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명을 받고 전쟁터에 나간 이사부(異斯夫)가 환궁해 지소태후의 바람대로 이곳저곳 늘어진 잔가지를 잘라버리자 모든 건 태후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에 대한 대가로 지소태후는 치마끈을 풀어 이사부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게 세종 전군이다.

이제 미실이 그를 가볍게 보고 동륜태자(銅輪太子)에게 추파를 보내고 있으니 그것을 모르는 척 할 수만은 없었다. 더군다나 내명부에 퍼진 소문은 미실이 황천(荒天) 언덕을 찾아가 왕실에 원한이 있는 귀신을 만나고 왔다는 것이다. 누굴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지만 지소태후는 짐작하는 바가 있어 왕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염파(炎巴)를 가까이 불렀다.

“내가 왜 불렀는지 자네도 짐작하는 바 있을 것이네.”

“미실 낭주 때문입니까?”

“고 어린 것을 궁에 들여 왕실 사람으로 만들려 했더니 두고 두고 요망을 떨어 더는 두고 볼 수 없네. 지금은 내 곁에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없으니 달리 방도를 마련할 수 없어 자넬 불렀네.”

“하오면?”

“고 계집은 요물이네. 눈이 합안(鴿眼)이니 비둘기처럼 음탕하기가 끝을 알 수 없네. 가야정벌을 주장한 것은 내 뜻이니 아직도 장수를 움직이는 힘은 내게 있다는 걸 알아야 하네. 해서, 미실도 적의 척후(斥候)라 여기고 공격할 방안을 마련해 보라 그 말이네.”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죽이라는 것입니까?”

“그 아이가 옥진궁주의 손녀딸이어서가 아니네. 첫정을 준 사다함이 죽은 이후 세종 전군과 살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살기가 있었네. 제 할미와 연적이었고 보니 고운 생각을 할 리 없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아이의 눈치를 보며 살 수는 없잖은가.”

지소태후는 자신의 아들 세종이 마음 아파하는 걸 생각하며 어떻게든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렇다보니 마음으로 원하는 건 감쪽같이 살해하는 방법이었다. 염파는 그 일이 옳지 않음을 가만히 고했다.

“태후마마께서 소인에게 부(斧)를 내린 것은 제왕의 명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오나 미실은 사내가 아닌 계집입니다. 태후마마의 마음이 이지러진 것은 소인이 알 수 없사오나 장차를 위해 목숨만은 살려두는 것이 좋으리라 봅니다.”

“살려둔다?” 

“예에, 마마. 미실 낭주는 세종 전군이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비록 동륜태자와 불온한 관계여도 전군마마가 마음에 두고 계시니 아직은 전군마마의 계집입니다. 그리하므로 그에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시는 것이 옳다고 보옵니다.”

“합당한 이유라면···, 그 아이가 이상한 일을 꾸미는 걸 두고 보란 얘기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미실 낭주가 황천의 언덕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 역시 지난 세월의 은원이 깊은 한처럼 멍들어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왕실에 해를 입히려고 독물을 쓸 게 아닙니까. 그때 잡아들이는 게 좋으리라 봅니다.”

듣고 보니 일리 있었다. 당장 미실을 잡아 주리를 트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지소태후의 성격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흔적만을 가지고 미실을 질책하는 것보다 일거에 숨통을 조일 확실한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치달았다.

“자네 보기에 미실이 어쩌리라 보는가?”

“소인이 신라 왕실에 들어와 왕족들의 학문을 전담하고 있습니다만, 왕족 대부분이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중원에서 건너온 <석실비록(石室秘錄)>이나 방사에 도움이 되는 서적들에 관심있는 것 같사옵니다.”

“동륜태자는 어떤가?”

“제왕의 길을 가야할 태자마마께선 장차 신국(神國)의 주인이 된다는 점만을 받아들여 중원의 제왕처럼 내명부를 개선할 속셈입니다.”

중원이라 해야 바다를 건너면 언제나 갈 수 있는 게 진(陳)나라와 수(隋)나라다. 진나라의 제왕 진숙보(陳叔寶)가 뒷문 따기를 즐긴다고 소문난 탓에 신라의 왕족이나 중신들도 그것을 몹시 즐겼다. 더구나 진흥왕이 그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으로 용양신(龍陽神)을 보내자 밀물처럼 흘러든 게 추악한 향음이었다. 제왕이 무엇을 하건 신하로서 따지고 들 수 없는 게 신라 왕실이지만 태자는 달랐다.

왕실의 가장 어른인 지소태후로서는 시시비비를 가릴 힘이 있었다. 당장에 사도왕후나 미실을 건드리지 못할 바엔 동륜태자를 흔들어 그들이 얼마나 믿고 따르는지도 확인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사도왕후가 다음 보위를 이을 제 아들보다 미실을 더 가깝게 여기는지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가장 필요한 게 금보요(金步搖)였다. 이것은 여인의 머리에 꽂는 ‘머리장식’으로 중원에서는 내명부 여인들이 제각기 하나씩 꽂고 있었다. 나비와 같이 두 날개가 있고 몸통이 있는 이 장식은 여인이 걸을 때엔 찰랑찰랑 맑은 소리가 고왔다. 나비의 몸엔 사내의 기력을 충동시키는 다량의 미약(媚藥)이 숨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