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업계의 첫 손가락 꼽는 선두주자 ‘모든 기획’. 그 회사에 사직서를 던졌을 때 동료들은 동수(金東洙)의 무모한 행동을 거침없이 작두질하며 꼬집었다.
삭도(朔刀)를 휘두르는 동장군이 불을 켠 불황기에 상사 눈치를 살피며 아장 걸음으로 봉급 몇 푼 타 가는 말단 직원들이 대한민국 천지에 얼마인가. 기획광고 파트의 기획실 과장이란 끝발 나는 노른자위를 시효 지난 상품권 던지듯 한다는 게 정신 박힌 짓인가?
동료라고 내세우기엔 껄쩍지근한 놈들은 저희끼리 어둔 골짝에 모여 지지궁상 염병을 떨어댔다.

“와따 그 인간. 알다가도 모르겄어야잉. 거래처들이 파리새끼마냥 두 손 싹싹빌며 지놈들 물건 피알해 달라고 엉겨붙는디 그 좋은 플랑크톤들 모른 척 하고 뒤돌아섰뿌러야잉? 긍께 그 시키 복이 터져 싸가지고 갈 보따리가 빵구난갑네요잉.”

“내가 듣기엔 그 사람 아짐씨가 뭔 사고를 냈다는디 뭔지를 모르겄구만.”

“사고는 무신! 아무래도 동수 그 자식보다 대굴빡 미끈미끈 잘 돌아강께 괜히 심통이 나서 한 짓거리제. 그 시키 복이 터져 염병떤거여.”

사무실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단파 정보통을 가지고 있는 동수 씨가 이런 저런 소릴 못 들었을 리 없었는데도 평소의 닭 모가질 접고 먼데 하늘을 바라보는 건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 두고 돛 달고 빠이빠이 할 때까지 내막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더구나 동수 씨는 사는 아파트까지 ‘급매물’로 처분해 어디로 갔는지 꽁지에 묻은 터럭 먼지도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 선수가 오다가다 무슨 말을 못 듣겠는가. 더구나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로에서 어찌 그만한 사연들이 없겠는가.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아내의 과거를 마음속에서 정리해 나갔다. 젊고 팽팽하던 시절, 용모 고운 아내에게 왜 남자가 없었겠는가. 두 손가락을 꼽아도 부족할 만큼 넘쳤을 것이니 ‘김동수(金東洙)’라는 자신이 아내의 리스트에 끼일 수 있는 건 다행한 일을 떠나 끝없는 행운이랄 수 있었다.

대부분 사내들은 그런 문제만큼은 껏도 아니면서 으스대기 마련으로 자신의 인생은 하이타이로 깨끗하게 빨아내 유리알처럼 투명하다지만, 그게 ‘뻥’이란 건 굳이 사실 확인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모든 것을 동수 씨는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거야!’
내심 마음을 움츠려 아랫배에 힘을 주고 ‘대일기획’의 미스 민(閔)이 추천한 인천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에게 추억이나 연고가 없는 데다 ‘어진 시냇물(仁川)’이란 뉘앙스가 편암함이 있었다.    

물(水)은 자신을 뽐내지 않고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는 넉넉한 겸손함이 있다. 동수 씨가 기획업무에 고심할 때 도움이 됐던 게 자정수(子井水)였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길 좋아하지만 심산유곡의 약수터엔 적당한 크기의 종구라기가 들어있다. 그것으로 듬뿍 물을 떠 갈증에 바들대는 내장을 시원하게 청소하면 그 얼마나 몸과 마음이 개운했던가. 우리네 선현(先賢)들은 제사를 지내거나 고시 공부하는 아들을 위해 정한수 떠놓고 기원하길 좋아한다.
물이라고 해 다 똑같은 물이 아니다. 언젠가 허준 드라마를 보니 물의 종류가 많은 것처럼 ‘자정수’도 특별한 물이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이지만 우리의 조상님네는 물의 효능을 알았던 것 같다.

자정수는 ‘자정에 흐르는 물’이다. 이때의 물은 감로(甘露)가 함유됐다고 보는 게 옳다. 우주의 생명은 본래 물과 불이다. 물의 정(精)과 불의 신(神)이 합하면 영(靈)을 이룬다. 태양열이 가해지면 땅속의 열은 태양열에 흡수되므로 밤 12시가 되면 감로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함유돼 보골보골 끓는다. 이때의 감로량은 1% 내지 10%까지 차이가 난다.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모르지만 동수 씨는 ‘어진 시냇물(仁川)’이 흐르는 곳이 좋아 순식간에 이사해버렸다.

다른 도회지처럼 인천도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구월동엔 마음에 드는 아파트가 있었고 그 건너편에 ‘모래내 시장’있어 그곳으로 정했다. 그의 사업적인 구상은 기획실 파트에 있을 때 마음에 점 찍었던 ‘땅콩’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땅콩은 신선이 되고자 했던 이들이 즐겨찾는 선식(仙食)이었다. 동양에선 신선이 되려는 첫 단계로 몸무게를 줄여왔는데 봄에는 율무쌀(薏苡仁)을 여름엔 녹두고(綠豆羔), 가을엔 연꽃 열매인 연육(蓮肉), 겨울엔 낙화생(落花生;땅콩)이었다.
체중을 줄이고 몸을 가볍게 하는 이 음식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음식 재료다. 그러므로 동수 씨는 모래내 시장의 구석진 자리에 <신선이 되는 집>이란 상호를 내 걸었고 선전용 찌라시를 만들어 신문에 꽂아 광고효과를 기대했다.

<신선이 되는 집>이니 ‘신선’이 되는 음식의 식재료(食材料)가 당연히 필요하였고 사계절 모두 동수 씨의 가게는 남들처럼 불황을 타지 않고 순조롭게 넘어왔다. 더구나 7시 이후의 주문이나 상담은 전화번호를 가정집으로 돌리다 보니 그의 아내 역시 상담에 응해 주었고 물건 배달도 곧잘 나가곤 했었다.

1년여가 지났을 무렵, 의례적으로 종합검진을 한 사계절 병원의 닥터 최가 그를 병원으로 호출해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런 얘길 한다는 게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만 부인의 몸에서 에이즈 양성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알다시피 두 분이 부부시니 남편 되시는 김선생님도 검사를 받으셔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돼 전활 드린 겁니다.”

“전···, 그 동안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천으로 이사 온 후엔 각 방을 썼으니까요.”

“그러나 부인의 병증(病症)이 꽤 오래됐다는 것만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부인의 병이 아주 깊어졌습니다.”

닥터 최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동수 씨는 온 몸의 기가 쏘옥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잠깐 동안의 바람인 줄 알았는데 그토록 병이 깊어졌다는 게 믿기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를 알았는지 아내는 침중한 어조로 목소리를 깔았다.

“여보, 실망했죠? 증말 죄송해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요.”

“그래두 당신한테 너무 죄송해요. 용서도 구하고 싶구요.”

“용서는 무슨···, 모두들 하나님 앞에선 죄인들입니다. 누굴 정죄하고 손가락질 한다는 게 오히려 죄악이죠. 상대방의 허물을 내 것인 양 받아들여 용서하는 포용력을 길러야지요. 당신, 아무 걱정 말고 마음을 편히 가져요.”

“증말···, 증말 고마워요. 나···,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고백은 무슨···.”

“아네요. 당신한테 꼭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 있어요. 당신, 화장대 서랍을 열고 가장 아래쪽 상자에 비단주머니가 있거든요.”

동수 씨가 주머닐 가져오자 아내는 안에 든 것을 가만히 쏟아놓았다. 안에서 나온 건 5천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두 장, 그리고 세 개의 땅콩이었다. 땅콩 두 개는 온전했지만 한 개는 반으로 쪼개진 상태로 안에 든 알갱이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아내가 말했다.

“여보, 당신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 온 후, 잘 생긴 청년을 둘이나 만났거든요. 내가 그 사람들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왠지 연락을 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껍질을 까지 않은 땅콩을 두 알이나 놔 두었어요.”

“그···럼, 껍질이 까진 땅콩은···?”

“미안···해요. 이것은요. 당신 후배인데 이름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나를 호텔로 불렀는데···, 내 몸에 반점(斑點)이 생긴 걸 보고 질겁하더라구요. 내가···, 몇 번 전화를 했는데 처음엔 안 받더니····, 나중엔 전활 하지 말라면서 끊더라구요.···미안해요.”

“아니, 뭐. 괜찮소···. 근데, 5천원짜리와 천원권 두 장은 웬 거요?”

그 말에 아내는 동수 씨를 빤히 바라보며 ‘미안해요’란 말을 나직이 떨구었다. 힘 없는 아내의 다음 말이 동수씨 귀엔 천둥소리처럼 우레를 치고 있었다.

“여보, 전···. 바람을 필 때마다 땅콩 한 알씩을 모아뒀어요···. 그게 너무 많아 요기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게 팔았거든요. 7천원은 바로 그 돈이에요. 여보,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