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끔 뒤돌아보던 사내의 눈길이 미실의 시선과 얼크러졌다. 미묘한 느낌이 파고들자 미실은 얼른 방향을 틀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녀 역시 할머니가 살았을 때 ‘고(蠱)’에 대한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 중원에서 전해진 말에 ‘니취(泥醉)’란 게 있었다. 이것은 진흙탕 속에 사는 술 벌레란 뜻이다.

훗날, 이를테면 왕조가 바뀌어 당(唐)나라 때 한 말 술도 사양치 않던 이태백(李太白)이 술을 좋아하는 건 진흙 속에 사는 ‘니취’라는 술 벌레가 몸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벌레는 뼈와 살, 그리고 정신을 관장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막을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니취(泥醉)’다.

반면에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 즉 하늘의 뜻을 알아서 인간들에게 그 뜻을 전하는 무당(巫堂)들에겐 비슷하면서도 전연 의미가 다른 말을 쓴다. 이른바 ‘고(蠱)’다. 무당이 입으로 웅얼대며 저주하는 말을 뜻하는데 여기엔 그릇 안에 벌레가 세 개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벌레는 해석하는 이마다 차이가 나지만 뼈와 살과 인간의 정신이다. 그렇다보니 상대를 저주하는 마음이 인간의 몸 곳곳에 통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옛날 생활양식을 다룬 드라마를 볼 때 옵저버로 무당들이 곧잘 나타난다. 그들은 푸닥거리를 통해 잠 자는 것들을 깨우고 미워하는 것들에 저주의 살(矢)을 날린다. 이것은 상대의 정신을 완전히 거머쥔 것을 뜻하는 고(蠱)의 일종이다. 왜 그런 생각이 파고들어는지 모르지만 미실은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할머니와 인연이 있었던 하마도인의 제자란 점에 친근감을 느꼈다.

“내가···, 독에 중독됐었나요?”

뜻밖의 질문이었던지 사내는 한동안 미실을 돌아볼 뿐 말이 없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게 혼미한 중에 들었다면 기억에 남을 리 없었으나 상대는 또렷하게 물어왔다. 그게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대가 마신 옹달샘엔 서악의 맹독이라는 칠성사(七星蛇)가 죽어 있었소.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이긴 하나 그 속엔 뱀의 독이 스며 있으니 마시는 자가 온전해 진다는 보장이 없어 시생이 특별히 조제한 제독단(制毒丹)을 먹이고 이곳에 눕힌 것이오.”

“움막 안에 흐르는 냄새는 뭔가요?”

“잃어버린 내 나라의 술 냄새요.”

“뭐라구요?”

“시생이 누구란 건 앞서 말한 바 있소. 내가 하마도인의 제자라는 것도 들려줬었소. ···하마도인은 가야 사람으로 독물 연구에 뛰어난 재간이 있어 월성에 들어갔는데 지소태후의 암계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소. 당시 나는 양온서(釀醞署)에서 나라술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스승님이 비명에 돌아가시자 서악의 한 귀퉁이에 금역을 설치하여 가야의 술을 제조하기 전엔 한 발짝도 나올 수 없다 해 지금껏 웅크리고 있는 것이오.”

“아···.”

사내는 나직이 탄식하는 미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닮은 것도 같았다. 하마도인을 따라 옥진궁주의 사저에 갔을 때 한 번인가 보았던 그 얼굴 윤곽이 눈앞에서 살아 돋았다. 궁주와 연관 있다면 혹시 월성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미실이 아닐까. 사내의 눈초리는 미실의 낯빛에서 궁주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미실이 놀라듯 탄식한 것은 술이었다. 가야는 이미 망한 나라다. 그러나 술까지 망한 나라는 아니다. 한때는 신라주와 섞이어 왕실에서 즐겨 마셨지만 지금은 그 자취를 백제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전해졌다. 이 술은 자취가 횅하다가 몇몇 가야인들이 충남의 논산 가야곡면에서 곡주(穀酒)를 주조하며 조금씩 알려졌다. 본래의 이름은 왕이 마시는 ‘왕주(王酒)’다. 제왕의 술이란 뜻이다. 특히 이 술에는 구기자를 비롯해 야생국화가 맛매를 일군다.

바로 이 왕주가 있어야 ‘고(蠱)’를 완성시킬 수 있었기에 하마도인은 느긋했는데 그 사이를 틈타 지소태후는 이사부를 움직여  그의 목을 쳐 옥진궁주의 기를 꺾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에 알려진 가야의 염선생(炎先生)이군요. 구(鳩)라는 이름을 쓰지요?”

“낭자가 그걸 어떻게?”

“내가 미실이에요. 우연찮은 인연으로 황천 언덕을 찾아갔다가 하마도인을 만났는데 자신의 억울한 죽음과 평장(平葬)으로 묻힌 것에 몹시 분해 하더라구요. 도인께선 자신의 미혼법(迷魂法)으로 왕실을 쑥밭으로 만들고 싶다 하셨는데···. 그땐 술과 제자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거든요.”

당시의 상황이 생각난 탓인지 염선생의 눈에선 눈물이 맺혀 흘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스스로의 태도에 분명히 못을 박았다.

“스승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후 내가 한 맺힌 세월을 살아온 것은 어떻게든 삼일산(三日散)을 완성해 신라 조정을 흔들어놓을 생각이었소. 다행히 내 뜻을 하늘이 아시고 낭자를 이곳에 보냈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소. 이쪽으로 와서 제왕의 술, 왕주(王酒)를 한 잔 들어보시지요.”

염선생이 내미는 술엔 오랫동안의 한(恨)과 슬픔이 녹아 있었다. 미실이 그것을 마시자 섬��한 말이 새어나왔다.

▲고(蠱) ; 니취와는 달리 상대를 저주할 때 사용했던 것 같다. 세 마리의 벌레는 뼈와 살, 정신을 뜻하고 그릇(皿)은 몸을 나타낸다.

▲제독단(制毒丹) ; 독을 해독시키는 단약

▲삼일산(三日散) ; 고(蠱)를 이용한 독을 풀었을 때 사흘 안에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