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神算)’으로 칭송받는 이창호. 정밀하고도 현묘한 끝내기 실력은 신의 영역에 올라섰다.
그 방면에는 박영훈도 일가견이 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수치에 밝았다는 이 청년은 보이지 않는 부분의 계산까지를 다투는 반상의 마무리 솜씨가 이창호에 버금간다는 게 바둑가의 평판.
하지만 세세한 전략까지 통틀은 능력에서는 미세하지만 아직은 틈새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창호와 같이 흑번이 강한 박영훈. 그런데 오늘은 이점이 살아나지 못했다. 상대한 교묘한 전술이 시계(視界)를 흐트러 놓았기 때문이다.
큰 충돌없이 백의 페이스로 전개되던 바둑이 뜻하지 않는 곳에서 파란을 일으킨다. 이창호의 솜씨가 돋보인 수들이 여러 군데 있었지만 보기 드문 화제의 장면을 뽑아봤다.
금방 끝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신된 것은 하중앙의 패. 궁여지책으로 나온 박영훈의 패싸움을 쉽게 대응하면 그만인 상황에서 믿기지 않는 이창호의 실수. 백1의 팻감에 흑이 받지 않고, 그렇다고 패를 해소하지도 않고 슬쩍 2로 치받았을 때 덥썩 따낸 백3부터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참고도1 (여유있는 승리)
적당히 타협하는 정도로 여유만만인 백. ▲의 치받음에 대해 잠자코 1로 받아두었더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수로 백대마는 완전무결.
계속해서 흑이 우하 팻감을 받으면 패싸움을 지속시키고, 만일 패를 해소하면 백A로 따내서 패의 보상을 찾는다. 여유있게 결승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실전진행1 (불가사의한 실수)
무심코 패를 따낸 죄값은 그 다음에 저지른 실수에 비하면 약과다. 흑1로 이었을 때 백2가 치명적인 패착이 될 뻔했다.
흑3으로 따내게 되니 대마가 백척간두에 섰다. 패를 다투어 이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상응할 만한 팻감이 전무하다. 살자는 자체팻감도 없다.
실전진행2 (1수 놀았다)
백1의 후퇴는 부득이. 흑2에도 백3의 보강이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패를 대가없이 헌납한, 눈물 가득 머금은 제자리걸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고 나니 △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수. 10집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자리가 곳곳에 널려 있는 시점에서 단 1집의 구실도 못하는 공배다.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길까?” “이창호도 이런 실수를 하는군.” 검토진의 탄식이 빗발쳤다.
참고도2 (1수 차이)
흑1로 이은 장면에서라도 백2로 응해야 했다. 흑3으로 패를 따내면 백4로 손질해서 <참고도1>과 대동소이한 형태. 실전과는 1수 차이가 난다.
패를 통해서 깔끔하게 마무리지으려는 생각이었을까. 천하제일인 이창호의 집중력에 금이 가며 반전 무드로 돌변했다.
참고도3 (무모한 대항)
흑도 최강으로 대항한다면 3, 5의 절단. 그러나 팻감이 받쳐주지 않는다. 반면 백은 8의 곳과 A의 곳에 자체팻감 몇개가 나오고, B의 큰 수도 남겨둔 상황. 따라서 우상 △들을 양보하는 것쯤은 견딜 수 있다(사실 <실전진행2>에서도 흑은 3의 곳으로 들어가서 패를 키우지 못했다).
302수, 10시간에 걸친 혈투. 이창호라서 기록으로 남을 실수. 그도 ‘사람’이기에 덜컥수도 두고 나무에서도 떨어진다. 오히려 인간미가 풍긴 한판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도 평정을 찾아 딱 반집을 이긴 건 천우신조랄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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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생아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