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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을수록 좋은 것이 어디 사랑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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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다.신정(新正)을 며칠 지난 날 기사실이 환하다.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선 안달훈 4단,안조영 6단,이현욱 4단,백대현 4단 등이 모여 기보를 검토하고 있는데 푸른 청춘이라 모두의 얼굴이 밝다.
그 옆에 백성호 9단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더욱 밝다.“백 사범님,뭐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죠” 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미소만 띨 뿐 대답이 없다.마침 그 앞에 60년대 바둑책이 몇 권 놓여져 있기에 ‘아하,이것하고 관계가 있구나’ 싶어 책을 뒤적였다.그러자 “문 사범,이거 말야,이런 선물을 어떻게 하지?아주 좋아할 텐데 말야.뭐 특별히 전해주는 방법은 없을까?”
백 사범이 미소 띤 이유인 즉슨 66년도 월간 ‘기원(棋苑)’ 1월호에서 친구 부친의 기보를 찾았다는 것이다.대국 사진도 찾았고.
야,그것 기쁘겠군요.친구분이 아주 좋아하시겠군요.작고하신지 15년 된 부친의 기보를 하나 찾았으니까요.바둑을 생전에 좋아하셨으니 반갑기 그지 없겠군요.그렇지?그런데 어떤 모양새로 전해주지?아,그냥 드리세요.깨끗한 서류봉투에 넣어서.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어요?그렇겠지?그렇지만 더욱 마음을 담고 싶은데 말야.아,찾아드린 것으로 충분히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그것 정말 축하드립니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보를 소중히 여긴다.기보에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그것도 45년 전 추억의 기보라면！
대국을 보자.윤기현 5단(당시)과 3점으로 두신 정병태 님의 작품이다.잘 두었는데 흑1이 실착.A가 정수였다.백2가 예리한 맥점.흑이 a로 나갈 수가 없다.그러면 백b,흑c,백d,흑e,백A가 기다린다.
아,빛바랜 사진 하나,하지만 먹의 흔적은 뚜렷한 하나,그리고 그속에 담긴 추억 하나.
아련해진다.나의 일이 아니건만….아니,그건 잘못된 생각이다.어떤 추억이든 가슴에 편린을 남길 정도의 사안이었다면 우리 모두의 일 아니겠는가.더욱이 바둑과 관련된 것이라면.나에겐 45년이 지나면 어떤 추억의 기보가 남을 것인가.기사로서 남긴 것 하나 없는데….
그렇구나.낡을수록 그리워지는 것이 어디 사랑뿐이랴.
문용직<프로4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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