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지교(手談之交)는  바둑을 알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바둑의 중요한 덕목이다. 이 덕목에 기력의 차이가 장애가 될 수 없지만 일정한 수준을 넘어선 고수들에게 맞수의 의미는 생각 이상이다.

지남규는 가까운 곳에 맞수가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을동에게 감격하여 며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어느새 맞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10월7일. 종일 눈이 왔다.
종일 눈이 왔다. 상점은 개점휴업이다. 나무값 5량 술 고기값 3량이 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둑을 두었다. 오랜만에 보는 손맛이다. 가인이 오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바둑판 위에 돌꽃이 핀다. 백돌 흑돌은 바둑판 위에서 생사를 다툰다. 아 옛사람은 가고 새 사람이 왔음인가?  을동이 새사람이다.

(終日之雪 店休業 柴買五兩酒肉價三兩 朝夕之間 對局而舊時手味也 來佳人方時 天雪落局石花生 黑白圍碁爭衡枰 嗚 往舊人來新人耶 乙童似新人也)

오랜만에 보는 손맛이라 한다. 바둑인들이 말하는 판맛을 말하는 것이겠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자 바둑판 위에 꽃이 핀다는 말이 멋지다. 눈 내리는 그 겨울밤, 스승과 제자가 시골읍의 한  방 안에서 바둑판 앞에 앉아 있던 모습이 선연하다. 시간과 공간은 무너졌어도 그 잔상은 남아 '지남규와 을동의' 모습을 생각케 한다. 신구의 교대랄까. 시간은 그리 가고 역사는 그렇게 쓰여진다.

(고서 경매장에서 본 간찰. 지남규가 꿈꾸던 시대의 잔상이 남아있다.)

2010년 겨울.

서울 압구정의 한 기원에서 리그전이 한창이다. 이름하여 '압구정리그'다. 이 리그에 바둑이라면 죽고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 반상의 쟁투사를 쓰고 있다. '장시영' '강영일' '박성균' 등 면면이 장난(?)이 아니다. 아마7단급 20여 명이 모여 벌이는 대국은 외면하기 아까운 장면이다.  왜 이런 장면이 뉴스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프로들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도 뉴스화 하면서 압구정리그와 같은  뉴스성과 덕목까지 갖춘 기사거리가 외면 받는 이유가 딱하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또 한해가 간다.

누가 세상사 헛것이라 했던가

책읽는 병으로 반평생

따뜻하지 못했던 생, 막막했다.

정신줄 놓고 난분분

역사읽기 도움되지 못했고

글쓰기는 낯 뜨거웠다.

오직 버리지 못한 습성만 남아

추운밤 책상 앞에 앉는다.

(虛世誰乾坤/書痴已半生/風雲從寞莫/分分失溫專/天秋安人略/蕭條文章篇/猶存舊不忘/寒夜坐案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