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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피가로의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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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피가로의 이혼
2003-05-06     프린트스크랩
“여보, 아생연후 타살이 무슨 뜻이에요?”
저녁 상을 물린 뒤 병원 자료를 들추고 있던 허기진에게 아내 노상자가 물었다. 그녀는 얼마 전 바둑에 입문했다. 졸지에 스승이 돼버린 외동 딸 허영심양이 바둑 격언 10여개를 외우라고 엄마에게 ‘숙제’를 내 주었던 모양이다. 하긴 히포크라테스를 ‘히프 큰 테스’ 쯤으로 받아들이는 노상자 여사에게 그것은 대단히 난해한 문자(文字)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타살이 아니라 살타야.” 허기진은 거기까지 말하곤 잠시 난감해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바둑 격언이라니까 모두들 무심히 넘어가지만, 사실 이 말 자체는 보통 끔찍한 게 아니다. 아생연후(我生然後)에 살타(殺他)라니. 직역하자면 내가 먼저 산 다음 남을 죽이란 뜻이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원수를 한없이 사랑하다 못해 그 원수가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 쪽 뺨까지 내밀라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생연후 살타는 내가 먼저 산 뒤에 남을 구해주란 것도, 그냥 못본 척 지나치란 것도 아니다. 두 집 마련을 위해 허우적거리는 상대의 목을 아예 졸라버리라는 살생 지령인 것이다.

“어쩜 그럴수가! 세상에나.” 노상자 여사는 갑자기 졸음이 싹 달아난 표정으로 “세상에나”를 거푸 반복해댔다. 그러고보니 설명하던 허기진 자신도 민망해졌다. 의술은 인술(仁術)이고, 인술은 ‘사람을 살려내는 어진 기술’ 이다. 비록 바둑 판 위에서긴 하지만 그는 의사의 몸으로 ‘나 먼저 산 다음 남을 죽이려고’ 허구헌 날 필사적으로 살의(殺意)를 번뜩여 왔던 셈이었다.

어찌 바둑 판 위에서 뿐이랴. 아생연후 살타는 인생사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다. 대다수 인간들이 예수의 사랑 가득한 얼굴, 석가모니의 자비 넘친 미소, 그리고 공자의 어진 표정으로 철저히 위장한 채 살타(殺他)의 찬스만을 노리며 눈을 번뜩이고 다닌다. 큰 살타와 작은 살타, 본격적인 살타와 사소한 살타가 병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 뻔한 사실을 허기진 노상자 부부가 직접 실감하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 사건은 허기진이 아내 노상자에게 건 한 통의 전화로부터 출발했다. 아내는 마침 집에 있었다.
“여보, 오늘 저녁 6시 쯤 딴 일없지? 병원 앞으로 나와.”
“무슨 일인데요?”
“응. 피가로의 결혼 표를 2장 예매해 놨어.”
“다 저녁 때 무슨 결혼식이람. 외국 사람들은 죄다 그 시간에 시집 장가를 가요?”
“뭐? 아니 그게 아니고, 구경을 가자니까.”
“결혼식이 구경할 게 뭐가 있담…. 입장권까지 사야 들어가는 걸 보면 좀 유별난 결혼식인 모양이죠? 알았어요.”

예술의 전당 홀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만 해도 노상자는 건물이 예식장 치곤 너무도 크고 사치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공연이 시작되려면 아직도 20분이나 남았다. 허기진이 손 가방을 맡기고 화장실에 간 사이 노상자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연장 실내는 더 없이 화려했고 관객들은 하나같이 우아했다. 노상자는 자신의 신분이 갑자기 두어 단계는 뛰어오른 듯 우쭐해졌다. 남편의 손가방 안에서 휴대폰 벨이 아우성을 친 것은 그 때였다. 이 양반은 참 교양이 부족해. 이런데 와선 휴대폰부터 꺼야하는 법인데…그녀는 한껏 교양넘친 미소를 지으며 허기진의 손 가방을 열었다.

휴대폰엔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요즘은 왜 안들르세요? 그 날 밤을 잊을 수없어. 보고 싶어요.^^ 해진> 에구머니나. 이게 뭔가. 이 양반 어쩐지 얼마 전부터 거동이 좀 수상하더라니. 해진? 뭐가 어떻게 해졌는지 모르지만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남의 멀쩡한 남편을 보고싶다고? 내 이 것들을 그냥…. 노상자가 휴대폰 스위치를 끈 뒤 손가방 자크를 닫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아, 노여사님 아니세요?”하고 말을 걸어왔다.

증권회사 직원인 박대리였다. 그와 거래를 튼지 1년이 가까워 온다. 노상자는 남편의 수입 가운데 일부를 ‘노후 자금 증식’이란 명분 아래 반 강제로 떼고 있다. 그걸 박대리에게 맡겼고, 그 결과는 눈 깜짝할 새 원금의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남편은 이따금 그 자금의 현황을 물었고, 그 때마다 그녀는 “조금만 더 있으면 두배로 늘어날 것”이라며 얼버무려 왔었다. 말하자면 주식 투자의 참담한 실패는 노상자의 남편 허기진에 대한 최대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하필 여기서 박대리를 만날게 무어람.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바로 그 순간 화장실에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노상자는 어쩔 수없이 남편에게 박대리를 소개했다. 서른 살이 넘었을까, 아직 안됐을까. 그는 노상자를 가리키면서 “누님이 제게 참 잘 해 주시는데…요즘 실적이 안좋아 면목 없습니다”고 허기진을 향해 말했다. 누님이라니. 그는 넉살 좋게도 계속 지껄이고 이었다. “하지만 좋은 종목을 알아냈으니까 바꿔타면 곧 원금의 절반까지는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엔 틀림 없으니까 선생님도 여유 자금이 있으면 맡겨 주시죠.” 젊은 증권회사 직원은 호탕한 웃음을 남긴 채 사라져갔다.

오페라가 시작됐다. 알마비바 백작 저택. 수잔나와의 결혼식을 앞둔 피가로는 신방(新房)을 꾸밀 기쁨으로 손에 자(尺)를 든 채 뛰어다니고 있다. 백작부인의 시녀이자 오늘의 신부인 수잔나가 나가자 피가로는 혼자 남아 카바티나를 부른다. 시종 케루비노, 하녀장 마르첼리나, 음악 교사 바질로…허기진과 동업자인 의사 바르톨로도 힘찬 목청으로 무대를 쩡쩡 울린다. 무대는 화려했고 배우들은 열연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과 귀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허기진은 젊은 증권회사 직원의 언행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고, 노상자 역시 휴대 전화 메시지가 생각나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서양 놈들의 결혼식이라고 좀 다를까 했더니 역시 돈 주고 볼 만한 가치는 눈꼽 만치도 없군. 노상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남편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만 보고 나가자는 제안이었다. 피가로가 케루비노를 빈정대는 내용의 아름다운 아리아 '다시는 날지 못하리'가 드넓은 홀에 울려퍼지는 중이었다. 허기진은 기가 찼다. 바쁜 틈을 쪼개 얼마만에 마련한 문화 생활인가. 티켓 값만 해도 한 두푼 짜리가 아니다. 허기진 역시 공연을 계속 즐길 만큼 마음 편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1막도 끝나기 전에 일어선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5월의 밤 공기는 두 사람의 기분은 아랑곳 없이 부드럽게 온 몸을 휘감아오고 있었다. 차에 오르자 허기진은 아내를 지긋이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저 밥만 먹고 배설만 하면 살 수 있다는 거지?”
“흥, 피가론지 피에로인지 결혼식 올렸으면 다 본거지 뭘 더 봐요.”
“결혼식은 3막에 가서야 해. 그리고 2막부터 얼마나 재미있는 스토리와 감미로운 노래가 등장하는지 알아?”
“까짓거 나훈아나 설운도가 수 천배는 낫더라.”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군. 그나저나 당신 착실히 저축해서 노후 자금 모은다더니 어떻게 된거야?”

드디어 칼을 뺐군. 노상자는 어금니를 지긋이 깨문 채 전의를 다졌다. 방귀 뀐 주제에 성낸다고 제가 먼저 큰 소리를 쳐? 하지만 노상자는 선뜻 조커를 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먼저 살고 상대를 죽이라고 배운 것이다. 그는 우선 아생(我生) 연후에 살타(殺他)를 도모하기로 했다.
“내가 뭐 나 혼자 잘먹고 잘 살겠다고 돈 쓰고 다녔나 뭐? 불리려다 보면 잠시 줄어들 수도 있는거지.” 이 정도로 끝냈으면 별 일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 풀에 감정이 고양된 그녀는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이고 말았다. “남자가 쫀쫀하기는. 소갈머리가 밴댕이 사마귀보다도 작아가지고….”

밴댕이 소갈머리 소리를 들은 허기진이 기어코 폭발했다.
“요즘 병원 형편이 어떤 줄이나 알아? 얼마 안있으면 문닫게 생겼어, 이 여편네야. 편하게 집에 앉아 입에 밥들어가니까 돈 몇백 만원이 무슨 애들 사탕 값인줄 알고있는 모양이군.”
이쯤되면 노상자도 뺑 돌아버릴 수 밖에 없다. 뚜껑이 훌쩍 열리면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데, 허기진이 기어이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당신 그리고 언제부터 젊은 녀석들 누님 행세하고 다녔어? 도대체 그 뺀질뺀질한 자식하고 어떤 관계야?”
사람이 워낙 기가 막히면 말 문도 함께 닫기는 법이다. 노상자가 씩씩거리고 있는 사이 차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간신히 하차한 노상자는 충격과 분노로 현기증을 느끼며 동(棟) 입구에 풀썩 주저앉았다. 허기진은 그런 아내를 부축할 생각도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혼자 걸어들어갔다. 생전 처음 보는 남편의 행동에 노상자는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이튿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허기진을 향해 노상자가 말없이 서류 뭉치를 디밀었다. 이혼 서류였다. 그녀는 내일이라도 함께 가정법원에 함께 출두하자면서 서명부터 하라고 했다. 이 마누라가 언제 저런 걸 다 구했지?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혼이라니. 숨이 컥 막힌 채 허기진은 아내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난 무식해서 당신 수준에 맞출 수 없어요. 나하곤 말이 안 통한다고 퉁줄 때마다 항상 죄짓는 것 같았는데, 이제 당신을 풀어 주기로 했어요.”
“뭐가 어째?”
“나는 당신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애들 사탕값 정도로만 알고…집에 들어앉아 밥이나 축내면서 허구한 날 잠만 자고…재산을 펑펑 까먹은 여자에요.”
“여보 그, 그건…”
“젊은 녀석들한테 누님 행세나 하고 다니고… 그 뺀질뺀질한 자식하고 어떤 관계냐구요? 마음 껏 상상하라구요. 난 이래저래 당신 아내 자격이 없는 모양이니 이쯤해서 갈라서요. 위자료 따위는 요구하지 않을테니까.”

“정말 이럴꺼야?”하고 소리지르는 허기진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먼저 밴댕이 소갈딱지 어쩌구 하면서 화를 돋군 건 당신이잖아!”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녀석하곤 어떤 관계냐고? 아무리 무식하지만 내게도 자존심이 있어요. 나쁜 짓 하다가 들킨 것도 아니고, 유식한 사람은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거에요?”

듣고보니 좀 과했다. 아내가 화낼 만도 하다. 어쨌거나 이혼이라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도 집안 일 야무지게 잘 하고, 무엇보다 외동딸 영심이를 봐서도 이 나이에 이혼이란 말도 안된다. 총각 시절 그녀의 야성미에 반해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가열찬 투쟁을 전개했던 장면이 주마등 처럼 스쳐갔다. 입맛을 쩍쩍 다시던 허기진은 잠시 망설이다 가만히 팔을 뻗어 아내의 손 위에 얹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좀 심했던 것 같군. 미안해.”

기어코 사과는 받아냈다. 고집 강한 남편이 이 처럼 싹싹하게 백기를 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노상자는 남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녀로선 이제 본격적으로 따질 일이 남아있는 것이다. 누명을 벗었으니 이것으로 아생(我生)은 완료한 셈인데, 아생 연후엔 살타(殺他)라고 배우지 않았는가. 노상자는 냉정을 유지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당신 병원 일찍 끝나는 날에도 툭하면 늦는 이유가 뭐에요?”
“아 친구들도 만나야하고, 비뇨기과학회 간부들 볼 일도 많고 그런거지. 또 뭘 따지려는 거야?”
“그럼 해진이가 누구죠?”
“엉?”
“왜 그렇게 놀라요?”
“당,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허기진씨 보고싶다고 메시지가 왔습디다. 요즘엔 왜 안들르냐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거대한 대마가 통렬한 급소 한 방 치중 당해 숨이 꽉 막힐 때의 느낌 그대로였다. 식은 땀을 흘리며 허둥대던 허기진의 뇌리에, 순간 결정적인 묘수가 섬광 처럼 때리고 지나갔다. 해진이란 이름은 강마담만의 전유물이 아니지 않은가.
“음… 그 친구 참 본지 오래됐네. 한번 들르긴 들려야겠군.”
“뭐에요? 여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 시인(詩人) 안해진이 몰라? 고향 후배인데 종종 바둑 글도 쓰지. 얼마 전 사무실을 냈더라구. 아, 당신에게 아직 소개 안시켰던가?”
“허튼 수작 말아요. 그럼 보고 싶다느니, 그 날 밤을 잊을 수 없다느니 하는 건 뭐람. 당신 동성연애해요?”
“허허, 참 지난 번에 내가 통신 바둑으로 밤 새운 날 있잖아? 그날 그 친구한테 무려 7연승을 올렸었지. 녀석이 다음 날 내게 전화를 했더라구. 복수전하게 빨리 만나자고 얼마나 보챘는지 혼났다니까….”

안해진. 그는 틀림없는 남자였다. 허기진은 바로 다음날 그 ‘후배’를 득돌같이 집으로 데려왔고, 그가 내민 명함엔 ‘시인 안해진’이란 이름이 또렷이 박혀있었다. 24시간도 안돼 명함을 급조하기란 불가능하다. 노상자는 뭔가 석연치않음을 느끼면서도 더 이상 내 밀 증거가 없었다. 오히려 ‘피고측 증인’이 저토록 시퍼렇게 살아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남편과 후배는 저녁 상을 물리기 무섭게 바둑 판을 펼쳤더랬다. 그 바둑에 ‘아생연후 살타’ 장면이 등장한 것은 가위 숙명적이었다. [장면도] 상변 백진에 흑이 침입한 상황. 막 백△와 흑△를 교환한 장면인데, 백은 이 괘씸한 침입군을 응징한다는 생각이 앞서 [1도] 1로 차단했으나 10까지 자신이 먼저 잡히고 말았다. 살타를 노리다 아생을 잊은 격. [2도] 처럼 서서히 훗날을 도모하는 게 바른 길이었다.
바둑 판을 물리고 위스키 온더 락스를 홀짝이며 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노상자는 부엌에서 설거지하느라 바쁜지 이 쪽으론 얼씬도 않고 있었다.
“자네 아니었으면 난 꼼짝없이 이혼당할 뻔 했네. 흐흐.”
“바둑 둘 때만 빼면 선배님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간다니까. 그 위기에서 어떻게 내 생각이 났어요?”
“자네 이름을 돌쇠나 용팔이 따위로 짓지 않으신 자네 어르신께 감축할 뿐일세. 킥킥.”
“내 이름 팔았으니 정식으로 술 한잔 사슈. 그 강마담이란 사람 나도 한 번 보고싶은데, 언제 데려갈겁니까?”
“알았네. 내일 당장 가자구.”

허기진과 안해진은 이튿날 룸 살롱 청하로 쳐들어갔다. 가까스로 아생(我生)에 성공했으니, 이제는 하마트면 생 홀아비 신세를 만들뻔 한 원흉을 잡아 모질게 살타(殺他)할 차례였다. 하지만 안해진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강해진 마담은 오히려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앞으로 문자 메시지 매일 보내서 허박사님 내 걸로 만들어야겠네.”
“백날을 보내봐라. 해진이란 이름은 이제 무사통과라구.”
“누가 그 이름으로 보낸대요? 내 이름이 몇 개나 되는지 모르시나봐. 호호.”

아파트 문을 열어준 아내는 가슴에 꽃을 꽂고 있었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고명 딸 허영심 양이 달아준 모양이다.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여보. 그 피가론가 하는 사람, 그 뒤 얘기가 어떻게 돼요? 결혼식 올린 담에 말에요.”
“응. 뭐 잘 살다가, 나중엔 좀 시끄러워지게 되지.”
“어머나, 왜요?”
“마누라가 남편 피가로의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몰래 훔쳐보곤 이혼하자고 했다나봐.”
“피이. 피가로는 뭐 동명이인 후배도 없었대요?”
“그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둘이 이튿날 가정법원에 함께 가서 도장 찍었다지 아마?”

잠자리에 들었을 때 노상자가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여보, 그 아생연후 타살인가…그 말 진짜 신통한 교훈 같아요.”
“타살이 아니라 살타라니깐.”
“아무려면 어때요. 오늘 계 모임에 가서 동창생들하고 심심풀이 섰다를 했는데…고작 두끗 세끗으로 먹은 판이 열 판도 넘어요. 패가 나빠도 안 죽고 인상을 팍팍 쓰면서 버텼더니, 지들이 겁을 먹고 알아서 다 죽어주더라구요. 내가 우선 산 뒤에 남을 죽였으니 그거야 말로 아생연후 타살이 아니고 뭐에요, 호호.”

하지만 그녀의 웃음 소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파열음에 곧바로 묻혀버렸다. 어느 새 허기진은 드르렁 드르렁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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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채 |  2006-11-16 오전 5:4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주변에 흔한것같으면서도 흔치않는사건을 놀라운 글솜씨라 단숨에 끝까지읽게하였씀니다 . 재밋게 잘읽었슴니다  
술익는향기 |  2007-05-23 오전 9:4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와 절라 우끼다... 역시 이홍렬 선생님의 유머와 글솜씨는 양실짱보다 한수 위이신것 같군요... 고풍스럽습니다... 더좀 써주시지...  
탕탕평평 |  2011-09-20 오후 5:12: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정말 치밀한 각본이군요,,, 재미있는 글 계속 집필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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