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의 운명(단편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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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의 운명(단편 2-3)
2022-05-03 조회 263    프린트스크랩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도 혼기가 꽉 찬 처지라 그녀더러 함께 집에 가보자고 하였다.

그의 가족에게 그녀를 선보이고 싶어 했다. 그가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그가 그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는데,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다면 과연 극복이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지방의 소도시에 본가가 있었다.

마당에는 코스모스 꽃이 지고 까만 씨앗이 맺혀 있었다.그가 태어날 때 심었다고 했던 석류나무도 덩그러니 마당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형님, 누님 내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공기가 냉랭하였다. 두 사람이 열렬히 좋아하는 만남이라 하더라도 집안에서 반대하면 그 인연은 맺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도 썩 내키지 않는 만남이라면 그녀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게 순리였다. 그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가족의 분위기가 전해져왔다. 여성이 좋아하는 남자를 선택하여 능동적으로 결정하기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제도하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매었다. 슬퍼하며 매달리기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았다. 내심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자고 가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그러고 쉽지 않았다. 그가 버스 정거장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의 선택은 자명했다. P시에서 공부도 끝났고 양산의 전자업체 S그룹으로 삼 일 후면 발령받아서 가면 그와의 인연도 끝날 것 같았다.

사랑이란 순수한 감정의 발산이지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단 한 번이라도 진정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사랑했던 사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행운으로 생각해야 했다.

소설을 보면 남녀의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진정으로 아무런 계산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시작도 그녀가 하였고 마무리도 그녀가 해야 마땅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가 있어 진정으로 행복하였고 그런 멋진 사람을 만나게 해준 하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녀가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나은 조건을 갖추었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을 하면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지기도 했다.

버스는 쉴 사이 일정한 시간에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녀는 지나간 일을 회상하느라 무려 한 시간 동안 버스정거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픈 추억이었지만 두 번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그 남자를 보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그 남자를 잊어버리기 위하여 그와 찍은 모든 사진을 없애 버린 건 지금 생각해도 가끔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한국 땅에서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려면 강한 여자가 되어야 했다. 아들이 세 살 때 결혼한 것도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난 그녀의 소중한 아들이 호적도 없이 이 세상에 홀로 살아가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어미로서 못할 일이었다. 아들에게도 아빠가 있어야 했고 동질성을 느끼고 역할 모델을 배울 수 있는 아빠가 절실했다.

결혼이 경제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문직 종사자였으므로 혼자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도 적지만 두 식구 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돈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빠진 생활에 그녀 자신도 지쳤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사랑보다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아들의 사진을 꺼내었다. 아빠를 쏙 빼닮은 미남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젖어 있는 제임스딘의 분위기 아빠의 젊을 때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그 남자의 어릴 때 모습은 알 수 없었으나 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어루짐작을 하곤 가끔 싱거운 웃음을 웃곤 했다.

그녀는 작은 수첩을 꺼내어 박 인 호란 이름 석 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녀의 뇌리 속에는 이제 희미하게 과거의 퇴색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 전화를 하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왜 아무런 흔적도 없이 메모도 없이 가버렸느냐고 원망의 목소리로 말을 할까. 그냥 한때 스쳐 간 여인으로 먼 기억 속의 수첩에 담아두었을까. 그의 모습은 많이 변했을 것이다. 50 중반의 사내로 변한 그를 지금 보아도 과연 과거처럼 그렇게 열렬한 감정이 솟아날까. 그녀의 얼굴과 몸이 변했듯이 그녀의 감성도 변했을 것이다. 어느 화학자가 말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여 살다 보면 결혼하기 전 몸에서 분비되던 사랑의 화학물질 양이 일 년도 안 가서 절반 이하로 현격하게 줄어든다고 했다.

어쩌면 남녀의 사랑이란 일순간에 몸에서 분비된 화학물질의 양에 따라서 잠시 눈이 멀었다가 이내 분비량이 줄어들면 본래대로의 자신으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살다 보면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여 서로 싸운다나. 그저 사는 동안에 한쪽 눈은 감고 상대방의 좋은 점만 바라보면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측은하게 생각하는 감정이 생겨 오래오래 결혼 생활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사랑의 화학성분은 이제 다 소진되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들을 낳아준 아비로서 한 때 그녀 사랑의 열렬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그 사랑을 온전하게 간직하려면 지금 만나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면.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살 만치 산 나이로 그의 아들을 한국에서 알아주는 천재수학자로 길렀으니 칭찬 한마디 정도는 들어도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옛 시인들이 말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헤어지라고. 헤어져서 살다 보면 두 사람의 단점을 모르기에 좋은 점만 생각할 것이고 사랑의 화학성분이 남아있을 때 헤어졌으므로 더욱 애틋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가끔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으므로, 그녀에 대한 감정은 아픔 그 자체일 것이다. 아픈 마음이 음각되어 그의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랑이나 아픔이나 그닥 차이가 없는 감정이 아니겠는가. 그녀가 겪었던 그동안의 고통은 세월이 가면서 풍화되어 서서히 시간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오면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하고 시간만이 온전하게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세월의 더께만큼 이제 그녀도 과거를 여유 있게 뒤돌아보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그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그 시기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전화기 버튼을 누르면 이내 그가 25년을 건너뛰어 목소리로 그녀에게 나타날 것이다. 아들의 아빠를 만나는 일은 그녀 단독으로 처리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들과 모든 것을 상의하면서 만나는 시기와 장소 등 여러 가지 모양새를 갖추어야 되지 않을까. 미혼모로서 세상의 차가운 눈초리와 싸워야 했고, 친정엄마와 아빠에게 그녀는 몹쓸 아이였다. 강원도 산골에서 감자 농사를 하여 도시에 내 보내 공부를 시켰더니, 버젓한 사윗감을 데려와도 시원찮은데 달랑 애물단지 아기만 데리고 울산에서 산다고 하였으니 그 부모의 마음은 오죽하였을까.

그녀가 중학교 재학 시 강원도에선 제법 괜찮은 학교에서 전교 3퍼센트 안에 드는 재원이었다. 그 당시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많이 선택했던 구미의 G공고 전자과에 그녀도 국비장학생으로 교장의 추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애당초 적성이라든지 그러한 것은 사치였다. 그저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기였으니.

그녀도 적성에 맞는 대학을 간다면 무용학과나 성악과가 적당하였다.

그 시절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주특기였던 수학의 재능을 아들이 물려받아 훌륭한 수학자가 되었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녀로서 가슴이 뿌듯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이루어 놓은 작품이 있다면 그녀의 전부인 아들밖에 남은 게 없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차선이었지만 최선을 다하여 아들을 키웠다. 핏덩이 아들이 있어 그녀는 덜 외로웠지만 종일 놀이방에 맡겨놓고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놀이방에서 아들을 찾아서 캄캄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시절의 참담함은 필설로 형용하기 차마 어려웠다.

박 인 호씨도 아들의 아버지로서 지나간 세월에 대해서 다는 모른다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할 의무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진 세월에 대한 보상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진정어린 말 한마디는 듣고 싶어졌다.

우선 서울로 돌아간 다음 아들을 만나서 모든 것을 상의해 보아야 될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P시의 역은 예나 지금이나 분주했다.

그녀는 8시행 서울 행 KTX 표를 한 장 끊었다.

차창 밖으로 우뚝우뚝 선 빌딩들이 지나갔다.

그녀가 대학생 때 집으로 올라갈 때는 언제나 슬픈 감정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희열이 교차되는 복잡한 감정을 갖고 서울을 들락거렸다.

이제 그런 사치한 감정은 없지만 주변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 약하고 금방 스러지는 것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자신의 마음도 세월의 무게에 의해서 변하고, 타인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단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우리는 각자 선택이 다를 뿐이다. 받아들일 것인가 그냥 못 본 채 지나쳐 버릴 것인가. 그녀가 타인과 다른 삶을 살았다면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한 치 의혹도 없이 받아들였고, 운명이 마련한 길을 주저 없이 갔다.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자신의 모든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 세상에 태어나서 그 남자를 만난다면 과거보다 더 열렬하게 사랑할 것이란 점이었다. 사랑하였으므로 괴로웠고 아팠으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그녀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을 때는 얼굴이 피폐해지기도 했고, 그녀 스스로 만든 사랑의 감정 속에 온전히 몸을 맡겼을 때는 백합이 피듯이 아름답게 피어나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대들은 한 여자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진정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 사람을 사랑해보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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