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지나 새벽 한 시가 가까워졌다. 대나무 숲을 지나가던 바람 끝에 줄기와 잎들이 제 몸을 비비며 낄낄거리는 깊은 밤의 야회(夜會)였다.

청심환(淸心丸) 녹인 약수를 입안에 흘려 넣자 일우가 깨어났다. 아직도 꿈길에서 잡은 한 자락의 허상을 놓지 못하고 비몽사몽간에 허둥대자 우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평정심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걸 말하네. 그렇다 보니 아무리 크고 작은 일이라도 동요치 않네. 대나무 그림자가 마루 밑을 쓸어도 먼지 한 점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까.”

일우의 다소곳한 대답을 들으며 우암은 한 호흡 날숨을 몰아쉬었다.

“자넨 청심환을 녹인 음양수(陰陽水)를 마셨네. 이각(二刻;30분) 남짓이면 몸에서 불길이 일어날 게야. 그렇다고 젊은 육신을 달궈줄 음약을 복용한 건 아니니 법술을 쓰기 위해 치료약으로 복용한 것임을 명심하게. 자네 몸에 깃든 독물을 제거하려 방도를 마련 했으니 초하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하네. 아시겠는가?”

“예에.”

“어찌 되었건…, 자넨 인연을 얻었어. 이 인연이 자네와 초하를 어떤 굴레 속으로 끌어갈지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경거망동을 삼가게.”

우암은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닫이문을 좌우로 젖혔다. 조촐한 음식상을 든 윤아가 문밖에 있었다. 방안에 상을 두고 물러가자 잠시 후 하얀 한복을 입은 초하가 들어서자  우암이 환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남침연(覽寢宴)이 조촐하면 어쩌랴. 하늘이 그대들을 부부의 연으로 묶었으니 이보다 더 기쁠손가. 내 배운 문장이 없어 축연 시를 지을 수 없으나, 옛 선비가 지은 ｢신가랑(新嫁娘)｣으로 자네들 두 사람을 축하하리.”

우암은 걸걸한 목소리로 시구를 읊조렸다.

신랑은 목안(木雁)을 쥐고
신부는 건치(乾雉)를 쥐었으니
그 꿩이 울고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라
복 있는 손으로 홍사배(紅絲盃) 들어
낭군에게 합환주(合歡酒)를 권하나니
첫 번 잔에 아들 낳고
세 번 잔에 오래 사네

우암이 방을 나서자 합환주 한 잔 씩을 나눠 마셨다. 약간의 열기를 느꼈지만 갑작스런 합방이라 분위기는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일우가 빈 잔에 술을 치자 초하가 입을 열었다.

“반드시 이 말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죽헌은 아버님이 머물던 곳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님의 스승 윤사달(尹史達) 어른의 처소랍니다. 그분의 아호가 오죽인 탓에 세상 사람들은 오죽 선생(烏竹先生)이라 불렀답니다.”

초하는 약간 사이를 두었다가 뒷말을 이어나갔다.

“그 어른은 천문지리, 음양오행에 통달해 앉아서 백리 밖을 보고, 오늘에 살면서 몇 십 년 후의 일을 예견하셨답니다. 자세한 것은 아버님이 돌아오시면 아실 터이나 이곳 오죽헌(烏竹軒)은 열두 간으로 만들어진 방들이 아니었어요.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좌우상하 1미터 너비의 철문이 있어요. 마치 돌벽에 붙여놓은 듯한 형국인데 철문 위에 음각(陰刻)으로 패인 글씨가 오죽헌이에요. 미루어 생각하면 이곳에 열두 간의 방을 만들어 ‘오죽헌’이라 한 것은 모두가 대나무 숲에 있는 그곳을 보호하기 위한 생각이 들거든요.”

“보호한다고요?”

“자세힌 모르지만 그렇다는 느낌이에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대나무 숲에 있는 오죽헌 철문에 태극도형이 그려져 있거든요. 가운데엔 홈이 있고···. 저도 몇 차례 보긴 했지만 확실하게 어떤 거란 결론은 내리지 못했어요. 혹자는 오랜 세월 내려온 탓에 풍화되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 홈이 안으로 들어갈 자물통 구실을 한다고도 하거든요.”

“아가씨 아버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별말씀 없으셨어요. 한창 얘기를 나누시다가도 오죽헌 얘기만 나오면 딴전을 피우셨으니까.”

“이상하군요.”

“대나무 숲에 애착이 많으신 것은, 열두 간의 방이 그곳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는 확신을 주거든요.”

초하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