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破局)은 바둑에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서(唐書)에는 바둑을 빗대어 정치를 말하는 대목이 곳곳에 보이는데 파국도 그중 하나다. 당국자미방관자심(當局自迷傍觀者審)이 그런 경우다. 파국은 정상적인 게임의 종국을 말하는 파국(罷局)과는 달리 진행되던 바둑이 바둑내용과 다른 이유로 중도에 작파된 경우를 말한다. 지남규는 호승심과 분노심에 이끌려 큰승부에 뛰어든다. 그 결과는 결코 이름답지 않다.

6월27일. 흐림.
큰아이 생일이다. 비가 그치자 날씨가 무덥다. 30냥 이익을 보았다. 박초시가 김 3톳과 먹 한자루를 보내왔다(海衣三吐墨一丁送來)

6월28일. 흐림.
쌀 담배 아이 옷감 술값으로 50냥을 썼다. 수박 한덩이를 사 식구들과 먹었다. 박초시에게 3백냥을 변통했다. 누가 천패불청 만패불청을 묻는가(何千牌不聽萬牌不聽乎)

지남규가 서와 바둑을 둔 25일과 26일은 일기에 보이지 않는다. 망실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기록을 하지 않고 27일로 건너뛴다. 지남규가 일기를 쓰지 않은 1894년 6월25일은 양력으로 7월27일 금요일에 해당 한다. 그날밤 달의 모양은 초승달이었다. 이 내용은 천문기록원의 양음력 변환 시스템에서 찾아본 것이다.

초승달이 뜬 그날밤 지남규는 포천 서와 큰 돈을 걸고 바둑을 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언급을 하기에 무리가 있다. 지남규가 박초시에게 3백냥을 변통했고 양일간 일기를 못 쓸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볼 때 그날밤의 사단이 능히 짐작된다.

일기 속에서 천패불청 만패불청을 운운하는 대목이 주목된다. 우리는 바둑에서 '만패불청'이란 말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 상대가 어느 곳에 패를 써와도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때의 패는 고기보(古碁譜)에 겁(劫)으로 표현된다. 작년 필자가 발굴 소개한 '바둑용어 32해(解)'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남규는 패(牌)로 쓰고 있다. 만패불청이란 것이다. 패(牌)는 이학규 김려 등의 기록에도 나오는 말이다. 바둑의 용어가 아닌 도박에서 거는 판돈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원래 패(牌)와 패(劫)는 다른 말이지만 도박의 패가 바둑으로 들어와 바둑판 위에서 살아남은 경우라 하겠다. 심노승의 기록이다.

비오는 날 읍내에 촌사람들이 와 바둑을 두면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판돈을 건다. 서로 갈곳을 정하고 왁자지껄하다. 만패 천패 벽패 상야패를 외치며 죽을짓 하는 사람들 천지다(雨中邑村人來圍碁一人傍觀 至爭牌 相乎言牌不聽一人笑曰 萬牌千牌僻牌相冶牌 死執多少)

(이문건의 묵재일기 이 기록에도 10여건의 바둑기록이 나온다. 지남규를 비롯한 조선선비들의 기록욕구는 놀랍다)

바둑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던 지남규는 큰 횡액을 당한다. 그러나 그의 횡액은 집안이 파산할 정도의 그것은 아니다. 일단 그렇게 보인다. 지남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태평하다. 마을 정자나무로 가 여름 더위를 피하고 시(詩)를 한편 읊조리며 한 시대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