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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in the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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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in the K
2006-12-07     프린트스크랩
홍익동 한국기원 뒤편 주차장을 빠져나와 완만한 언덕을 200미터쯤 오르다보면 골목 오른편에 K란 술집이 있다. 지세(地勢)가 본시 술터였는지, K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에는 술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술집의 단골이었다. 거의 날이면 날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우리들은 무덤을 향하는 좀비들처럼 줄이어 느릿느릿 술집을 향해 걷곤 하였다. K가 들어서기 전만해도 그곳은 완벽한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밤은 물론이려니와 아주 가끔씩은 벌건 대낮에도 맥주잔을 받아들고 희희덕 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술집에는 사람이 없었다. 심한 경우, 저녁 6시부터 9시가 넘도록 가게에는 우리들 외에 손님이 없던 날도 제법 되었다. 술집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초기의 K도 그런 점에서는 꽤 고전을 했음이 분명하다. 선배 술집들의 줄폐업 끝에 마지막으로 < 비어×× >가 문을 닫고, 곧 이어 오픈한 K. 간판과 인테리어, 무엇보다 안주의 메뉴가 확 달라졌지만(K는 요즘 유행하는 퓨전요리 맥주집이다) 안타깝게도 변함이 없는 것이 있었으니, 초창기만 해도 저녁내내 손님이라곤 우리 일당이 전부였던 날이 꽤 되었던 것이다. 주인 내외의 얼굴에는 근심이 기미처럼 꼈고, 그런 날이면 우리들도 괜히 미안해져 “여기, 한 잔 더!” 하고는 했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그렇게 K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 담배연기와 함께 모래알처럼 자잘한 얘기들을 날숨으로 내보냈고, 들숨과 함께 K의 맥주를 들이키며 살았다. K의 주종은 생맥주이다. 물론 소주도 판다. 최근엔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데킬라와 양주(드물게도 올드파를 가져다 놓았다)도 파는 모양이지만 막상 주문해 마시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열대의 술은 한 병 두 병 모습을 감추고 있다. 주인 내외가 서로 몰래 숨겨가며 마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괜한 추측이 아니다. 한때 외국 병맥주를 팔았는데 어느 날 가보니 냉장고에서 싹 사라져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주인 여자가 “잘 안 나가길래 남편이랑 다 마셔 버렸지 뭐에요.”라고 했던 것이다. K의 생맥주는 다른 가게와 달리 붉은 빛이 감도는 레드락이다. 테이블이 열 개 정도. 입구 대각선 끝에는 화장실이 있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이 홀에 비해 조금 높이 올려져있다. 주방 안에서는 요리사 모자를 쓴 남편이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안주를 만들고 있고, 홀에서는 웨이트리스 역할의 아내가 부지런히 주문을 받고 요리를 날라다 준다. 두 사람 모두 30대 중반쯤의 나이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초창기의 얘기이고, 문을 연 지 2년이 되어 가는 K의 요즘 풍경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8시만 되어도 테이블의 대부분이 손님들로 가득 차고, 술집 특유의 활기가 담배연기처럼 떠돌고 있다. 생맥주의 시큼한 냄새가 옷 속 깊이 배이고, 가끔씩 주방에서 주인 남자가 펼쳐 보이는 불쇼에 눈길을 주면서, 우리들은 아이들 마냥 와와 떠들며 맥주를 마신다. K가 지닌 미덕이라면 미덕이랄지(그 반대일지도), K에서 술을 마시고 있자면 꽤 많은,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역시 맥주 한 잔 마시러 들어온 술손님들인 것이다. 대부분 젊은 프로기사들과 한국기원 직원. 일간지 관전기자들. 한국기원 1층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바둑TV 사람들도 제법 된다. “어어! 왔어? 오랜 만이네?” “벌써 한 잔 하고 계시는 겁니까?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좋은 일은 무슨 … 어서 오시게. 한 잔 해야지.” 처음에는 둘이 오붓하게 마시다가 하나 둘씩 합석을 하다보면 파장 무렵에는 십여 명의 대식구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가끔씩이라면(누군가가 술값을 내준다면 더욱!), 이런 재미도 꽤 쏠쏠한 편이다. K 앞을 지나치다 아는 이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들어서는 사람들도 많다. 인사나 하러 가볍게 들렀다가 발목을 잡혀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경우도 많다(그러길래 바둑에도 ‘함부로 들여다보지 말라’는 말이 있지). 때로는 술과 사람을 피해 후닥닥 K 앞을 지나치려다 오히려 이쪽에게 들켜 끌려 들어오는 치들도 없지 않다. 하루가 한숨처럼 길었던 날. K에서 맥주를 마시며 창문을 통해 익숙한 거리 위로 어둠이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꽤 멋스럽다. 익숙한 거리 위로, 익숙한 뒷모습들이 지나쳐 간다. 어제는 스포츠조선의 기자와 K에서 맥주를 마셨고, 창밖으로 이세돌과 양건, 두 사람을 보았다. 얼마 전엔 한종진과 김성룡이 지나가다 우리들을 보고 들어 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K. 그곳에는 추억처럼 기포가 끓어오르고, 휴식처럼 달착지근하며, 지나간 세월처럼 차가운 맥주가 있다. 그리고 늘, 우리들이 있다. 설사 우리들 모두가 K를 떠난다 하여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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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mt |  2006-12-08 오후 7:02: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인간들이 주로 등장하는 한 폭의 풍경화! 멋져 버리네요.  
수우제비 |  2007-03-15 오후 3:0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센돌9단은 그리 술을 잘 한다던데요, 술도 그리 센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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