어 했고, 그의 빛나는 아포리즘을 경청하고자 했다. 내 차례가 오기까지, 정말로 많이 기다려야 했다. 지난 설에 공 과장의 집으로 보낸 한우갈비 한 짝의 힘이 컸으리라. 
 
공 과장이 입을 뗐다. 
“자네 바둑을 두지? 위기십결을 아나?” 
“바둑 두는 놈치고 위기십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그래? 그럼 봉위수기가 무슨 뜻이지?” 
“음 … 사소취대는 아는데. 봉위수기란 말도 있었나?” 
“것 보라구. 이제부터 세이경청 하시게. 내 10년 과장생활 끝에 깨달은 직장인의 위기십결에 대해 일러줄 터이니.” 
“직장인 위기십결?” 
 
세 번째 차장 승진 케이스에서 밀려났을 때, 공 과장은 낮에는 무슨 무슨 사이트의 인터넷 바둑으로, 밤에는 쓴 소주로 상처를 달랬다. 특히 속기대국이 위로가 되었다. 뻥튀기를 집어 먹으며 하루 열 판 정도의 바둑을 두었다. 물론 회사에서였다. 
 
그러던 중 영감이 내렸다. 완벽하다고 보여졌던 나의 귀퉁이 집에 치중해 온 상대의 한 수. 눈에 핏발이 서는 순간 정수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온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우주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절정의 쾌감을 맛보았다. 깨달음이었다. 
 
… 부득탐승(不得貪勝) 
“너무 이기려고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지게 되는 법이지. 욕심을 버려야 해. 승진? 그게 그리 중요한가? 그건 칼날에 발린 꿀과 같은 거야. 올라갈수록 출구는 가까워지는 법이라네. 장수하고 싶으면 소식(小食)이 최고지. 적게 먹고 오래 살아. 오늘부터 자네의 목표는 승진이 아니라 정년 퇴직일세.” 
 
… 입계의완(入界宜緩) 
“직원에게 있어 상사는 대국의 상대라고 할 수 있지. 상대방의 진영에 들어갈 때는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라. 상대방의 진영이 어디겠나? 결재서류를 들고 상사의 방에 들어갈 때는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아야 해. 대충 입구 언저리에서 미적거리다 때가 되면 후닥닥 서류를 내밀어야 해. 그리고 결재가 끝나면 바람처럼 빠져나오라고. 되도록 상사와의 접촉을 피해야해. 명심하라고. 상사는 전염병자와도 같아. 자꾸 가까이 지내다보면 치명적인 병이 옮게 되지.” 
 
… 공피고아(功彼顧我) 
“상대를 공격할 때는 먼저 자신의 약점을 돌본다. 때로는 상사에게 할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있지. 모처럼 낚시라도 가려고 월차 휴가를 내려 하는데 뭐라 하면 과감히 싸워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자신의 약점을 돌보아야 하네. 내 스스로에 일단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고, 있다면 미리 방비해 둬야지. 긴 휴가를 내기 전에는 적어도 일주일 전부터 출퇴근 시간을 엄수한다든지, 없던 야근이라도 만들어서 사무실에 남아 있는다든지 하란 말이야. 야근할 게 없다고? 어허 이 사람, 인터넷 바둑이라도 두면 되잖아.” 
 
… 기자쟁선(棄子爭先) 
“선수를 잡는 것은 중요하지. 특히 회식자리에서 기억해둬야 할 금과옥조야. 보통 회식자리에 늦게 가면 자리가 없지? 이미 좋은 자리는(예를 들어 여직원들이 대거 몰려있는 테이블) 다른 인간들이 죄다 차지하고 있지. 남은 자리가 몇 개 없어 결국 자네는 선택권을 잃게 되는 거야. 더 큰 문제가 뭔지 아나? 그 남은 자리가 대개 상사들 테이블에 빈다는 점일세. 거기 앉아 봐야 어디 좋은 소리나 듣겠나? 게다가 그 자리를 피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지. 거기 앉으면 회식 시간 내내 자네가 고기를 구워야 해.” 
 
… 사소취대(捨小取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차지하라. 당연한 얘기지. 명심해야 해. 작은 것에 연연하면 운명은 제대로 된 열매를 선물하지 않는다는 것을. 난 그래서 큰 것을 좋아하지. 회식 때 고기를 집어 먹을 때에도 큰 것만 먹어. 조금이라도 탄 부분이 있으면 과감히 버려. 사소취대 아닌가! 남이 살 때면 자장면도 꼭 곱빼기를 먹는다네. 특히 직장인은 모름지기 모니터만큼은 큰 것을 써야 해. 상사의 눈으로부터 매우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주거든. 아무쪼록 작은 것은 과감히 버리게. 작은 것에 연연하면서 살면 결국 암에 걸려 죽게 된다구.” 
 
… 신물경속(愼勿輕速) 
“아무쪼록 매사에 경솔하지 말고 신중해야 해. 특히 상사가 자네에게 호의를 보일 때 신중해야 하네. 혹시나 이번 인사 때 승진이라도? 하는 기대는 애당초 품지 말아야 해. 그냥 ‘저 인간이 뭘 잘못 먹은 모양이군’하고 속 편히 생각하게. 그리고 대부분 그게 사실이라네. 알겠지? 신물경속! 언제나 신중하라구.” 
 
… 동수상응(動須相應) 
“행마는 모름지기 서로 호응해야 하느니. 될 수 있으면 비슷한 놈들하고 어울리게. 정신건강에도 그 편이 좋지. 열심히 일하고, 의욕이 넘치는 놈들하고 어울려봐야 남는 건 패배감 뿐 아니겠나. 자네와 비슷한 꿈과 목표(즉 정년퇴직까지 버티기)를 가진 사람들이 회사에 어찌 자네 한 사람 뿐이겠는가. 같이 어울리게. 모임을 만들어도 좋겠지. 세상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걸세. 좋은 자리 만들어지거든 나도 가끔 끼워주게나. 공짜술은 언제라도 환영일세.” 
 
… 피강자보(彼强自保) 
“상대가 강한 곳은 아예 접근하지 않는 게 좋아. 상사하고는 최소 5미터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게.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고 회식 자리에서도 가급적 상사들과는 떨어진 테이블에 앉게. 가장 위험한 곳이 화장실이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상사가 떠억 한 가운데 변기에서 볼 일을 보고 있으면 어쩌겠는가. 좌로나 우로나 이립삼전 할 공간이 부족하지. 그럴 땐 차라리 큰 것을 보러 들어가게. 상사에게 자네의 향기마저 선사해줄 좋은 기회이니 얼마나 통렬한가.” 
 
… 봉위수기(逢危須棄) 
“달아나도 소용이 없을 땐 빨리 버릴수록 좋아. 너무나도 중요한 말일세. 거참, 선현들의 경지에 깜짝 깜짝 놀란다니깐. 이 말은 최후의 수법이니 결코 남용해서는 알 될 것이야. 고수일수록 최후의 한 수는 남겨두는 법이지. 자네가 아무리 조심하며 복지부동한다 해도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법. 사고가 터질 때도 있지. 처음에는 잡아떼야지. 압족(鴨足)초식일세. 즉, 오리발 작전이지. 그러나 때로는 상대가 오리발을 부러뜨리려 나올 경우도 있을 걸세. 그럴 때 필요한 것은? 하하하 자네도 CF를 봤는가? 그렇지. 바로 ‘스피드’일세. 튀는 거지. 일로부터, 사고로부터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야 해. 괜히 뒤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사람 얘기가 성경에 실려 있네. 나는 자네가 소금기둥이 되기를 바라지 않거든. 부디 조심하게. 그러나 최악의 경우, 달아날 수도 없을 때가 있지. 그럴 땐 버리는 것이 좋네. 일도, 자존심도, 인간관계도 다 버리는 거지. 정말 최악의 순간이 아니면 사용할 방법이 아니야.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적절히 쓰일 수 있네. 동료들과 밥을 잘 먹었는데 느닷없이 자네보고 사라고 할 때가 있지? 평소 짜게 굴수록 그런 급작스런 사태가 벌어지게 되지. 처음엔 안사겠다고 버텨보고, 다음에는 달아나려 해보겠지만 너무나 완강해 탈출이 불가능할 경우가 있네. 그럴 때에 봉위수기를 떠올리게.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는 겉옷을 놓고 가게. 물론 지갑은 미리 빼 둬야지.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옷을 두고 가는 데야 의심을 하겠는가. 그렇게 화장실로 가서는 무작정 달리게. 봉위수기야. 달아날 수 없으면, 버려야 하지. 밥값이 옷값을 상위할 경우 얼마든지 버리게나. 이런 경우를 대비해 가급적 값싼 상의를 즐겨 입게. 아깝겠지만 적어도 옷은 놓고 가야 하네. 손수건 한 장 놓고 가면 의심을 사지 않겠나.” 
 
감동이 몰려왔다. 나는 그날 말로만 듣던 성인과 대화하는 가문의 영광을 얻은 것이다. 
술집을 나온 우리는 재차 단란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실로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지갑 속의 카드가 미친 듯 울부짖었으나 내게는 달콤한 사랑가로 들릴 뿐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날 희망이란 작은 공을 쏘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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斯文亂賊 |  2007-04-07 오전 10:28: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양실짱 님, 그 소주는 화학주라 그런가 봅니다. 옛 어른들 드시던 燒酎는(酒 아님) 증류주라 데워서 마시는 편이... 헤~  
雷聲霹靂刀 |  2007-04-07 오전 10:3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양실짱님의 현재 처지를 극단적으로 자위하신 듯..근데 勢孤取和가 빠져부럿네용~~부디, 힘내시길~~  
stupid |  2007-04-07 오후 3:1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살으남으셨다는 이야기로군요 ~~  
기파랑 |  2007-04-08 오전 6:07: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쯔쯧..너무 자학하시면 반쯤은 돌아 버리지요  
limmt |  2007-04-23 오전 7:55: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세고취화 를 넣어서 올려 주십시오. 크게 인쇄해서 걸어놓고 언제나 보겠습니다. 오십 넘어서도 직장에 붙어 있는 사람이니까 매우 절절히 와 닿습니다.  
태극초끈 |  2007-05-03 오전 12:25: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심오하네요. 읽고 또 읽어 머리속에 각인되도록 하고싶습니다.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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