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승부(단편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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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승부(단편3-3)
2022-05-07 조회 308    프린트스크랩

 기차는 벌써 수원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며칠 동안 비웠던 방은 썰렁했다. 정수는 보일러를 켜고, 현관 옆 귀퉁이에 놓여 있는 화분에 물을 주었다. 화분의 흙이 마르고 꽃과 잎들이 시들고 있었다. 대강 집안을 정리한 정수는 인터넷을 켜고 메일을 점검했다. 이틀 전에 마법의 공주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내준 메일은 잘 받았어요. 꽤 억울한가 봐요. ㅎㅎ^^ 뭐 지금은 방학이라 시간이 좀 한가하죠. 동해안으로 피서를 갔다 오느라, 리포트가 좀 밀렸지만 상관없어요. 참 내 이름은 최수정이에요. 대학 1학년이죠. 전공은 철학이고요. 의아하죠? 어릴 때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죠. 지기 싫은 성미에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배운 바둑에 그만 정신을 파는 통에, 결국 바둑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전엔 다른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죠. 다른 것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바둑만큼은 너무 정직하죠. 어쩌면 그 점에 반한지도 몰라요. 다섯 살 때 피아노를 배워 주변에 꽤 재주 있는 아이로 소문이 났었죠. 허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었죠.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들어가고 난 이후는 피아노를 많이 할 수는 없었어요. 우리 가족은 패션디자이너로 일하는 엄마와 이탈리아에서 늦게 성악을 공부하는 아빠 그리고 나, 2로 입시공부에 열심인 남동생이 전부죠. 아 참 한 명 빠졌네요. 요크셔테리어 암컷 한 마리가 있죠. 이름은 로미에요. 엄마가 지었죠. 지금 임신중이예요. 우리 집은 서초동에 있어요. 음악 파일 한 개 보낼게요. 패배의 아픔을 진무하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

ㅎㅎ러시아의 천재 작곡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이에요. 사흘 뒤에 명동의 까뮈 바둑센터에서 오후 4시에 뵙도록 하죠. 까뮈의 전화는 02-555-7773 ㅎㅎ 혹시 마음이 변하면 까뮈로 전화해주세요.

 정수는 CD플레이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정수는 오후,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탔다. 평일인데도 전철은 초만원이었다. 우뚝우뚝한 아파트촌들이 전동차 뒤로 밀려나갔다. 최수정과 공주. 뭔가 닮았을 법하나, 전혀 다른 모습일 것도 같았다. 패배의 아픔을 진무하라고? 고맙다 공주여! 전의를 불사르는 음악이 되고 있다. 더 이상 패배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지 않는 바둑을 두는 것뿐. 4호선으로 갈아타고 명동역에서 내렸다. 정수는 전화를 걸었다. 명동 까뮈. 바둑 집치고는 무척 세련된 이름이었다. 걸어서 5분쯤. 정수가 바둑공부에 매달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세상은 그와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눈부시고 화려한 거리와 인파들. 세상은 바쁘게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만이 세상과 별개로 유리되어 끝 모를 길을 가고 있었다. 나의 길은 과연 올바른 길인가? 내 모든 청춘과 정열을 다 쏟아 부을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일까. 십여 년간 한눈팔지 않고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바둑에 빠져 있었다니? 정수는 귀에서 CD플레이어를 떼어내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현장의 소리! 활기차고 유쾌한 소리! 십 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길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살아 있는 소리였다.

 많은 소리들 속에서 문득 머리를 스치는 돌 소리가 들려왔다. 2년 전, 서 노인의 집에서 집안 가보로 내려오는 비자 바둑판에서 들었던 소리였다. 그 소리는 청아하고 편안했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제법 고풍스러운 5층 건물이었다. 감색 타일 벽으로 입구는 현대식으로 개조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이었다. 마치 옛날 궁궐에 온 기분이었다. 200석 가까운 기원의 분위기는 제법이었다. 330, 마흔 중반의 유복하게 보이는 원장에게 정수는 오늘의 대국에 대해서 말했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고수님들이 저희 기원에서 대국을 하신다니 영광입니다. 이리로 오시죠.”

 이미 10여 평 정도의 잘 꾸며진 대국실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수를 안내한 원장이 말했다.

수정 양은 네 시 가까이 되어야 나타나겠군요. 방금 전화가 왔어요. 그동안 차나 한잔 하시고 편안히 음악 감상이나 하세요.”

 원장은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렸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보았던 구식전축에서 프랭크시나트라의 마이웨이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아버지가 가끔씩 잘 들으시던 노래였다. 가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웠으며, 호소력이 있었다. 그녀는 약속시간에 나타났다. 보라색 원피스에 무릎이 살짝 덥히는 샤넬 라인의 옷차림이 약간은 고전적이었다.

미스 최 어서 와요. 삼십 분 전부터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최 수정이라고 해요.”

무척 밝고 쾌활한 목소리였다.

제한 시간은 각각 한 시간 초읽기 삼십 초 세 개. 덤은 여섯 집 반입니다.”

 돌을 가린 결과 정수가 백이었다. 1분여의 시간이 흐른 후, 우 상 귀 화점에 첫수가 떨어졌다. 백은 대각선인 좌 하 귀 화점에 놓았다. 흑의 대각선 포진을 사전에 예방하는 점이었다. 흑의 좌상 귀 백의 우 하 귀, 서로 양화점의 세력바둑으로 포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30여 수가 놓이고, 정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마법의 공주를 건너다보았다. 대세 점을 찾느라 무척 고심하고 있었다. 계란형의 얼굴에 콧날이 오뚝 솟아 있는 지적인 얼굴이었다. 대세 점을 찾은 공주는 자신 있게 한 점을 놓았다. 그런데 정수는 인터넷으로 두다가 오늘 처음으로 그녀와 오프라인에서 두어서 그런지 강렬한 승부욕이 생기지 않았다. 물론 타이틀이 걸리지 않은 바둑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호호 오늘은 아주 덤덤하게 두시는군요. 직접 두니까, 또 다른 느낌이 드네요. 어때요? 지는 사람이 한턱내기로 하면?”

좋아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정수는 그녀와의 바둑이 빨리 끝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피차 초읽기를 하며 서로 진을 빼고 싶지는 않은 듯 착수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계시기의 시간이 쌍방 합하여 1시간 30분을 넘기자 바둑은 거의 마무리 단계로 와 있었다. 잔 끝내기를 다하고 계가를 하니 흑이 덤에 걸려 두 집 반을 지고 있었다.

"아주 잘 두시는군요. 오늘은 못 당하겠어요."

그녀는 지고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여유를 보였다.

칠십 년 대 우리의 엄마 아빠 세대들이 통기타를 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셀브르에서 그 시절의 낭만을 맛보는 것도 좋겠죠. 도보로 십분 정도 거리예요.”

 

수정이 앞서고 정수는 약간 뒤처져서 흔들거리며 뒤를 따랐다. 아담한 키에 발레리나 같은 가벼운 몸놀림, 서양 중세시대의 공주를 연상케 하는 우아한 맵시가 정수의 마음으로 들어왔다.

호호 콤파스는 길어도 발걸음은 늦군요. 명동에선 길을 잃어버리기 쉽죠. 길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개성이 강하고, 주변의 사물들에게 정신이 팔리면 미아가 되는 수도 있답니다.”

 생맥줏집 쉘브르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주문한 과일과 맥주가 들어 왔다.

참 그러고 보니 난 그쪽의 본명도 모르고 있었군요.”

아 네, 박 정수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거꾸로 하면 수정이가 되네요.”

정말 그러네요. 거꾸로 하면 내 이름과 같군요.”

수정씨 바둑을 보면 예사로운 바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랬나요? 삼 년 전에 프로 면장을 땄죠. 특별전형으로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특별대우가 싫었고,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고1 때 입시공부를 하여 대학을 갔죠. 프로 면장은 반납을 하고, 이젠 순수한 아마추어로 바둑을 그냥 즐기는 셈이에요. 어떤 그룹에 소속되어 예정된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죠. 내 자랑만 했군요. , 그럼 자신들을 위해 건배를 해야죠.”

 “건배! ”

 술이 몸 안으로 퍼지면서, 정수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보라색 원피스의 물방울무늬가 러브스토리의 음을 따라 천장에 흩어지고 있었다. 정수는 수정의 눈을 한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호수처럼 맑았다.

어머 정수 씨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얼굴을 더듬는 하얗고 작은 손이 귀여웠다.

아뇨 예쁜 수정 씨 얼굴을 보니까, 내 마음이 포근해 지내요.”

어머 정수 씨의 농담 실력도 고수군요.”

 밤이 되자 무대는 라이브로 바뀌고 아마추어 여가수가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통기타 반주로 애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이 시간이 오래오래 흘러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정수는 마음속으로 오늘의 만남을 즐기고 있었다.

국수전에서 우승하고 내년에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면 기념으로 한 번 더 대국에 응해 줄래요.”

 정수는 수정과 지속적인 만남의 끈을 만들고 싶었다.

좋아요,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그럼 오늘은 이만 아쉽지만, 다음을 위해서 헤어져야죠,”

 수정이 시계를 보면서 쌩긋 웃으며 말했다.

명동역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정수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다정한 연인처럼 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수는 마음속으로 지그시 다짐을 했다. 국수전에서 우승하고 내년 나고야 세계아마바둑대회에서 우승하여 프로가 되는 것이다.

 

 정수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조깅을 하였다. 처음엔 학교운동장 500m 트랙을 열 바퀴 돌다가 한 달 후 도로를 뛰고 뒷산에서 산악구보도 했다. 집중력을 고도로 발휘하기 위해선 체력을 길러야 했다. 그 동안 식사를 주로 라면으로 하였는데, 꼭 세끼는 밥으로 하였고 식단 프로그램까지 짜서, 영양의 불균형이 없도록 몸과 마음을 닦았다. 잠자기 30분 전에는 명상을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쓸데없는 꿈이 꾸지 않도록 했다. 창밖의 낙엽이 황금색으로 변해 가고 정수의 눈동자는 열정으로 활활 타고 있었다.

 

국수전의 그 날이 왔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맹장들, 평생을 바둑만으로 긴 세월을 보낸 사오십 대도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그저 바둑이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았다는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200여 명 정도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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