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의 운명(단편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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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의 운명(단편 2-1)
2022-05-03 조회 271    프린트스크랩

             나르시스의 운명

                                                                                      김 이 식

도시는 지나가는 사람과 버스로 약간 분주하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여인은 전혀 초조한 기색도 없이 무려 30분이나 그냥 버스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둔다. 가끔 싱긋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여인의 동공은 크게 열려있다. 금방이라도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아름다운 눈이다. 한때 누군가를 향하여 열렬하게 사랑을 호소함 직한 눈이다. 순간 여인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난다. 창밖에 비치는 50중반의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는 눈빛이다. 다시 싱긋이 웃는다.

여인은 25년 만에 P시로 내려왔다.

여인이 대학공부를 하였던 P시는 그녀에게 각별하다.

청춘의 열정을 고스란히 바쳤던 도시는 여인에게 청춘의 덫이요 아픔이 서린 곳이다.

그녀가 공부하였던 전자과는 2층에 있었고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근무했던 화공과 실험실은 1층에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그가 부르는 노래 소리 2층으로 올라왔다. 3월에 입학한 이후 그녀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그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귀담아듣곤 했다. 그는 성악을 해도 좋을 만치 아름답고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온몸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신록이 한 참 무르익던 5월 어느 날 대학의 상징인 독수리 탑 옆에 그가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르시스와 그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서 그가 앉아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밤색 양복에 물방울무늬의 넥타이가 잘 어울렸다. 이 대학 화공과를 졸업하고 실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의 삶을 동경한다고 했다. 희생적인 삶에 감동을 받았다나.

그녀는 그의 모두가 좋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온통 그의 생각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녀는 천상의 공주도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가 그리우면 노래를 불렀다. 노래 가사 속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대목도 있었는데 그런 장면에서는 더욱 신명을 내어 노래를 불렀다. 스스로 생각해도 은방울이 굴러가듯 슬프고 애조 띈 목소리였다. 어떤 날은 그의 목소리가 다소 음울하게 들리기도 하였다. 어쩌면 시를 밤새워 썼는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한 번도 어떤 시인의 시도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코프 같은 표정을 짓곤 하였다.

-저 소냐에요. 사랑을 주세요. 라스콜리니코프여-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 전혀 화공기술자가 될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제껏 보아온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도 한 참 달랐다. 여러 사람의 성격을 한데 모아놓은 것 같은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인물이었다. 돈키호테 같기도 하고 우리 시대를 앞선 사람 같기도 했고 전혀 현실감이 없는 사람 같기도 했다. 꿈꾸는 소년 같은.

며칠 동안은 그를 보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그녀를 피하는지도 몰랐다.

그가 보이지 않았던 며칠 동안 신열에 떨면서, 그녀는 노트에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토해내었다.

님이여! 세상 고뇌 다 짊어진 표정만 하지 말고

저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세요

사랑에 목말라하는 여인이 여기에 있어요

그대의 눈길을 나로 향하게 할 수 있는 비법 뭐 그런 것 없나요

매일 그대를 향하여 부르는 노래 이제 지쳤어요

포근히 안아 주세요

차가운 세상

외로워요

그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해요

따스한 봄빛도 내 마음을 녹이진 못해요

오직 그대만이 저에겐 세상의 전부예요

님은 언제쯤 저에게 마음을 열어 주실 건가요

이렇게 세월만 하염없이 보낼건가요

그냥 보통 사람마냥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 주세요

설혹 그 말이 희곡에 나오는 대사라 하더라도 괜찮아요

! 사랑 하다가 사랑 하다가 사랑 속에서 이대로 죽고 싶어요

그녀가 과거로 훌쩍 떠나 있는 동안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가 몇 번이고 울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면서 과거로부터 현실로 돌아왔다.

-엄마 어디 있어요.

이번 토요일 날 혜정이하고 집에 한 번 놀러 갈까 해요.

올가을이 가기 전에 약혼식이라도 올리자는데.

엄마하고 의논하고 싶어요.

집안이 좀 차이 난다고 엄마가 얘기는 했지만

허기야 혜정이네가 부자이긴 해도

그녀 아빠가 부자지 혜정이가 부자는 아니잖아요.

나도 한국에서 벌써 인정받는 수학자!

아들은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았다.

오냐! 아들아 네 녀석이 진정 좋아하는 여자라면

약혼 아니라 당장 결혼식도 올려주마

건데 말이다. 오늘은 엄마가 서울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단다.

엄마가 청춘시절을 보냈던 P

가끔 엄마가 넋두리로 말하는 것 들었쟈

가련한 내 아들아 엄마를 얼마나 평소에 원망 했겠니

언제나 너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낳아준 아빠가 살아 있음에도 아직 한 번 만나지도 못했으니

이 얼마나 못난 어미일꼬

너를 가지고 훌쩍 P시를 떠나 왔으니

너의 아빠는 전혀 모르고 있었단다.

하지만 너의 아빠 행방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저께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너의 아빠가 작년에 등단을 하여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글을 보았다. 한국소설가 협회 회원으로 연락처도 있더구나. 너의 결혼식 전에 한 번 뵈었으면 어떻겠니?

하늘이 결코 무심치 않았구나

인터넷에 고마워해야 하나

그녀는 아들에게 핸드폰 문자로 그녀의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혼자 아들을 키우다가 아들이 세 살 때 다섯 살 많은 노총각에게 시집을 갔었다. 비교적 평탄하게 생활을 하였고 길러준 아빠의 공으로 아들은 훌륭한 수학자가 되었다. 삼 년 전에 췌장암으로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청춘시절에 그녀의 혼쭐을 다 빼앗았던 그 남자를 찾았던 것이다.

25년 세월은 서로를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찾아주는 것은 사랑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그녀가 꼭 해결해주어야 하는 의무사항이기도 했다.

플라타너스 잎들이 누렇게 변색되어 가고 졸업을 앞둔 방학이 일주일 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그녀가 전자실험을 마치고 평소보다 좀 늦게 캠퍼스를 나서는데 그가 산 쪽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등산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무어라 물어보았지만 그는 속 시원히 왜 산으로 갔는지 말하지 않았다. 사생활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는 데 대하여 도리어 약간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같이 커피 한 잔을 먹자고 했더니 그는 오늘 숙직이라고 간단히 거절을 하였다. 그녀는 그와 오래도록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빨리 그녀가 가주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자취방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밤이 이슥해지자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 전화였는데 숙직실에서 그가 전화를 받아 주었다.

그가 학교 숙직실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세상의 이목이 없는 숙직실에서 그와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무작정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세상이 정한 도덕의 굴레보다 지금 그녀 내면의 목소리는 그와 밤새도록 함께 있고 싶다는 외침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그의 숨결과 살 냄새를 맡고 싶었고, 그를 그녀의 소유로 하고 싶었다.

그가 존재하는 이 땅 어디라도 그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의 욕심은 없었다. 그녀 자신의 사랑만큼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연을 사랑한다면 그냥 바라만 보아도 된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학의 일부 교수들이나 조교들이 가끔 식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다. 심지어 윤리 과목을 담당하는 교수는 학점을 미끼로 그녀의 몸을 요구한 적도 있었고, 전자과 조교는 같이 결혼할 생각마저 있다는 언질을 주곤 했다. 그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그에게 얘기를 해주었지만, 그는 전혀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의 육체를 가지려고 안달을 부렸지만, 그는 아주 달랐다.

그러나 그 남자는 전혀 그런 낌새조차도 없었고, 일주일 전에 여관에 갔을 때도 손도 대지 않고 그녀를 그냥 보내주었다. 점점 그녀는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 때문에 미친다는 말을 그녀는 그즈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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