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의 운명(단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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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의 운명(단편 2-4)
2022-05-03 조회 617    프린트스크랩

기차는 점점 속력을 내며 빠르게 앞으로 가고 있다. 지난 세월이 다양한 무늬의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듯이 기차는 주변의 풍경들을 뒤로 차곡차곡 내려놓는다. 모든 일이 어제처럼 느껴지는데 어느덧 그녀도 세월에서 비켜나지는 못한 듯 과거의 팽팽했던 피부도 그녀의 감정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아직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어떤 사람과 결혼했을까. 그에게 자식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의 부인은 어떤 모습을 한 여인일까. 지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은 그가 평범한 여인을 만나서 무난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가 늦깎이 소설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맑은 영혼이 담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과연 몇 명이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겠는가. 언젠가 그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책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보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어느 조그만 책방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선남선녀가 되고 싶다. 책표지를 보고 저자를 확인한 순간 박 인 호란 이름 석 자가 눈에 뜨인다면 그녀로선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될 것 같았다. 책 내용 중에는 그녀와 그의 추억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녀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은 대다수의 독자들은 그녀의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까.

어느덧 구미 역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에서 혼자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전국의 수재들만 모였던 학교였으나 그녀에게 학교는 그저 자신을 옭아매는 창살의 역할밖에는 한 것이 없었다. 대학에서 그를 만나게 되어 비로소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고 자신 속에 잠자고 있던 사랑의 열정을 불태웠던 것이었다. 언제나 외로웠던 그녀였으나 오직 그를 생각만 해도 행복하였던 시절이었다. 짝사랑이야말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에 한발 다가설 수 있는 증표였다. 그녀는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가지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사람은 누구나 정착을 하고 싶어 하나 강원도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뿌리 없는 도시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시에는 저마다 뿌리 뽑힌 실향민들이 득실거린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잔해지면 타향에서 생을 마감하고 죽어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도자기 속이나 조그만 나무 옷을 입고 고향을 찾게 된다. 살아서 집 밖을 나섰지만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고향에 갈 수가 있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가장 근접한 거리에 이웃하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은 자신과 별개로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많은 욕망과 재산은 한갓 부질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처절한 깨달음을 늦게야 얻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그를 그녀를 더 많이 사랑했으면 후회가 없을 텐데.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청춘시절로 되돌아간다면 모든 생명을 걸고 한 사람을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의 진정한 실체를 사랑한 게 아니고 단지 자신이 이제껏 만들어 왔던 사랑의 허상을 사랑한 것이라고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그 순간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이다. 사랑 때문에 우정 때문에 목숨까지도 바치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일은 나이가 적을수록 빈번히 일어날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만사 다 겪어 버리면 예전의 청춘시절로는 돌아가기 어렵다. 자신이 변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사랑의 열정이 다 부질없는 것이란 자각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독해지는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간혹 어렵게 살아온 독거 할머니들이 힘들게 생활하며 모은 돈을 다 대학에 기부하는 것을 보면 이것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다. 한 개인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다. 그 할머니 역시 젊은 시절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그 할머니의 모든 것을 다 주어버려 나중에는 사랑의 추억만 남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질투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사랑하였기에 진정으로 행복하였네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할 때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다. 사랑의 극치는 죽음이다. 사랑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사랑은 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하는 나르시스다. 사랑의 감정에 도취되면 누구도 헤어나기 어렵다. 그가 그녀 옆에 없을 때 그녀는 그의 분신인 아들을 사랑했으니 어쩌면 사랑의 희생자가 아니고 사랑의 결실을 맺었지만 그 과실을 혼자 독차지한 여자가 아닐까. 아들을 길러준 아빠에게 항시 인간적인 측면에서 고맙게 생각한다. 이러한 감정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나이에 따라서 나타나는 사랑은 그 모습을 달리한다. 언제나 가정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길러준 아빠와 결혼하게끔 예비한 하늘에 그녀는 항시 감사하고 있다.

내년 설에는 길러준 아빠 산소에 한 번 가서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드려야겠다. 아들에게도 항시 길러준 아빠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아들을 만나면 많은 얘기를 해야겠다. 대전을 지나 용산 영등포를 기차는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오랜 여행에 지친 그녀는 평온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야외 예식장은 하객들과 꽃 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예식장에서 평소에 듣지 못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성악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랑 신부는 학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언 듯 혜정의 얼굴이 그녀의 처녀 시절 얼굴 모습으로 바뀌고 아들의 모습이 그의 아버지 박 인 호가 되어 결혼식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화면은 다시 아들과 혜정의 결혼식 장면으로 대체되었다.

그녀는 신랑 석에 박 인 호와 함께 앉아있었다.

그에게 문학을 최초로 가르친 한국문단의 원로이신 선생님의 주례가 끝나자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소설가이시고 성악가이신 신랑의 아버지 박 인 호 씨를 모시고 축하곡을 듣겠습니다.”

야외는 순간 잠잠해졌다.

신랑 신부를 위한 성악곡은 아름답고 경쾌하였으며 노래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란 허울과 같은 것

꿈같은 사랑은 이 세상에 없다.

있다면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덧없는 사랑의 그림자를 찾아서 젊음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 당신 옆에서 숨 쉬며 함께 있는 사람과 영원히 사랑하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따뜻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며 두 젊은이의 앞날을 위하여 들고 있던 꽃송이를 하늘로 던졌다.

이어서 정말 화려한 꽃마차가 야외 식장 안으로 들어왔다.

아들과 혜정은 꽃마차를 타고 세 바퀴 돌더니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기쁨에 찬 눈물을 흘렸다. 옆에 서 있던 박 인 호가 그녀를 힘껏 안아주었다. 영원히 그의 품속에서 머물고 싶었다.

기차는 종착역으로 들어오면서 안내 방송을 하며 그녀의 곤한 잠을 깨웠다.

그녀가 내려야 할 곳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표를 잘못 사는 바람에 엉뚱한 곳을 내렸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박 인 호씨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해준 인생열차는 그녀에게 행인가 불행인가. 섣불리 누구도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말할 자격은 없다. 단지 우리는 과거에 그러한 인생을 살다 간 한 여인으로부터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선택해야하고 그 선택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서울은 언제나 사람으로 붐빈다. 그녀가 서울 땅에 내려서는 순간에 그녀는 고독한 군중이 되어 길을 걸어 갈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 중에 그녀를 닮은 또 다른 자아를 만나게 되면 다시 한 번 죽음과 같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스의 운명이다. (08.9.10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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