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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책과 몸을 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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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는데….’ 독백하듯 무심히 뇌까려본다. 창 밖은 세찬 바람에 깃발 퍼덕이는 소리 요란하고,내려다 본 마을 광장엔 햇살이 눈부시다. 폭양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포쇄(曝書)하기에 알맞을 성싶다. 고서점에서 구한 몇 권의 책을 들고 광장으로 나간다.
바람은 예상보다 강했다. 습기 찬 책을 햇살과 바람에 말리느라 몇 권 펴놓자 순식간에 훨훨 날아가는 종이쪽 종이쪽. 이런! 깜박했구나. 책을 산 까닭을 까맣게 잊고 무작정 벤치 위에 펼쳐놓았구나. 바람에 날리는 종이쪽지를 잡느라 필자도 지나가는 행인도 허둥지둥거리는데, 그 사이 갈피에 끼워놓았던 다른 종이들이 바람을 타고 더욱 멀리 날아가 버린다.
아쉬운대로 가까스로 수습하여 숨을 돌린다. 파손된 책이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바람을 이해했다는 것. 마음을 돌리고 풍향에 맞추어 책을 조심스럽게 널어둔다. 차분한 마음으로 내용을 들추어보기도 하며 책을 귀중하게 여겼을 그 어떤 분을 상상도 해본다.
‘위기독본(圍碁讀本)’과 ‘위기강의록’은 판심(版心:인쇄 후 가운데를 접어 양면 쪽을 만들었을 때 접힌 부분)을 가진 제본(製本) 방식이었다. 그런데 경이로운 것은 책의 소유자가 그 판심을 잘라서 면(面)을 새로 만든 다음 그 면에 신문의 관전기를 오려 붙였다는 점이다. 한 쪽마다 관전기를 2장씩 붙여서 연구한 흔적이 뚜렷하다. 그 정성이라니!
‘위기독본’이 1935년부터 1941년 사이에 67판을 찍었다는 사실에서도 책을 아꼈던 분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책의 주인이 남긴 애정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누군가의 시 ‘눈 길 걷는 자 함부로 걷지 말라. 뒤따라오는 이의 앞 길이 되리니…’를 굳이 들출 필요도 없으리라.
독자에게 그 분의 마음 하나 전한다. 맞보기의 예로써 상변의 백1 공격에 흑2가 둔탁하나 좋은 행마법. A와 B를 맞보아 흑의 탈출은 가볍다. 하변의 흑4도 멋진 착상. 5과 6를 맞보아 고개를 내민다.
바람과 햇살이 혹여 지나치게 시간의 습기를 앗아가지 않았을까. 그 두려움에 500㏄ 한 잔으로 돌아오는 길을 헹구었다.
(2003-04-22 문용직 프로5단 사이버오로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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