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에 당도한 사다함(斯多含)은 어디부터 먼저 들려야 할지를 잠깐 생각하다 인왕동에 자리잡은 취락정(醉樂亭)으로 향했다. 이곳은 나라의 명으로 전투에 임하게 되는 병력이 파병되는 걸 환송하는 전각이었다.

들리는 얘기엔 이곳의 주인 염파(炎巴)가 가야의 미인을 구해와 왕실에 바친 공으로 그 역시 귀족의 대우를 받고 있으며 지금은 사량궁(沙梁宮)에서 왕손들의 부족한 학문을 지도한다고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취락정은 시중의 잡놈들이 출입하는 1층 객실을 제외하곤 2층과 3층은 학문을 중히 여기는 선비나 귀족, 왕손 부스러기들이 출입하여 허세를 부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사다함이 취락정에 들어섰을 때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그것은 자신이 전쟁터로 떠날 때 미실이 들려준 ‘풍랑가(風浪歌)’였다.

바람이 불되 님 앞에서 불지 말고

물결이 치되 님 앞에서 치지 마오

어서 어서 돌아오오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아, 님이여! 잡은 손을 차마 뿌리치려오

(風只吹留如久爲都 / 郞前希吹莫遣 / 郞只打如久爲都 / 郎前打莫遣 / 早早歸來良 / 更逢叱那抱遣見遣 / 此好郞耶 / 執音乎手乙 / 忍麻等尸理良奴)

한 걸음 한 걸음 노랫말을 따라 가까이 다가가니 주인공은 취락정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기(歌妓)였다. 그녀가 왼손에 부여안은 향비파를 울리며 간장을 녹일만큼 애조(哀調)띤 어조로 부르는 노래에 좌중의 남녀는 숙연히 귀 기울였다. 그녀가 속삭였다.

“이 노래는 세종 전군(殿君)마마를 섬기는 미실 낭주께서 부르시던 탄식의 노랩니다. 왕궁에서 흘러나온 풍문에 의하면 낭주께선 태후마마께 대적하다 궁밖으로 쫓겨났다 하옵니다. 세종 전군이 태후마마께 몇 번이나 사정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뱃속의 아이가 전군마마의 핏줄이 아니란 점도 있고 왕후마마를 도와준 죄상이 있다고도 하나, 궁에 있는 분들의 종합적인 의견은 미실 낭주와 태후마마가 핏줄이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자넨 무슨 말을 그리 하는가. 태후마마가 당신의 며느님을 내쫓은 건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야. 허물이 있다면 따끔하게 꾸중을 내려야지 잘못이 얼마나 크기에 내쫓았단 말인가. 아마 따끔하게 훈계했을 것인데 그걸 가지고 토라진 모양이야.”

“태후께서는 세상인심이 두려워 이사부 장군께 연락을 취해 5세 풍월주 사다함(斯多含) 공을 불러들였다지 않습니까. 낭주를 사다함에게 다시 주기 위해서죠.”

“어허, 이런 변이 있나. 이제껏 궁합이 잘 맞은 전군 부부가 헤어지는 것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사다함에게서 빼앗은 미실을 다시 그에게 준단 말인가. 이거야 원···. 그래, 낭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긴 어딥니까, 선도산(仙桃山)이지요.”

“선도산?”

선도산은 서악(西岳)이라 부르는 신령한 곳이다. 이곳엔 최근에 지은 영흥사(永興寺)가 자리잡았다. 옥진궁주가 살아있을 때 자신이 죽은 후 원찰(願刹) 삼아 절을 지으면 세세토록 복록이 이어진다는 당부였기에 손녀인 미실이 궁에 들어가는 것과 함께 옥진 궁주는 미리 정해놓은 서악에 절을 지었다. 이것은 자자손손 후손들이 복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서 미실은 궁에서 나와 영흥사로 향한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을 알게 된 사다함은 잠시도 쉬지 않고 미실이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전군의 총애를 받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그녀가 혼자 몸이 됐으니 만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미실은 자신의 핏줄을 뱃속에 담았다지 않는가. 보고 지고 보고 지고 사랑하는 님을 보고 지고. 비록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다함의 마음은 한 마리 새처럼 님을 찾아 날아갔다.

산중턱에 위치한 영흥사는 주위엔 온갖 기화요초가 널브러져 흡사 약초 속에 아담하게 엎드렸기에 서라벌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아 올라가는 길도 매끄럽지 않았다. 거의 한 시각 남짓 오르자 산문이 보이고 서른이 못돼 보이는 비구승이 서성대는 게 눈에 띄었다.

“스님, 이곳이 영흥사지요?”

“그렇습니다, 시주님.”

“나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다함이란 화랑입니다. 이곳에 미실 낭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낭주께선 계시겠지요?”

“아, 사다함 공이군요. 그렇잖아도 낭주께서 소승을 이곳에 보내 사다함 공이 오는 걸 배웅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다렸습니다만, 공께서 늦게 오시는군요. 낭주는 선대왕 마마와 옥진궁주의 소상(塑像)이 있는 환합전(歡合殿)에 있습니다. 가시지요, 소승이 안내해 올리겠습니다.”

비구승은 두 손을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더니 앞장 서 걸어갔다. 청량한 바람과 맑은 산 새 울음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세속의 욕심과는 전연 다른 무욕(無慾)의 소리였다. 반각(半刻) 남짓 올라갔을 때 전각이 나타났다. 명패는 없었지만 그곳이 환합전이었다.

“이곳입니다, 사다함 공.”

비구승이 한손을 편 채 전각을 가리키고 되돌아서자 사다함은 두 손으로 양쪽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약간 어둑한 실내는 햇살이 들어오자 소상은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소상은 각기 하나씩 제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방사의 체위 중 69의 자세로 얽혀 있었다. 사내 모습은 정상적인 반면 여인은 거꾸로 달라붙은 채였다.


     ▲ 염파(炎巴) ; 가야(伽倻)에서 온 학자

▲ 풍랑가(風浪歌) ; 이 노래는 미실이 사다함이 강건히 돌아오길 바라며 부른 노래로 나중에 한역(漢譯)을 한 탓인지 한문 본래의 뜻에 의문이 가는 부분이 보인다.

▲ 환합전(歡合殿) ; 기쁨을 주는 방사라고 생각한 탓에 남녀가 69의 자세로 얽히는 소상을 만든 것으로 생각됨

▲ 소상(塑像) ; 진흙이나 나무로 깎아 빚은 상

▲ 여인 상단검은 사랑하는 이를 기리며 여인네가 스스로의 몸에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