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항상 마음이 무겁다. 까마득히 머언 젊은 날의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하늘이 멀게만 느껴지고, 내가 미소를 잃기 시작한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비망록(備忘錄)에 갇힌 나의 언어가 튀어나온다.

 서랍 속 해묵은 일기장에 숨은 추억의 소녀. 그 사람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누렇게 퇴색한 사진의 뒷면엔 모나미 볼펜으로 끄적인 이름자가 참으로 눈에 익다.

‘바람꽃’.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찡하게 울리는 그 이름은 나의 추억 모퉁이에 숨어 빠꼼히 얼굴을 내밀며 회상의 그림자를 만들어 준다.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에 대해 공개토론을 가졌을 때 유난히 나의 설변(舌辯)에 박수를 쳤던 그녀, 그녀는 그 나이 또래 우리들이 붙인 아름다운 별명, ‘바람꽃’이었다.

어떤 여학생이 내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코스모스’란 별명을 붙여주었듯 나는 그녀에게 ‘바람꽃’이란 단어를 주었다.

연약한 한 송이 꽃줄기가 한겨울 바람에 휘날리는 걸 생각해 붙인 이름이지만, 이것은 첫눈 올 때 나비처럼 공중 그네 타는 하얀 눈(雪)이 어쩌면 그녀와 같을까 싶은, 나의 눈엔 연약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안개꽃 한 무더기를 나의 생일 선물로 김춘수 시인의 ‘꽃’을 꽂아 넣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대단한 충격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여학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지 못하는 순뎅이었고 여학생 사이에서 ‘실험대상’이란 말이 나올 정도의 순진해 뵈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발표한 여러 글들이 학생들 시선을 끌기 시작하자 ‘바람꽃’은 내게 생일 선물을 보냈고, 그 시구는 나를 용감한 청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녀와 난 급속이 가까워졌다. 친구들은 ‘한 쌍의 바퀴벌레’라 애칭하며 우리를 부러운 눈초리를 팔랑거렸다.

‘사랑’에 대해 논문을 쓰고 학업에 정진하면서도 과연 ‘사랑’이 뭔지에 대해 지금도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졸업 때가 가까워질 무렵 ‘바람꽃’에게 일어난 미묘한 행동이 내게 남긴 아련한 고통 때문이었다.

그토록 빈번히 만났던 시간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나고 일 주일에 한 번, 두어 달에 한 번씩 볼 수 있더니 졸업 때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채 간단한 메모지만 보냈기 때문이다.

<간단히 적습니다. 내게 일이 생겨 어쩌면 몇 해 동안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늘 편안히 계세요.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눈 위의 안개’란 말은 쓰지 마세요. 너무 어두워요. 차라리 ‘눈 위의 노을’이 평화로워요. 우리 약속이 살아있다면 서울의 덕수궁 돌담이 있는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첫눈 내리는 날 만나고 싶어요. -바람꽃->

이것은 여인들이 잘 쓰는 이별의 등식(等式)이라고 생각해 그 얼마나 나의 어리석음과 무디어진 느낌을 스스로 조롱하며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내 자신이 어리석고 세상이 밉고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술을 마셔야 견뎌낼 수 있었으니 나의 생활은 엉망진창이었다.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자신이 싫었다. 살아있음을 술로 녹여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셔댄 술이 절친한 친구의 농담 섞인 핀잔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자식은 일년에 2천 병씩 소주를 마셔야 하나 봐.”

그게 신호등이었나 보다. 그 당시 녀석과 길거리 미니 횟집에서 술을 마실 때, 아나고 한 접시에 소주를 열일곱 병을 마시고 세 병을 추가로 주문하자 식칼 든 주인에게 그곳에서 쫓겨난 일이 떠오른다.

 “야 이 새끼들아! 그렇게 죽고 싶음 나가서 뒈져!”

아마도 나의 의식이 깨어난 건 그 친구의 핀잔 덕분이지만, 신문사에 들어간 건 언제든 자유스럽게 ‘바람꽃’을 찾아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연한 설레임의 기다림으로 맞이한 첫눈 내리는 날을 아무런 소득 없이 흘려보내고 나선 차츰 내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서른하나에 결혼하기 전까지 내가 기다리는 첫눈 내리는 날엔 항상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며 쓸쓸히 추억에 잠기곤 했었다. 이젠 모든 게 바람처럼, 물결처럼 지나가버린 젊은 날의 추억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시월부터 몸이 으슬거리고 자꾸만 과거의 일들이 꿈길을 어지럽힌 중 문득 꿈길에서 ‘바람꽃’을 만났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해말간 웃음을 흘리며 안개꽃이 핀 정원에서 꽃을 매만지고 있었다.

내가 장난스럽게 다가갔는데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소리쳐 불렀어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인가 고함쳐 부르고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나 2층 서재의 문을 열었다. 창밖엔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쌓일 정도의 눈은 아니었지만 눈은 살아서 움직이며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 그래. 바람꽃이 있었어. 아직도 내 마음에 바람꽃이 있었어.’

모임을 다녀온 며칠 후의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한쪽 눈의 시력은 거의 잃은 상태였다. 연재하던 소설도 건강으로 인한 연재중단을 알리고 하던 작업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 동안 운영해 오던 <여해역사문제연구소>와 <여해한문서당>을 맡을 적임자를 생각하는 내 마음엔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살아 돋고, 30년이 흘러간 동안 바람꽃의 영상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을까?’

문득 찾아든 설레임의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대한문(大漢門) 앞에 나간 건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비교적 따뜻한 날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내가 밖에 나간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병원에 근무하는 딸아이가 몇 번이나 전화로 만류했지만 그들이 내 마음을 모르듯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주지 않은 아름다운 추억을 깊이 깊이 숨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정리한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나간 대한문 앞에는···.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는지 중년의 사내가 오버 깃을 세운 채 손을 비비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차가운 바람을 피할 셈으로 문 가에 한동안 서 있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저···. 저기···.”

“네, 누구십니까?”

“혹시···, ‘눈 위의 노을’ 씨가 아니세요?”

“네?”

“저기···. ‘눈 위의 노을’ 씨요···.”

그는 내게 묻는 건지 혼잣말을 읊조리는 건지 모를 정도로 말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을 듣는 순간 사내는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눈 위의 노을’은 맞는데요.”

마흔쯤으로 뵈는 사내는 그저 눈물만 글썽였다. 말이 없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대로변에 두 남자의 멋적은 만남은 우스꽝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각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았는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심부름 나왔거든요.”

“누구?”라고 묻기 전에 사내는 얄따란 카드 봉투를 내밀었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 봉투의 각진 모서린 누렇게 퇴색돼 있었다. 안에는 바람꽃의 얼굴과 김춘수 시인의 ‘꽃’ 뒷부분이 쓰여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은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누난···, 폐가 무척 약했어요. 치료를 위해 무주 구천동으로 들어가면서 얼마나 울었다고요. 한 해를 치료하면 나으리라 보았는데 다섯 해가 지나 나왔거든요. 그때부터 누난 이곳을 찾아와 선생님을 기다렸는데···. 세 해 전 병이 도져 수목장(樹木葬)을 했어요.”

“수목장?”

“누난 자신의 몸을 화장해 나무 아래 묻어 달랬어요. 그 나무의 정령이 돼 새가 찾아들면 선생님을 찾아달라 부탁한다 했거든요.”

흐르는 눈물이 사진 위에 떨어진 탓에 부옇게 흐려 보인다. 그게 충격이었는지 아뜩한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는 걸 사내가 부축했다. 지금까지 기다렸다면 그 세월이 얼만가. 바보 같은 사람. 그렇게 궁금했으면 내가 왜 ‘눈 위의 노을’이란 필명을 썼는지 한번쯤 알아보면 될 것을.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내가 시력을 잃어갈 때, 바람꽃은 그녀의 동생을 내게 보내줬다. 그립고 고마운 사람.

날씨가 차가워지고 내일 아침엔 영하로 내려간다는 일기 예보의 엄포가 오늘 따라 유난히 우습게만 느껴진다. 이제는 내 인생도 꿈도 성취욕도 덧없게만 느껴진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도 현란한 미사여구일 것이다.

‘바람꽃’이 보고 싶다. 그립다. 꽃은 사람의 마음에 향기를 내려준다는 데 이 겨울의 슬픔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내가 잃어버린 꽃향기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