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승부(단편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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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승부(단편3-1)
2022-05-07 조회 77    프린트스크랩

마지막승부

                                                      

 

아주 미세한 승부였다.

반면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초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이 가빠져 오고 모니터에서 바둑판이 흔들거렸다. 이 판만 이기면 삼백만 원을 거머쥔다. 그 돈이면 적어도 넉 달은 생활할 수 있다. 8이 울리자 천기묘수는 시간을 벌 셈으로 팻감 하나를 소모한다.    

-묘수님, 너무 심각하지 마셔요.

ㅎㅎ 늘 여유가 있는 마법의 공주! 모니터에 그녀의 글이 금방 올라왔다. 그녀에게 아직 정수는 판 맛을 못 보고 있다. 다른 사람과 결승 판을 둔다면 좀 여유가 있으련만. 초속기로 공격해도 그녀는 빈틈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이목구비가 또렷하지 않은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마법의 공주여, 그대는 전생에 프로였던가?

 아무래도 반집이 모자랄 것 같았다. 승부처는 없다. 하필이면 6.5반인가, 덤에 걸린다. 천기묘수의 계가는 정평이 있었다. 정수는 항시 계가를 하면서 바둑을 두었다. 지나치게 세밀하여 언제나 초읽기에 몰리는 게 그의 단점이었다. 프로만 되었더라도, 그는 서너 시간짜리 바둑을 두었으리라. 피를 말리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패배를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일선에 남은 후 수 2집 자리 끝내기를 했다. 마지막 한 집을 그녀가 하고, 정수는 반 패를 땄다. 그러나 팻감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제기랄, 팻감 부족으로 삼백만 원을 날려버리다니! 패를 양보하고 계가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정수의 반집 패배였다.

 -오늘 즐거웠어요. ㅎㅎㅎ 다음에 또 결승에서 뵙기를, 안녕히.

 정수가 키보드를 치기도 전에 그녀는 화면 너머로 황망히 사라졌다. 벌써 세 번째 당했다. 마법의 공주를 꺾지 못하는 한, 인터넷 바둑에서 우승은 요원했다. 어떤 여성일까? 얼굴은, 목소리는, 눈매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한번은 복수를 해야 될 것이다.

 정수는 잠시 복기를 하고 모니터를 꺼버렸다. 깡 소주를 병째로 목구멍 속에 꼴깍꼴깍 털어 마시고,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자장가 삼아 침대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그러나 의식만 또렷해질 뿐 잠은 오지 않았다.

 

정수는 어제 두었던 바둑을 바둑판 위에 돌을 하나씩 갖다 놓았다. 흑의 양화점과 백의 양 소목 좌하 귀 소목에 한 칸으로 높게 걸치자 백은 손을 빼고 우 하 귀에 날일 자로 굳혀왔다. 흑은 백의 확장을 염려하여 우변 화 점 밑에 3선으로 벌림을 택했다. 이후 백의 운석은 물 흐르듯이 거침이 없었다. 주로 3선에 백의 돌이 많았으나, 중앙 경영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2연성을 살려 세력작전을 폈으나, 100여 수가 지나자 선착의 효는 사라지고 없었다. 중반 이후 백은 두텁게 싸 바르고 상대가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렸다. 이때부터 백이 약간씩 물러나면서 우세를 다지는 완벽한 바둑을 두어 백의 완승이었다. 차이는 반집이었으나, 백은 승리의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늦추고, 미세하지만 두터운 국면으로 이끌고 있었고, 흑에게 단 한 번도 이길 기회가 없었다. 집 차이가 많이 나는 바둑은 피차 전투가 격렬하여 불계로 가기 십상이지만, 이런 집 바둑은 한 번 걸려들면 빠져 나오기 힘들었다. 그녀를 이기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그녀의 벽을 넘지 않는 한 다가올 국수전에서 결코 우승의 희망이 없었다. 자신보다 상수가 존재하는 한 결코 그가 아마바둑 중의 최고수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이길 비법은? 3개월 뒤 국수전에서 우승하고, 내년에 일본 나고야에서 벌어지는 세계 아마바둑선수권에서 우승하면, 꿈에도 그리는 프로면장을 받을 수 있다. 기보만으로 상대를 파악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다면……?

 정수는 마법의 공주에게 메일을 보냈다.

-마법의 공주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겠지요. 벌써 세 번씩이나 물을 먹고 나니 슬슬 궁금해지는군요. 공주님의 바둑은 프로 이상이에요. 그래도 2년 전에 연구생 1조에서 랭킹 5위 안에 있었던, 거의 프로 4단 격이었던 나를 이긴 사람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오프라인에서 다시 한 번 승부를 겨루고 싶어요. 그리고 공주님은 어디에 사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물론 외모도 바둑 실력만큼이나 깔끔하겠지요? 저는 인천에 살아요. 부디 이 메일 받고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리고 제가 메일을 볼 수 있는 날짜는 7일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산속의 절에나 가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아야겠군요. 그럼 안녕히.

 

 현암사(賢岩寺)주위는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혼 무렵이면 산자락은 싱싱한 수목들이 내뿜는 향기가 더욱 짙어지고, 새들이 둥지를 찾는 날갯짓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산 중턱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자그마한 절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게 다가왔다. 목탁소리는 일도(一道) 스님 방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왔다.

"밖에 누구냐?“

 스님의 목소리는 따스하면서도 단호했다.

, 스님! , 정숩니다.”

정수냐? 먼 길을 왔구나.”

우선 시장할 테니 부엌에서 요기를 하고 들어오너라.”

 눈에 익은 부엌에 들어가 반찬을 보아하니, 보살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듯 깍두기와 나물무침 서너 가지였다. 대충 허기를 면한 정수는 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몰골을 보아하니 세 끼도 제대로 못 찾아 먹은 듯하구나. 저 사흘 굶은 살쾡이 꼴이라니…… 쯧쯧. 그래 이 눔아, 네 살길을 찾아보라 했거늘 아직도 승부에 매달리고 있느냐.”

죄송합니다. 아직은 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안타까운 눈길로 정수를 어루만지며 더듬던 스님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화두를 가지고 나타났느뇨.”

정수는 일전의 결승전 바둑에 관해서 간략히 말했다.

스님, 제 바둑의 단점이 무엇인지 말씀 좀 해 주세요.”

어허, 그것을 알면 내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지.”

 정수는 그저 멍할 따름이었다. 그러자 스님은 찬찬히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무겁게 말했다.

그러면 그 바둑을 한번 복기해 보거라.”

 정수는 한 수 한 수 마치 실로 천을 짜듯 복기를 해나갔다.

 말없이 바둑판을 들여다보던 스님의 안광이 일순 빛을 발하며 번뜩였다. 스님은 이십 대 초반에 이름을 날렸던 천재기사로 더 이상 오를 나무가 없었던 거목이었다. 그 뒤부터 승부의 덧없음에 회의를 느끼고 입산수도하여 전국을 배회하다가, 이 골짜기까지 이른 것이라고 들었다. 법랍 스무 해가 넘었지만 아직도 청춘 시절에 정신을 사로잡았던 바둑을 보면 얼굴빛이 변하는 것이었다.

 정수는 한 해 동안 이 절에서 공부를 했었다. 그때 스님은 정수에게 바둑의 기교는 이미 더 가르칠 게 없다고 했고, 정신수양과 바둑을 대하는 승부사의 마음을 스님으로부터 배웠다. 그 해에 세 개의 타이틀을 따고 아마 7단으로 오른 적이 있었다.

 복기 바둑판은 이미 다 끝나고 있었다. 바둑판을 들여다보던 스님이 갑자기 높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허 아직도 이기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구나.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승부에서는 멀어지는 법.”

 스님은 할 말을 잃은 정수를 무섭게 노려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종내는 버리고자 하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것을.”

정수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울었다.

작은 자아를 버려야 큰마음을 얻는 법, 넌 기교는 이미 프로 정상급에 손색이 없으나, 그 마음이 아직은 멀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정수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절실히 물었다.

……스님! 어찌해야 하는지요?”

나를 버려라! 그러면 삼라만상이 모두 너의 것이 되리라. 피곤할 테니 오늘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일찍 자거라.”

스님, 작은 마음을 버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정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님이 말을 받았다.

내일부터 하루에 한 판을 두어주겠다.”

 정수는 합장을 하고 조심이 물러 나왔다. 저 멀리서 아득히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천수경을 읽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실로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한없이 가고 있었다. 잡은 손을 놓더니 어머니는 혼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어머니! 저 정수예요. 어디 가세요. 가지 마세요!’ 안타까운 꿈이었다.

 

스님의 새벽예불을 드리는 목탁소리가 어둠을 깨우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아침 공기는 물기를 머금고 약간 무거운 느낌을 주었다.

 개울의 맑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정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물속에 스님의 얼굴이 비치며 어른거린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아도 스님은 없다. 다시 물을 들여다보아도 자기 자신의 얼굴에 스님의 얼굴이 겹쳐있고, 정겨운 어머니 모습이 어른거렸다. 분명히 초등학교 3학년 때 위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물속에 있다.

 정수는 산란한 마음을 다잡고자, 가부좌를 틀고 아침명상을 했다. 새들이 지저귀는 틈 사이로 어디선가 스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은은하게 맴돌았다.

마음을 비워라, 그리하면 자연과 네가 하나가 되고, 그때 삼라만상은 생명을 얻으리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 있느니. 네가 그것을 보지 못함은 죽어 있음이니라!

 정수는 명상을 하고 요사채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둑판을 꺼내어 조심히 마른걸레로 먼지를 닦았다. 오청원 선생의 책을 꺼내어 기보를 놓았다. 사까다 선생의 기보는 날카롭고, 다케미아의 기보는 호방하며, 조치훈의 기보는 치열함이 있었다. 오청원 선생의 기보에서는 부드러운 탄력을 느낄 수 있었다. 힘의 강약 조절이 자연스러우며, 마치 잘 훈련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듯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직 잘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하나의 예술의 경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수야, 공부하느냐?”정수는 벌떡 일어나 스님 앞에 합장했다.

키는 언제 그렇게 많이 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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