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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움은 어디에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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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움은 어디에서 왔나
2012-01-01     프린트스크랩
▲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중 하나, 그의 여러 그림중 특히 절규(Scream)라는 작품은 현 대 회화의 기념비에 가깝다. 최근까지도 공포영화 '스크림', 코미디영화 '나홀로집 에' 등 영화적인 상상력에도 일조했다.

두터움의 하나 둘(2)

V. 두터움은 어디서 왔나(1) - 생각의 낙서들

과연 앞서의 개념 정의가 제대로 된 것일까.
그런대로 요점은 빠뜨리지 않은 듯한데, 이제 그 성립 과정을 살펴봄으로서 그 증거를 주장해보자.

먼저 대충 떠오르는 요인들 - 아니, 관련되어 있는 요인들 - 을 나열해 보겠다.
이 글을 논문으로 쓰는 것도 아니기에
자료와 전거를 가볍게 다루겠다고 저번에 말씀 드렸기에
나중에 이 글의 주장에 대해서 검토해보려는 분들께 이 글의 출발이랄까, 이 글 형성의 기초랄까 그런 것을 약간 드리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두서없이 나열해 보겠다.

얼마 전 다음과 같은 낙서를 한 적이 있었다. 술이 오가면서.

두터움은 어디서 왔나 - 낙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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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감의 수법이 일본에서 오래 전부터 - 16세기 - 있었다는, 그 사실.
반상에 대한 연역적 이해를 도모했었다는 사실.
도샤쿠의 先占/ open system
구상력의 구체화 / 추상화를 통한
변화는 힘이 있다. 제2의 형태니까.
개념으로 포착하고 적용한다는 거/ 넓게 포착하고/ 핵심을 추상화 할 수 있어야.
왜 귀는 낮아지고 변과 중앙의 가치는 높아지는가/ open system vs. closed system
표현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것
집보다는 부피감, 그렇게 발전했나?
명인은 형상을 思考한다, 프로는 형상을 描破한다/ 반상과 소묘는 유희로 접어든다.
반상을 定義하기보다 喚起할 수 있다면!
바둑은 언어가 많이 굳어져 있다/ 기교와 예술의 중간에서 표현의 제약.
반상에서 형상은 지성적이다/ 두터움 - 색채 - 은 감성적이다.
선, 공간, 색채
선, 형상, 두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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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

삭감을 보면 이런 이해 추론된다.

삭감은 깍는 것. 그런데 깍고 나면, 자신에게 힘이 남는다. 상대의 진영에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러하다. 그 힘이란 것은? 삭감에는 대개의 경우 - 두세 번 손이 오가면 - 두터움이 남아 있다는 인상 얻는다. 세모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

그러니 삭감을 하다 보면, 공간 감각과 실리 감각의 조정이 드러난다. ... .

연역적 논리를 일본 바둑에서는 도샤쿠 이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 수나누기와 맞보기 등을 생각해보시라 - 그 습관이 들면 추상적으로 사고하고 추상적으로 감성을 이끌어내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면?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감성은 손을 잡는다. 그러면? ...

개념으로 포착한다는 것의 힘을 내면으로 체득할 것이다. 모호한 것을 부여잡는 힘을. 두터움은 모호한 세상의 한 갈래. 

이런 식으로 이것 저것 남겨두었다. 체로 거르지는 않았지만.


VI. 왜 두터움이 현대에 와서 강조될까?

중국과 일본의 바둑을 검토해본 바에 의하면
두터움에 대한 이해는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강조되고 뚜렷이 드러난 듯하다.

보다 좁히면 아마도 두터움은 1940년대부터 특히나 강조되기 시작한 듯하다.
그리고 점차 더 중시되어 온 듯하다.

그래서 반발 또한 적지 않다.
두터움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그런 불만을 토로하는 기사도 없지 않은 것이다.
사까다는 그 대표적인 기사.
아마도 조훈현이나 조치훈도 그러한 입장에 속할 듯하다.
그러나 두터움을 강조하지 않는 현대기사 또한 없다는 것도 흥미롭다.

바둑사에 남는 두 천재가 있다.
17세기 도샤쿠와 20세기 오청원.
오청원이 도샤쿠의 바둑을 해설했을 때, 더할 수 없는 기사라고 했다. 완벽하다고까지 표현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두터움에 대한 도샤쿠의 이해는 제한적이었다고 여겨진다.
바둑 내용을 볼 때(실력도 약한 녀석이! 그런 말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이런 의문 들었다.

만약 바둑이 진보하는 것이라면 - 단선적으로 자체 내의 논리에 따라 -
왜 도사쿠는 두터움을 깊이 보여주지 못했을까?

실력과는 별개의 조건이 개입되는 걸까.

중국의 국수들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들은 두터움을 잘 몰랐다. 무관심하다 할 정도로.
이는 도샤쿠의 경우보다 더욱 뚜렷하다.

이만 보아도
두터움이란 것이 자연스런 현상인 것은 아니라는 짐작이 든다.

두터움은 아마도 문화적인 현상, 즉 바둑의 세계가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또 바둑이 살아가는, 그런 관념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즉, 우리는 “두터움”을 그 어떤 감성적인 질(質)로 느끼는데
그 감성이라는 것이 최근에야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중반에야 분명해진 그런 거.

그러므로 가볍게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왜 두터움이 20세기에 와서야 강조될까?”

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20세기에 와서야 그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런가. 그런가.
그러면 그 조건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말해보라.


VII. 두터움은 어디서 왔나(2) - 두터움을 구성하는 역사적 문화적 조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역시 낙서다.

두터움은 어디서 왔나 - 낙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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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미적(美的) 기준이 20세기에 와서 서구의 가치에 의해 약화되었다.
2) 선이냐, 형상이냐, 두터움이냐, 그것은 기사 개인의 개성과도 밀접하다.
3) 슈코와 같은 도전적인 기사에게서야 비로소 일본의 고전적 가치가 아닌 것이 강조된다.
4) 사회의 미학적 기준을 개인은 내면에 받아들인다. 현대는 색채와 빛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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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와 슈코는 현대 바둑에서 특히나 두터움을 강조한 기사. 선도 굵다. 굵직하다. 바둑을 짜나가는 배포부터 굵직하다. 그야말로 “에라, 모르겠다.” 그 표현을 반상과 반외에 던지고 또 던질 수 있는 기사다.

슈코는 두터울 뿐만 아니라 중앙감각에도 뛰어났는데, 바로 이 점을 생각해보자.

두텁고 중앙 감각이 뛰어난 기사는 많을 것이다.
다까가와(高川 格)와 유창혁은 방금 떠오른 두 사람.

중앙 바둑은 중앙의 공간을 자르는 감각이 뛰어나야만 한다. 그것이 성공의 조건이다.
그런데 “공간을 자른다... .”는 그 표현.

세모가 그 근거가 된다.
반상 전체가 공간, 즉, 세모로 와야 한다(앞서 8도를 참조하시라. “수법의 경계” 논의에서 드린 슈코의 바둑을 참조하시라).

이것이다.
이 점을 놓칠 수 없다.

두터움을 제대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공간을 자르는 감각이 강해져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중세 이후 1930년대 초까지 일본의 바둑은 3선에 갇혀있었다.

반론이 즉각 떠오른다.
3선을 경계로 공간을 나눈 거 아니냐? 그래서 그건 공간감이 충분하므로 색채감을 대신할 수 있지 않으냐? 동양화의 묵(墨)의 감도는 그 표현의 하나일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한 질감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렇지 않은 듯하다.

1930년대 신포석의 중앙 감성에 비하면, 그 이전의 기사들이 가졌던 공간에 대한 감성은 매우 수준이 제한적이었던 듯하다.

이리 생각해 본다.
세모의 형상, 그것을 중시해본다.

신포석만큼 세모를 반상의 감성으로 확장한 예는 없었다 - 낙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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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모는 질감을 높인다. 공간감과 부피감, 형태가 충실해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2) 반상 전체를, 즉 부분 세모의 형상을 전국적(全局的)인 견지에서 세모로 가져가는 힘은      1930년대의 신포석 혁명 이전에는 약했다.
3) 두터움은 공간감 없이 등장하지 않는다.
4) 신포석 혁명 이전에는 공간 보다는 선이 먼저였다. 공간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없었다는 것은 아니나 훨씬 부족했었다.
5) 신포석의 세상에서는 돌의 주변 공간 점유 관념이 더욱 강하기에 두터움의 감성을
   창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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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된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론적으로도.
새롭게 모호한 것이 열렸다.

어떻게 받아들이나?
“감성적 기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두터움.
그 두터움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감성이 반상과 만나야 한다.

신포석 이후 중앙의 공간을 자르는 감각이 강렬해진 것과
신포석 이전에 그 감각이 부족한 것과는
두터움의 질감을 감성으로 갖고 노는데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가져다준다.

바로 이 점이다.
이 점이 20세기 중반에 와서 두터움에 대한 강조가 나날이 늘어난 이유다.
실력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모든 기사들이 두터움을 강조하고 또 할 수 있는 이유다.

그건 바둑 내용을 보면 너무나 뚜렷하다.
예컨대 두터움에 대한 이해와 감성에 대해서는 이 글 쓰는 하수(下手)도 1930년대 이전의 기사에 비해서는 꽤 낫다. 명인 수준을 제외한다면.

중세의 명인들은 현대의 명인들과 비교하면 또 차이가 크다. 돌의 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VIII. 먼 길 걸어서 얻은 두터움, 출발의 힘으로

이 글의 관심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두터움은 어떤 역할을 하나?

가벼운 답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21세기 초. 우린 두터움이라는 색채를 통해서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반상의 실제를 그려내고 이미지화하고 있다. 두터움은 일종의 반상의 숨겨진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하다. 우리가 착점하면 형상이 반상을 때리는데, 그 형상의 안정성과 힘을 우리는 다른 표현으로 다른 감성으로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성과 힘이 합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두터움”이라는 새로운 표시법으로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입체감을 얻기 위한 하나의 색조체계(tonal system) 같은 거.
시각적 질서로서의 형상에 더하여 창조적 힘이 된 것 - 창조되면 감성으로 환기되어지기에.

덧붙인다.

패러다임 같은 큰 모델이 등장하면 그 후엔 모두가 공간감각과 형태감각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내는 힘을 얻는가?
그러하다.

감수성만으로도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러하다. 만들어낸다.
아니, 즉각적으로 끄집어낸다.
아니, 감성과 표현은 전환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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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山靈 |  2012-01-01 오전 8:43:5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유.
문사법님 건강하시고요.  
太公望70 |  2012-01-06 오후 1:21:45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 너 무엇이냐? 그 본질을 극한으로 쥐어짜며 규명하려는 문박사님의 노고를 경의합니다. 361로의 바둑판에서 3선과 4선, 실리와 세력, 발빠름과 두터움, 확실성과 불확실성은 영원한 숙제일 것입니다. 점,선,면,입체 개념을 가지고 열린 눈으로 바라보면 두터움의 위력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두터움은 바둑의 희망 코드입니다.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판세를 압박하는 핵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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