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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와 리듬으로 어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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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정말 어찌할 수 없다. 필자가 바둑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만 참으로 피하고 싶은 것이 언어(言語). 그러나 어쩌랴. 글로 표현할 수밖에.
언어는 생각과 문화의 연장물이기에 진실과는 거리가 없지 않다. 특히 바둑과 같이,공간과 인간의 생체리듬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그런 상황에서 언어는 외롭다. 바둑의 속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
명인에게 명예가 따라다니듯 이창호 9단에게도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부동심(不動心),강태공,느림의 철학 등…. 그 어느 것도 이 9단의 심리적 내면을 제대로 드러내는 단어가 아닌게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 9단의 심리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의 바둑의 이면에 대해서 하나 표현하고 싶다. 아니다. 말하고 싶은 건 그의 바둑이 아니라 바둑의 일반적인 본질에 대해서다. 리듬. 지난 3월18일 이창호 9단과 하네 9단의 춘란배 세계대회 결승을 보면서 가슴에 떠오른 리듬이라는 단어.
기보를 잠깐 보자. 하네 9단의 백1에 대해서 이 9단의 흑2 이하는 부드러운 지킴. 백7은 대세점이고 우하귀 흑8 이하는 백7을 완화시킨 조화. 순간 바뀐다. 몸을 돌린 자세로 흑14,16,18. 급소의 긴밀한 공조(共助). 감미로운 음색을 뒤이은 재즈의 즉흥적인 격정. 시냇물을 박찬 격류의 리드미컬한 반향.
무용과 연주 등 예술 작품은 물론, 스포츠도 행위자와 보는 자의 리듬이 공조(共調)를 이룰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당연히 이 9단도 그런 리드미컬한 돌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무대에는 하네 9단도 참가하여 함께 박자를 맞추고 있고.
그 뿐만이 아니다. 바라보는 우리 역시 프로든 아마추어든 그들의 바둑에서 어떤 리듬감을 공유하는 듯하다. 이 9단의 바둑이 우아하다고 느낄 때가 많지 않은가. 물론 어느 순간 그 박자는 서로가 엇갈려 폭발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바둑은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니까.
최근 프로 바둑의 초반이 급진보다는 여유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빠르고 단속적인 현대 대중문화의 리듬감과 달리 바둑에는 어떤 주기적인 패턴이 내장된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뭔가 안정감을 맛보는 것은 필자만의 감각일까. 아닐 것이다. 애기가 여러분도 지금 돌의 리듬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 문용직 프로5단 2003-03-25 사이버오로 자문위원 )
○... 관련기보는 제4회 춘란배 결승3번기 제2국, 이창호 9단 vs 하네키 9단의 대국이다. 이창호 9단이 종합전적 2-0으로 승리해 현존하는 모든 세계대회를 1회 이상씩 우승하는 '그랜드슬램'의 대기록을 작성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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