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염구(炎鳩)를 자신의 거처로 옮겼지만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창백한 얼굴인지라 치포관을 쓴 사내는 낭패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가야(伽倻)가 망한 후 왕실에 전해 오던 제왕의 술을 만드는 비법이 사라졌다는 낭패감에 그는 주위를 서성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경황이 없던 참이라 일단 미실을 후원 쪽에 마련한 별당(別堂)에 머물게 한 후 양온서(釀醞署)에 사람을 보내 방법을 찾기에 이르렀다.

미실은 별당으로 온 후 아랫것들을 불러 들였다. 얼굴이 곱상한 시비(侍婢)가 맑은 얼굴을 내밀었다.

“아가씨,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너는 이곳에 있은 지 오래 됐느냐?”

“세 해가 넘었습니다.”

“허면, 여기에 칠사란 자가 있느냐?”

“칠···사?”

“가야에서 왔다 들었다만.”

“아, 있어요. 얼굴이 까무잡잡한 ‘뱀 바위 냇가’에서 온 소년 말이죠? 주인어른의 심부름으로 저자(市)에 나갔다가 지금 들어왔을 거예요. 데려올까요?”

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 집의 경관이나 풍취는 그런 대로 뛰어난 편이다. 곁을 따르는 서른 살 가량의 중년 여인은 치포관(緇布冠)을 쓴 나으리란 자의 신원부터 들려주는 것에 부산스럽다. 그는 지소태후의 조카로 조정의 제례(祭禮)를 관장해 온 김씨 성을 쓰는 양온서 관리였다. 김수로왕 때부터 가야에서는 왕주(王酒)라는 특별한 술을 조제해 제례에 사용해 왔는데 나라가 망하자 조제 방법을 비롯해 술 만드는 장인(匠人)이 사라져 버리자 이제껏 찾아나선 전력이 있었다. 곁에 선 중년 여인이 말한다.

“주인 나으리께선 좋은 술을 구하려 중원까지 다녀왔습니다. 여러 종류의 술을 구해 오긴 했습니다만 마음이 써억 드는 게 없었나 봅니다. 중원엔 천일주(千日酒)란 것이 있는데 한 잔을 마시면 천 날 동안 단잠에 빠졌다가 깨어난다는 술이지만 차마 마시지 못하겠다고 술병을 깨뜨렸거든요.”

“그럼, 술을 구했단 말이냐?”

“그럼요. 이번에 가야의 왕주(王酒)를 얻지 못하면 십리(十里) 절반 오리주(五里酒)라도 만든다고 했으니 아가씨를 데려온 게 아닌가요?”

“오리주?”

“예에. 이젠 아가씨같은 미인이 나타났으니 미인주(美人酒)라고 부르겠군요.”

미인주. 이 술은 생쌀을 씹어 뱉어낸 후 그것이 삭아 발효되면 마시는 술이다. 삼한(三韓)의 여러 나라 중 특별한 지역에서는 수천 년 동안 미인주를 만드는 방법이 이어내려오고 있음을 문헌으로 전한다. 때맞춰 칠사가 나타나 술에 대한 얘기는 그 정도에서 끝났다. 미실은 문밖에서 얘기를 나누는 처지가 아니었지만 이 집은 처음인데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얘길 할 수도 없었다.

미실이 바라본 소년은 나이가 열여섯은 돼 보였으나 몸이 가늘고 눈매가 서글서글했다.

“네 이름이 칠사냐?”

“예에, 아가씨.”

“이 댁 나으리와 이곳으로 오기 전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은 게 있다.”

“부탁이라니오?”

“나의 방으로 들어오너라.”

미실은 서둘러 앞장섰다. 방에 들어서자 칠사는 문가에 무릎을 꿇고 자리를 잡았다. 미실의 얘기가 이어졌다.

“혹시 염구(炎鳩) 선생을 아느냐?”

“고향 사람입니다. 아가씨께서 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소인은 가야(伽倻) 사람입니다. 물론 염선생도 가야 사람이지요. 그 분의 부친은 의술에 뛰어났지만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그 분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말을 하거라.”

“염구(炎鳩) 선생이 나를 이 댁에 머무르게 하시고 어느 때인가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을 거라 했습니다. 내 병을 치료할 물건을 내놓으면 그때 내게 숨긴 말을 하라 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네 이름이 ‘먹 칠한 뱀’, 칠사(漆蛇)라 했느냐?”

“소인의 고향 가야(伽倻)엔 산세가 좋은 곳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소인이 머무는 ‘뱀 바윗골’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많기로 소문났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는데 왕주(王酒)를 제조하는 것도 이곳이어야 효험이 높다 했습니다. 염구 선생을 만난 곳입니다만 그 분은 술을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만 아주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염구의 부친이 가야 왕실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의인(醫人)이었기에 그 분의 아들도 자연스럽게 그 길을 걸었다. 당시의 의원은 신령의 계시를 받아 환자들을 다루었기에 왕실에서는 그를 ‘의인’이라 칭하면서도 칭호를 달리했다. ‘술’을 사용해 사람들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신령=(巫)’으로써 환자들을 다루었기에 ‘의인(毉人)’이라 한 것이다. 후대에 와서 ‘의(醫)’와 ‘의(毉)’는 같은 맥락으로 쓰이지만 여기엔 차이가 있다.

▲양온서(釀醞署) ; 술을 만드는 관청

▲의인(醫人)과 의인(毉人)은 병든 사람을 치료하지만 그 뜻은 다르다.

▲사슴 손잡이검은 첩보원(細作)들이 사용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