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인 미실의 성격은 사다함의 죽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내에게 맡긴 여인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것은 스스로가 지킨다는 마음 다짐을 한 것이다. 그것을 이루자면 무엇보다 숙모인 사도왕후의 그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삼생(三生)의 동맹’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네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왕실이 한 치 앞을 모르는 늪과 같기 때문이다. 귀당비장 사다함이 굶어 죽었다니 너의 마음인들 얼마나 상심이 크겠느냐. 나 역시 그런 세상을 살아 네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실아, 삼생의 동맹은 같이 살고 죽어서도 같이 죽는다는 것이니, 장차 네가 힘을 얻거든 나를 돌봐야 하고 나 또한 네가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왕후마마, 소인은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런 얘긴 폐일언 하고···, 왕실에 뿌리 내린 지소태후파는 내 아드님 동륜태자(銅輪太子)의 비(妃)로 만호공주를 내세웠다. 그 아이가 태자비가 되는 건 어느 누구도 바꿔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가 왕실에 들어온 후 지소태후가 중신을 움직여 서둘러 결정했으니 늦게 사실을 안 대왕이나 나의 처지론 한마디도 불만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됐구나.”

“예에, 마마.”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방책을 마련해야 너와 내가 살 수 있다. 태후의 첫 남편은 입종이다. 입종의 딸 만호공주를 동륜태자의 비로 밀어넣은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모략(謀略)이 깃든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해도 되는 양 내 아드님을 태후 마음대로 건들고 있으니 이대로 있다간 어느 때 불을 맞을지 모르겠구나.”

“하오면?”

“태후가 교만하게 내 아드님을 건들고 나오니 반격을 해야 옳은 이치가 아니냐.”

“방법이 있습니까?”

“이번엔 네가 나서 줘야겠다.”

“예에?”

“네 핏줄은 나처럼 대원신통이다. 네가 세종 전군을 섬긴다 해도 그 아들은 역시 대원신통이다. 계집은 어미의 핏줄을 따르는 게 정한 이치니 네가 세종을 버리고 진골정통의 사내를 받아들이면 너의 핏줄은 왕손이 된다. 방법은 이것이다. 지소태후의 계책을 분쇄시키는 방법은 네가 세종을 버리고 내 아드님 동륜태자를 섬기는 것이다.”

“?···.”

“세상은 맹수들이 사는 숲속이라지 않느냐. 왕실도 마찬가지다. 서라벌이라는 땅에서 고도로 훈련을 받은 자가 운 좋게 선발되어 목을 빳빳이 세워 권세를 누리는 곳이 왕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선 큰소리치며 살았을 것이다. 남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합리적이며 최선이라고 떠들었을 것이다. 옳고 그름도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시루에 음식을 찌듯 제 맘대로 엮어나갔으니 그 권력의 아쉬움이 어찌 없겠느냐. 너와 내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앞으로의 일을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첫 번째로 생각한 게 지소태후가 노리고 있는 동륜태자를 사도왕후도 이용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자신을 핍박한 지소태후에 대한 맛있는 복수였다.

“다시 말하겠다만, 네가 동륜태자와 가까이 하여 왕자라도 낳는다면 나는 널 왕후로 책봉할 것이다. 물론 네가 낳은 왕자는 신라의 다음 보위를 이을 것이다. 이것이 너와 나의 맹세인 삼생의 동맹이다.”

삼생의 동맹을 하고 사도왕후가 처리해야할 일을 미실에게 넘긴 것은 그녀가 지소태후에게 펼쳐야 할 맛있는 복수를 위해서였다. 까딱했으면 왕실에서 쫓겨날 한숨이 새어나올 일들을 멋있게 복수할 짬을 제공한 것이다.

“지금 내 아드님 동륜태자는 보명궁(寶明宮)에 있을 것이다. 인왕동 사내들이 미주(美酒)를 마시며 안주 삼아 네 얘기를 하는 바람에 동륜태자도 너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지금 보명궁에 내려가 태자와 술을 마시던지 아니면 세종 전군에게 먼저 얘길 하던지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다.”

미운 건 지소태후지 세종 전군은 아니다. 학자다운 풍모에 말하는 것 역시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도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있어도 학문이 없으면 위태롭다’는 공자의 말씀을 따라 그는 작은 시간을 이용해 언제나 책을 가까이했다. 지소태후 눈엔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미실의 입장에서는 세종 전군보다는 동륜태자를 가까이 하는 게 자신의 입지나 태어날 아이를 위해 훨씬 유리한 일이다.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내가 동륜태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왕후마마와 삼생의 동맹을 맺었기라기보다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훈을 지키는 것이다. 내가 태자의 아이를 생산한다면 장차 신라의 군왕이 될 것은 뻔한 노릇이고 나의 위치 역시 반석처럼 굳건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세종전군이 싫어 그러는 게 아니다.’

미실은 이를 악문 채 보명궁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서산에 해가 졌는지 어둑해진 하늘엔 성급한 별빛이 하나 둘 튀어나왔다.

▲동륜태자(銅輪太子) ; 사도왕후의 첫째 왕자

▲만호공주 ; 입종의 딸

▲시루는 예나 제나 같은 용도로 쓰였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