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저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상냥하게 걸어 들어온다. 오늘도 똑같다.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목소리야 같은 사람 것이니 당연히 같을 것인데 자꾸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목소리의 톤이 한결같은 데다 그 응답내용까지 한결같기 때문이다.

“전화(통화가) 괜찮습니까?”
“아, 네.”
“뭐하고 있어요?”
“지금, 오로에서 바둑 두고 있어요.”

바로 이 말. 아니, 이제 취임 1년을 갓 넘긴 벤처형 화장품회사의 CEO가 사업구상만 해도 정신이 없어야 할 텐데 전화할 때마다 ‘지금, 오로에서 바둑 두고 있다’고 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사이버오로의 직원으로서 충성도 높은 열성회원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조금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5월 23일 오후 7시경, 신설동 로터리 근처 와인바 ‘끄루(cru)’에서 그를 만났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이버오로 사무실을 방문한 그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종업원 50여명을 거느린 소규모 화장품회사 ‘나투젠(NatuZen)’의 박문정 대표. 63년생 경기도 안성 출신인데 말투는 느긋한 충청도 양반이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다소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목소리는 영락없는 가수 윤종신.

손종수(이하 손)- 목소리가 가수 윤종신 씨하고 흡사한데요. 혹시 비슷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까?

박문정(이하 박)- 목소리라도 유명연예인과 닮았다니 기분 좋은데 그런 말은 처음입니다. 얼굴이 탤런트 강남길 씨하고 닮았다는 말은 요즘도 많이 듣습니다만.

손- 회사 이름이 ‘나투젠(NatuZen)’인데 직접 지은 것입니까? 또, 무슨 뜻을 담은 것인지?

박- 제가 지은 건 아닙니다. 창업자의 동생이라던가, 지인이 작명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추럴(natural)’과 ‘시티즌(citizen)’의 합성어인데 ‘자연의 삶을 꿈꾸는 도시인’ 그런 뜻입니다.

손- 질문이 좀 그렇긴 한데···. 전화할 때마다 ‘지금, 오로에서 바둑 두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하. 바둑이 일상의 좋은 친구인 것은 분명하지만 벤처정신을 강조하는 기업의 대표가 그렇게 매일 한가하게 바둑만 둬도 됩니까?

박- 하하. 그거 오해예요. 바둑은 점심휴식 때 잠깐, 퇴근무렵 잠깐 자투리시간에 두는데 그때 전화가 걸려온 겁니다. 업무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절대 아닙니다. 해외, 지방출장이나 외근이 없을 때 두는데 점심 휴식이라든지 퇴근무렵 같이 비슷한 시간대에 두니까 그 시간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당연히 ‘지금, 오로에서 바둑 두고 있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손- 그랬나···.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게 매번 비슷한 시간이었나 보네요(그저 편하게 아무 때나 전화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시간조차 주기적인 패턴이 작용했다니 조금 놀랍다). 아무튼 바둑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언제 배웠는지?

박- 체계적으론 배운 기억은 별로 없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많이 뒀는데 대학에 가서 기우회(棋友會) 활동도 매우 열심히 했죠. 기우회장도 하고 바둑도 많이 뒀습니다. 이때 라이벌이 3, 4명 있었는데 몰래 책을 사보고 연구한다든지 서로 지지 않으려는 경쟁이 치열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 대한경제일보를 거쳐 90년에 중앙일보 편집국 교열팀으로 입사했는데 교열팀 업무라는 게 기사가 모두 마감된 다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기하는 시간이 깁니다. 지루하죠. 자연스럽게 이 시간에 기력이 비슷한 맞수들과 많이 뒀어요.

손- 기력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박- 말하기가 좀 부끄럽습니다. 요즘은···. 오로 2단입니다. 제법 오래 둔 편인데 더 이상 늘지 않네요. 3, 4단을 오르내렸는데 2단까지 떨어졌어요. 아무래도 회사 일을 하다 보니 집중이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때나 방문자가 있을 때 이야기하다가 시간을 넘겨 패하기도 하고 아예 기권하는 경우도 많죠.

손- 바둑을 그만큼 좋아하고 즐겨 뒀으면 에피소드도 꽤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박- 에피소드도 있지만 바둑은 나에게 그 이상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적어도 한때는 바둑이 나의 대학생활을 지탱해준 원동력이었지요. 당시(82년)는 젊은이들의 고뇌가 많은 격동기였는데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성균관대 화공학과을 다니다가 호서대 국문학과로 편입했어요. 실은, 그 전에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지원했는데 떨어졌습니다. 하하.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세상의 인식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서울에 있는 번듯한 대학을 다니다가 지역으로 내려가니 주변의 시선이 좀 그랬어요. 한동안 새로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죠. 그때 제가 학교에 가는 거의 유일한 이유와 목적이 바둑이었습니다.

기우회를 드나들며 바둑을 두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할까요. 바둑을 두기 위해, 기우회의 라이벌들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다니다 보니 어느새 학업에도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고 취업해서 16년 동안 안정된 직장생활을 누린 뒤 여기까지 왔으니 바둑은 내게 취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생활의 반려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에피소드라면 뭐가 좋을까···. 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낚시터에 가서 바둑을 뒀어요. 낚싯대를 여러 대 걸어두고 입질이 있을 때 잡아당기면 되는 것. 그 한쪽에 자리를 펴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매운탕도 끓이고 직장 상사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걸치면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 바둑을 두거나 고스톱을 쳐도 좋겠죠. 지나치게 소란스럽지 않고 쓰레기더미를 만들어둔 채 내빼지만 않는다면 그게 내가 아는 낚시터의 즐거움입니다.

대나무 낚싯대 하나를 강물에 드리우고 긴 세월을 기다리는 강태공 같은 고결한 낚시인들께는 정말 죄송하다.

뭐, 어쨌든 한참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어어, 하는 겁니다. 퍼뜩 뒤를 돌아보니 하하. 힘이 얼마나 좋은 친구였는지, 입질하던 물고기가 낚싯대를 물고 저수지 한가운데로 달아나고 있는 거예요. 그 친구 잡았으면 틀림없이 월척이었을 텐데···.

재미있는 몇 컷의 만화 같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난가(爛柯)’라는 바둑의 별칭을 실감나게 해주는 에피소드다.

손- 일 얘기를 좀 해볼까요. 요즘 같은 구직난시대에 중앙일보 기자라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업에 속하는데 느닷없이 화장품회사 CEO라니 약간 뜻밖입니다. 준비해왔던 사업인가요?

박- 창업에 대한 욕심은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영향도 적지 않았죠. 글을 쓰고 싶어서 국문학과로 편입했지만 최초의 지망은 화공학과였으니까 관련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쪽 선배나 친구, 후배들이 화장품업계에 많이 진출해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투자자로서 지분참여만 하다가 주변의 권유로 직접 몸을 담게 됐죠.

실은, 좀 후회도 됩니다. 크든 작든 기업을 이끄는 자리라는 게 남들에게 하소연 못하고 혼자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아버님께서 정치와 사업만은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걱정거리를 하나 안겨드린 셈입니다. 하하. 저에게는 바둑이라는 스트레스의 완충장치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죠.

손- 그렇군요. ‘나투젠’은 벤처를 지향한다고 하셨는데 다른 화장품기업과는 어떻게 다른지···.

박- 임직원 다 합쳐 50여명밖에 안 되는 기업이 메이저기업과 대등한 경쟁은 할 수 없겠죠. 간단하게 말하면 저희는 화장품의 새로운 기술개발에 주력하는 벤처기업입니다. 아직은 주로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소망, 미샤, 에바스, 라미, 잎스 등의 화장품회사에 납품을 하는데 좀더 적극적으로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er- 제조업자 개발 생산) 방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안정적인 매출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납품생산을 합니다만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나투젠’만이 생산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화장품입니다. 거기에 메이저 화장품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블루오션(Blue Ocean)’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장품 연구개발기업 ‘바이오에프디엔씨(BIO-FD&C)’와 제휴하여 자연 친화적인 기능성 화장품 같은 신상품개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재무구조는 이제 손익분기점을 막 넘어선 상태입니다만 매출의 10%를 기술개발에 투자합니다.

손- 화장품 연구개발기업이라고 하셨는데 ‘바이오에프디엔씨’는 어떤 회사입니까.

박- ‘바이오에프디엔씨’는 화장품 원료 연구개발 기업인데 별도로 모상현 대표가 이끄는 ‘피부생명과학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미세분야를 다루는 나노기술, 유전자공학, 생명공학 등의 박사급 연구원 10여명이 신기술개발에 몰입하고 있죠. 이곳 연구진이 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