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 씨가 사장으로 있는 태양당 제과점에 기획부장으로 근무하는 김싸가지의 인생훈은 참으로 멋들어진 것이었다. 워낙 쇳가루를 좋아한 탓에 거래처로부터 소정의 상납금을 받는 걸 일종의 도락으로 여겼는데, 이왕지사 일을 발주할 바에야 두고두고 수표쪼가리를 우려낼 곳을 모범 거래처라 생각해 연말 평가에 별을 세 개나 그려주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물색한 거래처는, 주는 밥이나 또박또박 먹고 응가도 토실하게 쏟아놓고 집을 잘 지키는 검둥개 쫑과 같이 말 잘 듣는, 한번쯤 부도(不渡)라는 뜨거운 국물에 덴 경험자들이었다.

그가 만만한 졸개(직원)들과 이러쿵저러쿵 잡소리를 늘어놓던 회식석상에서 자신의 인생훈에 대해 침을 튀긴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나는 김동범(金東凡)이여잉. 동쪽의 평범한 남자라는 뜻이제. 내가 느낀 거래처 사람들에 대해 말을 하것구만잉. 거래처 사람들은 뭣이냐? 한마디로 고무줄 같다는 거여. 내가 가만있으면 상대도 가만 있고 슬슬 잡아댕기면 비루먹은 망아지마냥 고만큼 따라오거든잉. 명절이 코 앞인데 쌍판 한 번 안내민 것은 상납을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수작잉께 요때는 단칼에···.”

그가 한 손을 칼날처럼 만들어 쓰윽 내려치는 자세를 취할 때면 비록 말은 안했지만 직원들은 ‘어휴, 저 싸가지’하는 냉소가 꿈틀거렸다.

그런 말을 할 때 김싸가지의 표정은 영락없이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였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손에 움켜쥔 숟가락을 흔들며 금방이라도 날뛸 것처럼 탐욕스럽게 으르렁대는 낯짝이 영판 그 꼬라가지였다.

이러한 그림은 한 달에 한번씩 회식석상에서 어김없이 나타났다. 이게 김부장의 고약한 취미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지만 사실 그의 취미는 여느 직원이 생각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내세운 건 이름난 고수(高手)가 남긴 기보 수집이었다. 고작 9급인가 하는 수준으로 프로 기사들의 기보를 모은다면 조금은 황당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의 취미라는 게 그 사람의 정신연령과 전연 상관이 없다는 걸 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프로기사가 둔 기보(指導棋)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 감상하는 걸 즐겼다. 기보를 입수한 날엔 엇비슷한 기력의 친구들이 모여 프로기사들의 바둑을 복기했는데, 승패의 분수령이 되는 곳에 비점(批點)을 찍으며, 과연 그 수가 묘수인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넌즛넌즛 흘겨보며 아아! 하는 감탄사만 연발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얼마전 삼성화재배 4강전에서 좌우 연타에 어퍼컷을 맞은 이창호의 바둑이 그로기상태가 되자 지하다방에 내려가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며 저주를 퍼부었었다.

“아이구 저우루이양 쓰발놈, 뭘 처먹었기에 비틀거리지도 않어. 도대체 빈 곳을 모르구만잉. 기시키 떡수 한 번 둬봐잉. 한국이 전패(全敗)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말이어잉.”

그런데 그 바둑을 이창호 9단이 반집으로 역전승했다는 말을 듣자 졸개들을 쐬줏집에 모아놓고 ‘대한민국만세!’를 삼창이나 외쳐 술 손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도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시월 더위가 슬금슬금 쫓겨가더니 11월에 들어서는 기온이 뚝 떨어져 영하2도의 날씨가 되었다. 북경(北京)에서 4강전이 진행되는데 국보급이라는 이창호가 첫 판을 열 집이나 지자 김싸가지의 안색의 일그러졌다.

그러던 그의 얼굴이 반듯하게 펴진 건 퇴근을 앞두고 사장실에서 걸려온 인터폰 전화를 받으면서였다. ‘아, 예에 예’를 연발하던 그의 얼굴에 구름처럼 홍조가 피어나더니 부리나케 사장실로 달려갔다.

“아, 김부장 앉으시오. 우리 사이에 무슨 격식이 필요 있겠소.”

김동범은 쇼파에 앉으며 약간 긴장했다. 달구 씨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무언가 색다른 요구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달구 씨의 취미는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골프장으로 달려가는 거였는데 지금은 눈썹이 휘날리게 낚시터로 달려가는 낚시광이었다.

달구 씨는 애써 잡은 고기를 어탁(魚拓)을 찍어 사무실 곳곳에 붙여놓고 혓바람을 일으키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한 달구 씨가 서랍에서 기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며칠 전 한국기원에 부탁했는데 판이 끝나자마자 보내 왔구만. 이창호가 지긴 했네만 삼성화재배 1국의 기볼세.”

김동범은 기보와 달구 씨를 번갈아보며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장의 면전에서 이러쿵저러쿵 염불할 처지도 못 돼 ‘이게 정말 이창호 9단의 기보라면···.’ 하고 입맛을 다시며 반신반의했다.

가로 세로로 반듯하게 줄이 그어진 곳에 흑백의 돌들이 점점이 놓였고, 기보 아래 기록을 맡은 프로 기사의 사인이 돼지꼬리처럼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진품도 같았다.

“이 기보를 내놓으실 때엔 그만한 대가를 바라실 것입니다만···.”

“무어 자네에게 대가를 바라고 이걸 구한 건 아니네만.”

말을 하기가 난처한 듯 잔기침을 킁킁 거리던 달구 씨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소곤거리자 김부장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어렵겠지, 김부장?”

때맞춰 달구 씨가 미끼를 흔들었다.

“차암, 거래처가 늘어났으니 김부장이 기획실장 자리를 맡아줘야겠어!”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김부장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좋습니다, 사장님. 내일 오후에 저희 집으로 오십시오. 준비해 놓겠습니다.”

덥석 김동범의 손을 움켜잡은 달구 씨는 연방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사장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김동범은 한손으로 턱끝을 감아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조카 중에 현대무용에 뛰어난 계집아이가 있었다. 워낙 발군의 실력인 탓에 TV에도 몇 번 출연했는데 어떻게 달구 씨가 본 모양이었다.

맹랑하게도 달구 씨는 이 아이의 엉덩이를 탁본(拓本)해 달라지 않는가. 아직 열여섯 처녀의 몸으로 이에 응할 리도 없지만 만약 그 아이에게 ‘탁본’이란 운자만 떼도 정신나간 사람으로 볼 게 뻔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장과 한 약속이니 지키지 않을 수 없어 가까스로 다음날 오후에야 탁본을 만들어 찾아온 달구 씨에게 건네주었다.

달구 씨는 김부장이 건네 준 탁본을 들고 멀리 또는 가까이 놓고 바라보더니 실성이라도 한 듯 낄낄대며 지그시 눈 감은 채 탁본에 코를 대고 끄응 끄응 강아지 울음을 흘리며 냄새를 맡아댔다.

‘하이고 지저분해라.’

김동범은 얼굴을 찡그리며 새우처럼 톡톡 혀를 찼다. 그런데도 달구 씨는 무엇이 그리 좋은 지 해벌쭉하니 웃어대며 허접허접 구두를 꿰신었다. 문득 달구 씨가 말했다.

“어이, 김부장! 그 기보 말이야. 내가 복덕방 김씨를 시켜 바둑 TV이를 적당히 섞여 그럴 듯하게 만든 거야. 승진시켜 주겠다는 건 만우절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위로하게. 이히히히!”

회심의 미소를 짓던 달구 씨가 현관문을 막 밀치려 할 때였다. 짜증 섞인 김부장 부인의 목소리가 욕실에서 빼액 들려왔다.

“여보! 아무리 씻어도 먹물이 안 지워져요!”

입가에 잔뜩 비웃음을 깨문 김동범은 흘낏 달구 씨를 바라보다 욕실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빡빡 문질러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