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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두고 싶은 또다른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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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한창인 들녘을 따라 가을이 지나간다. 조생벼를 이제야 거두다니 늦은 감도 없지 않건만 지난 여름의 빗발을 생각하니 그래도 다행이다. 오롯한 들길 따라 길고 긴 장마로 인한 짜증은 사라지고,눈 시린 푸른 하늘을 인 먼 가을 산이 마음 한쪽 불안을 거두어간다.
7주 전 필자는 ‘한 줄기 소낙비 같은 맥을 만나면’이라는 제하(題下)에서 시원한 소낙비를 머금은 때를 떠올리며 그런 상쾌함을 일으키는 장면을 여러분과 나누었다. 그럴 때 바둑을 두고 싶다고.
하지만 아니다. 그뿐 아니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때도 갈증이 인다.
기보는 지난 9월 25일 제8기 천원전 준결승 김승준 8단과 원성진 5단(흑)의 중반. 무엇이 눈에 들어오시는지? 흑3이 이상하다. 두 점(▲)과 함께 빈삼각을 이루는 형태. 보는 순간 어깨가 마비되는 느낌이 올 정도로 답답한 감각. 필자의 마음도…, 저렇게 꽉 막힌 수를 두다니!
그러나 그 수가 멋졌다. 기막히게 좋았다. 백2에 대한 응수로는 흑3이 아니라 A가 모양인데 그러면 패감이 많아진다. 백3 흑B와 백C 흑D,그리고 백E 흑F까지 3개의 패감이 남는다. 흑3을 B에 두어도 백C로 찝는 송곳 같은 수가 있어 역시 패감은 3개. 실전의 흑3이면 A 또는 D,단 하나만 패감이 된다. 백A에는 흑D로 받으면 되고 흑D에는 백A로 그만이다. 실전은 흑3이 패감을 줄였기에 백은 흑a의 패감에 백b로 받을 수가 없었다. 거기서 승부는 흑에게 기울어졌다.
기막히구나. 저렇게도 둘 수 있다니! 그렇다. 반드시 “무더운 여름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를 머금고” 싶을 때만 돌을 잡고 싶은 건 아니다. 흑3은 분명 그런 기분과는 거리가 먼 응수. 겉만 장식한다고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다. 부족한 게 귀하며 귀한 게 아름답고 멀리 있는 게 보고 싶은 법. 흑3은 참으로 귀해서 아름답기까지 한 착점.
얼마나 인내할 수 있어야 반상에서 저런 마음을 건질 수가 있는 걸까. 승부에의 집착만으로는 잡히지 않는 수. 가을 하늘의 청명함처럼 반상에 그림자 한 점 어른거리지 않는 단계가 되어야 할까.
(2003-10-02 문용직 프로5단 사이버오로 자문위원)
○... 원성진 5단은 이 판을 이겨 생애 첫 본격기전(천원전)의 결승5번기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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