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조에게 바둑 한수를 배우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온 지남규는 끝내 조를 만나지 못하고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그날 하루종일 비가 내려 출발을 하지 못하고 여관주인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이날밤 지남규는 객지의 여관방에 발길이 잡혀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가정과 국가 그리고 개인의 처신 등을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왜 한양까지 왔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9얼26일. 종일 비.
종일 술을 마시고 여관주인과 대화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나라에는 충신이 있어야 강국이 된다. 가정에는 아내가 정절로 남편을 위해야 한다. 밖으로는 신의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옛날부터 오늘까지의 방식이다. 나는 그리 배웠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는가?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그러나 나는 무엇 때문에 일하고 무엇 때문에 살고 있나? 자문해 본다. 사람은 요순이 아닌지라 아름답게만 살 수는 없다. 그렇다 해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워 산다고 해서 즐겁기만 하랴. 공허한 말이다. 웃음만 나올 뿐이다. (나는 왜) 지금 한양의 여관방에 홀로 앉아 창밖의 비소리를 듣는가.

( 終日雨  飮酒館人談懷而 日盡 有忠臣爲强國 家而妻爲夫貞 外而交爲信 古今之盛式也 我學而  謀爲爲生之 謀爲爲死之 士爲知知死己用 女爲說之容 然而 我 誰爲之 誰爲生 自問 人非堯舜 向能盡矣  然而飯蔬 食飮水 曲肱而枕 樂在何其中矣 可可笑之 方京來  獨坐館 窓外聽雨聲耶)

모처럼 인간을 묻는 지남규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좁혀서는 지남규 자신의 자아찾기다. 한 인간으로 시대를 살면서 어떻게 고민이 없을 수 있으랴. 지남규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한양까지 와서 방황을 하다가 비를 만나 여관방에 발이 묶여야 하는지를 궁금해 한다. 자신이 찾아 헤메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 속에는 입신양면 하지 못한 자책(?)도 어느 정도 담겨 있다.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 때문에 죽나(謀爲爲生之 謀爲爲死之)라는 문장이 주목된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 무엇으로 죽는 것일까.

지남규는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하게 살지 못했다 자탄한다. 인간이 요순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도 해본다. '마치 세상에 몸을 드러낸 이상 신선으로 살기는 틀린 것이다(寓形宇內 帝鄕不可期)'라던 '도연명'의 말을 듣는 듯하다. 이 물음은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일 것이다.

이날의 일기에서 지남규의 문언문(文言文)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최소한 사서(四書)를 암송하고 역사서 몇권은 통달한 수준에 올라서야 이 정도의 한문(漢文)을 구사할 수 있다고 본다. 한문을 읽고 해석하는 수준과, 한문을 기술(記述) 또는 창작하는 수준은 하늘과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