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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식 - SK가스전무의 바둑 희화(戱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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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식 - SK가스전무의 바둑 희화(戱畵)
바둑 희화(戱畵)
나는 어린 시절을 꽤나 개구쟁이로 보냈다. 양다리 사이에 이상한 살붙이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 사람치고 어릴 때 개구쟁이 아닌 사람이 있었겠느냐만 내가 생각해도 좀 별났던 것 같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시합을 하다가 그 중요한(왜 중요한지는 훨씬 나중에 알았지만) 쌍방울을 깨뜨려 어머니를 혼비백산하게 하였던 일, 여 선생님 화장실 창 너머로 흙덩이를 던져 넣다 붙잡혀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진 일, 한밤 중에 흰 홑이불 뒤집어쓰고 귀신장난하다 큰누나뻘 되는 과년한 이웃집 처녀를 실신시킨 일 등 미운짓만 골라했다. 어머니께서는 늘상 "아이고 이놈아, 너 언제 사람 될래?"하고 혼잣말을 되뇌이시곤 했다.
그러던 내가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니 남을 골탕 먹이는 일이 시시껄렁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축구, 야구, 농구 등 조금 고상한(?) 쪽으로 취향이 옮아갔고 어머니께서는 나의 변화에 무척 다행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으시면서도 가끔 "너 공부하는 꼴을 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핀잔을 주시곤 했다. 한분밖에 안계신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책상 머리에 앉아 봤자 10분을 버티기 힘들었다.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한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날 지성이면 감천이라 드디어 하늘에서 기회를 주신 사건이 발생했다. 한 친구로부터 뜻밖의 제의가 온 것이다. 시험기간 동안 자기 집에서 같이 숙식하며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어머니께서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고춧가루 뿌리는 말씀을 하시는게 아닌가? "똑같은 놈 두 놈이 모이면 공부가 될까?"
여하튼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우리는 4일간의 합숙 정진에 돌입했다. 합숙 첫날 저녁식사 후 우리는 시험공부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친구녀석이 엉뚱한 소릴했다. "너 바둑 둘지 아니?" "아니, 장기는 좀 두는데…." "임마 장기는 절루가라야∼!" "내가 바둑 가르쳐 줄게." "공부 시작 안 해?" "
바둑 한판 두면서 소화시키고 천천히 시작하자." 결과는 아버지 예언대로였다. 4일 밤낮을 바둑만 두었다. 시험 성적은 전과목 '꽝'에 가까웠다. 내 바둑인생은 이렇게 코믹하게 시작되었다.
자장면 바치며 늘은 바둑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바둑책은 물론이려니와 바둑두는 사람도 무척 드문 시절이었다. 그런데 해괴망칙한 친구를 둔 죄로 고등학교 3년을 바둑공부에 몰두하였다. 사범도 없이 교재도 없이 강호의 두 천재(?)가 만나기만 하면 사투를 벌였다. "우리 몇 급이나 될까?"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지난번에 7급이란 사람 만났는데 내가 이겼어! 우리 둘 다 6급은 될꺼야." 나는 친구의 말을 굴뚝같이 믿었다. 대학을 가면서 우리 둘은 헤어졌다. 대학에 입하하자마자 임자를 만났다. "나 6급인데 넌 몇 급이니?" 나는 목소리를 약간 깔고 근엄하게 말했다. 내 말을 듣자마자 백통을 집어가며 하는 말! "아홉점 깔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사타구니 깊숙이 꼬리를 말아들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 몇 단 인데?" "단은 무슨 단….1급이야." "야 임마, 근데 어떻게 아홉 마리나 깐단 말야!" 시시비비 우여곡절 끝에 아홉점 바둑이 시작되었다.
온갖 분노와 모멸감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이 가슴앓이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를 보기 좋게 때려눕히는 길밖에 없었다. '임전무퇴' '백전백승' '초전박살'의 기세로 돌진하였다. 무수한 잽과 카운터 펀치를 맞으면서 용전분투하였으나 결과는 참담하였다. 아군의 시체는 산처럼 쌓이고 아군이 흘린 피는 강물
을 이루었다. "아, 이럴수가…." 나는 절망감과 허탈함에 넋을 잃었다. 친구녀석은 연상 이죽거리고 있었다
. "주제파악 좀 해라." "지피지기는 백전백승이라."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녀석은 알고 있는 문자란 문자는 총동원하여 약을 올렸고 입담깨나 한다고 자부하던 나는 꿀먹은 벙어리였다. 만약에 이 장면을 아버지께서 보셨다면 "가문이 어쩌구저쩌구" 하셨을 테고 어머니께서는 분명 "미역국 어쩌구저쩌구"하셨을 터였다.
부모님의 꾸지람이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이대로 물러설 일이 아니었다. 치욕을 무릅쓰고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하였다.
"맨입으로는 안돼. 난 프로야." "그럼 돈 내야 되니? 야 임마, 친구한테 무슨 지도료를 받냐?" "그럼 싸게 한판에 자장면 한 그릇 정도로 봐 주지." "그럼 세판 두면 세그럿 사야 돼?" "임마
프로는 하루에 한판 이상 안두는 법이다." 훅 불면 날아갈 것같이 초저녁 해장감도 못 되는 녀석이 바둑실력 하나믿고 임마, 점마를 남발하는데 미칠 지경이었지만 아, 어쩌랴…, 계약서에 날인할 수밖에…. 이렇게 시작된 치욕적인 자장면 지도대국의 판수가 쌓여갈수록 녀석의 입심도 덩달아 발전하여 관전자를 즐겁게하였다. 내 대마가 그물에 걸린 참새 신세가 되어 허우적거릴 때마다 "자장면 비비고 있네"라는 빈정거리는 소리를 감수해야 했다.
자장면 지도대국에서 내기대국으로
치욕이 쌓여가고 응어리가 점점 커질수록 나도 모르게 조금씩 실력이 늘고 있었다. 1 년쯤 지나 자장면 그릇이 봉고차를 그득 메우고도 남을 즈음 둘간의 치수는 두점까지 내려와 있었다. 내 실
력이 만만치 않음을 자각하고 비장한 각오로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오등은 자에 아 본인의 독립인임과…" 3·1 독립 선언서를 인용하며 더 이상 자장면을 상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녀석은 "배은망덕" 운운하는 협박이 통하지 않자 "청출어람"등의 문자를 써가며 회유를 획책하였으나 통할 리가 없
었다. 우리는 새로운 계약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자장면 지도대국을 자장면 내기대국으로 변경한다." 36∼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통쾌함에 눈물이 찔끔거려진다.
이번에 한국기원의 배려로 서능욱 사범에게 지도대국을 받는 영광을 가졌다. 처음 대국제의를 받았을 때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되어 꽤 망설였었다. 별로 바둑 둘 기회도 없었거니와 가뭄에 콩 나듯이 두어 보았자 하수를 상대로 너댓점 접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별로 신경쓰지 않고 즐기는 것이 습관처럼 배어있기 때문에 서능욱 사범에게 폐가 될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회사안에 좌악 소문이 퍼졌다. "석점 치수로는 어림없다." "다섯점은 놔야 될꺼다." "석점이면 9:1로 서사범에게 걸겠다."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렸다. 내가 평소에 사내 하수들에게 미움 꽤나 받았나보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대국 당일 내 딴에는 꽤 열심히 두었다.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집에 오는 길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 옷도 갈아입기 전에 바둑판을 꺼내 복기를 시작했다. "아∼ 이게 내 바둑이란 말인가? 웬 헛발질이 이렇게 많을까?" 즐거웠던 기분이 서서히 가시면서 자괴감이 변모해 가고 있었다. 복기가 진행될수록 내 얼굴을 일그러지고 부끄러움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짜식, 자장면 비비고 있네."
응접실 저켠에서 빨래를 손질하고 있던 아내가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당신 자장면 들고 싶다고 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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