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획’.

요게 김동수(金東洙)가 다니는 광고대행업(廣告代行業)을 하는 회사 이름이다. 요즘 그의 눈에 파릇파릇 생기가 돌고 살맛나게 된 것은, 단단한 ‘모든 기획’의 옆구리에 비수를 들이댄 ‘대일기획(大一企劃)’ 기획실 요원 미스 민(閔)과 그리운 도적질을 은밀히 즐긴 탓만은 아니다.

화장실에서 손바닥 딱딱 마주치며 털보귀신처럼 낄낄대며 웃은 건, 박대리나 정대릴 제치고 과장(課長)으로 승진했다는 데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은 점심 때 대중사우나에서 만난 이부장 때문이었다.

사우나 화장실에서 벌거벗은 채 만난 이부장의 잠지엔 ‘ㅠ’라는 이니셜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이부장이 바람을 잘 피우는 걸 알지만 그의 부인이 오죽했으면 저런 표실 해놨을까 생각하니 하얀 웃음기 속에 가여움마저 일어났다.

“이건 부적이네, 부적!”

“부적이라니오?”

“이런 표실하면 정력이 쎄진다는 점쟁이 말을 듣고···여편네가 에잉!”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는 허둥지둥 변명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부적 좋아 하시네. 이히히히.’

동수는 헤실바실 실소(失笑)를 흘리며 이부장의 가엾은 꼬라지를 흘낏거렸다. 하긴 저 ‘ㅠ’자 표시는 한 달 전 박대리한테서도 본 적 있었다.

광고 카피를 하다보면 비교적 야근이 잦은 편이라 이틀이나 기획실 직원이 야근을 하고 모두 대중사우나에 갔을 때 전날 감기로 결근한 박대리의 잠지에 저런 표시가 있었다.

허겁지겁 ‘ㅠ’자 표시를 닦아내는 박대리를 바라보며 동수는 슬그머니 웃어주었다. 약혼한 지 일주일도 안 된 박대리 약혼녀가 점쟁이 말을 듣고 저런 표실 해 놨을까? 낄낄낄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동수는 꺼억 꺽 게트림하듯 삼켜버렸다. 이히히히, 요상도 해라.

어쨌거나 ‘모든 기획’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대일기획 중심부에 은밀한 정보통을 꽂아뒀으니 완전히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신나는 달밤이다.

얍살맞은 두 대리 녀석에게 승진 축하주를 3차까지 내느라 꼬불쳐놓은 비상금 일부가 부서지긴 했으나 덕분에 라이벌 회사 ‘대일기획’의 미스 민을 디스코텍에서 주워 토목공사까지 쌓은 혁혁한 전과가 있잖은가. 아침 일찍 출근해 집에 전화 하느라 진땀깨나 흘렸지만 그의 퇴근은 활기에 넘쳐흘렀다.

“요즘 좋은 일 있나부죠 당신?”

응접실 쇼파에서 똑딱이는 기둥시계를 바라보며 아내는 샐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일은 무슨··. 승진 축하주 내다 보니 그만···.”

그는 다음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사실 이번 승진이야 총무부 이부장의 배려라지만, 아내가 기를 쓰고 여기 저기 뜸 들이지 않았다면 승진은 언감생심 봄날의 개꿈 정도로 끝났을 일이다.

그의 아내(유지숙) 역시 10개월 전엔 ‘모든 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했기 때문에 사장을 위시한 높은음자리표(?)를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유지숙이 그와 결혼하게 된 것은 싱거운 글 장난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 지숙(아내)은 퇴근을 30분 앞두고 다음과 같은 글귀로 무슨 뜻이냐고 직원들에게 물어 왔었다.

‘퍼너누어 퍼너누어 구퍼너누어.’

기획실에서 이 글의 뜻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직원들은 상사로부터 시달명령을 받았을 때처럼 사전을 펼치고 비슷한 말 · 반대어 · 농담 따먹기로 법석을 떨었지만 지숙이 휘갈긴 내용은 어느 사전구석에도 없었다.

동수도 탁상일지의 구석에 예의 구절을 끄적여 요모조모로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알 수 없어 탁상일지를 확 넘겨버렸다. 그런데 요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앞면에 휘갈긴 ‘퍼너누어 퍼너누어 구퍼너누어’가 뒷면에서 보니 ‘보고 가오 보고 가오. 나보고가오’로 나타난 게 아닌가!

이 일을 기화로 두 사람은 가까워져 급기야 재원으로 이름 난 지숙을 ‘아내’ 자리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퇴근 후 아내와의 잠자리는 결혼 후 처음으로 운치 있는 밤이 되었다.

뜨거운 불화로 위에 올려진 한 숟갈의 냄빗물처럼 서로의 몸은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아내 입에서 유월 개구리 울음 같은 이상한 소릴 들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음날은 오후 늦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동수는 비오는 날을 무척 좋아했다. 어릴 때엔 비가 오면 종이우산을 쓰고 왼종일 마당에 서서 팽이처럼 돌리며 깔깔거렸었다.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동수의 귀엔 듣기 좋은 음악소리처럼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이것저것 추억을 부서뜨리며 시간을 보낸 뒤 퇴근시간이 가까워질 때 앞에 놓인 회색전화가 길게 꼬리를 끌며 울어댔다. 미스 민이었다. 비오는 날 데이트를 즐기자는 얘기였지만 사실은 동수가 안부 전화라도 걸려던 참이어서 미스 민이 말한 호텔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동수가 결혼한 몸으로 자주 외박을 할 수 없는 입장이고 미스 민 역시 아버님이 너무 엄격해 자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가볍게 두어 시간 스페셜타임만 즐기자고 간단없이 다짐을 주고받았다. 객실에 들어가자 미스 민은 매미 껍질 벗듯 주저없이 옷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달려갔다.

“자기도 샤워 해!”

그러나 왠지 맘이 내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간밤에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하여 담배 한가치를 태워 물었다. 욕실에서 나온 미스 민이 동수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비벼끄며 채근했다.

“자기 빨리 샤워 해!”

“그래.”

동수가 옷을 벗자 미스 민이 젖은 머릴 수건으로 비벼대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미스 민이 막무가내로 웃어대며 동수의 아랫도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동수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니···, 어럽쇼? 자신의 잠지에 ‘ㅠ’자가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 놈의 점쟁이 말을 듣고 아내가 그려놨다는 생각에 머쓱한 표정을 짓자 미스 민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기 언제부터 티티(ㅠ) 그리고 다녔어.”

“티티(ㅠ)? 무슨 말이야, 그게?”

“아유 능청떠는 것 좀 봐.”

“아니야, 몰라.”

미스 민은 호기심이 가득한 낯으로 두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기둥시계 말예요, 기둥시계! 자기 바람 피웠지?”

기둥시계? 바람? 그 말들을 뇌까리는 동수의 뇌리에 불길한 그 무엇이 빠르게 스쳐갔다.

“우리들이야 기둥시계가 똑딱똑딱 소릴 낸다지만 미국 사람들 귀엔 틱택틱택 한다잖아요.”

“그게··· 무슨···.”

“자기 괜히 능청떠는 것 아냐.”

“도대체 티티가 어쨌다는 거야?”

허둥대는 동수의 표정을 보며 미스 민이 단음을 삼켰다.

“티티는 틱택을 뜻하거든요. 음···, 그러니까 틱택(tick tack)은 창조와 파괴란 뜻도 있지만···, 다르게는 삶과 죽음을 뜻해요···. 그런데 말예요.”

미스 민은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었다.

“제 선배 중에 바람둥이 언니가 한 사람 있어요. 그 선배가 바람을 피울 땐 남자의 써비스가 마음에 들면, 상대가 잠에 떨어졌을 때 슬그머니 루즈로 티티(ㅠ)를 그리며 말한다잖아요. 살았니 죽었니 하고···.”

동수는 후둘후둘 떨리는 몸을 가누며 더듬거렸다.

“그 선배···이름이···뭐···야?”

“글쎄···유···지숙이라든가 뭐라든가?”

침대 모서리에 무릎을 찧으며 무너져 내린 동수의 귀에 아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날아들었다.

‘요녀석, 살았니 죽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