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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에는 이, 눈에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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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에는 이, 눈에는 눈
2003-04-15     프린트스크랩
김대박의 내기 습관은 정말 못말린다. 세상 만사 모든 일이 베팅(betting)과 연결되지 않은 게 없다. 오죽하면 이름부터가 대박(大舶)이겠느냐만,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다. 만방기원 식구들이 TV앞에 둘러앉아 축구 중계라도 볼라치면 그는 어김없이 스코어 맞추기 리스트를 만들어 쭉 돌린다. 빽빽하게 들어찬 20여가지 경우의 수 밑으로 만방공화국의 위대한 영도자 오만방 원장, 고매한 학식으로 존경받는 구경만 선생 조차도 자기 이름을 안 써넣을 도리가 없다.

이런 정도에 그친다면야 물론 애교로 봐 줄 수있겠지만, 김대박의 도박 취미는 결코 이 선에서 머물지 않는다. 미국과 이라크 간의 종전(終戰) 날짜, 새 정부 출범 직후 각료 명단 발표를 앞두었을 때 여성 장관의 숫자, 최근 새로 태어났다는 복제 송아지는 두 달 이상을 살 수 있을까 못 살까, 대형 가수 보아의 음반 판매량이 비틀즈의 그 것을 넘어설까, 한국의 국제 바둑대회 연속 우승 기록이 몇 회까지 갈까… 등 등 끝도 없이 이어진다. 심지어는 오늘 처음 만방기원에 들른 저 대머리 바둑 손님의 나이 근사치와, 전화번호부 상에 가장 많이 등재된 이름 맞추기 조차도 내기의 대상이 됐다.

내기란 묘한 마력이 있다. 만방기원 사람들은 때론 귀찮아 하면서도, 테마에 따라선 자신감을 갖고 김대박의 내기 제안에 빨려들어가곤 했다. 도대체 복제 송아지가 몇 달을 살게될지, 여성 장관이 몇 명이나 발탁될지 지나 내나 어떻게 아는가. 하지만 김대박의 신통력은 대단해 그와의 내기에서 재미보는 사람은 가뭄에 콩나듯 드물었다. 모두들 김대박에게 돈을 털릴 때마다, 그가 풍부한 자료 수집과 치밀한 분석을 거쳐 내기를 걸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운 없음만을 한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변덕수는 김대박과의 3점 내기 바둑에서 순식간에 2연패를 당했다. 꼼짝없이 2만원을 날린 걸로도 모자라 이번 판도 싻이 노랗다. 김대박이 콧노래를 부르며 약을 올린다.
“이제 그만 던지시지. 시간은 돈이라구. 흐흐.”
딴은 그렇다. 더 두어봐야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이렇게되면 1주일 주급(週給)의 절반이 날아가는 셈이다. 아내에게 또 뭐라하고 손을 벌려야하나. 약이 오른 변덕수는 숙였던 고개를 쳐들며 대들 듯 말했다. “돌을 던지라고 했어요? 김선생 얼굴에다 정말 돌을 던져도 아무 말 마시오.”

김대박은 “흥, 못해도 바보지”라며 빙긋 웃었다. 변덕수가 내던진 3만원을 자신의 지갑에 챙겨 넣으며 흥얼거리던 그가 잠시 뒤 정색을 하더니 물었다.
“변형, 공개된 대국 장소에서 진짜로 바둑 돌을 던질 수 있겠어?”
“못할 것도 없소. 잃은 돈만 찾을 수 있다면….”
“그럼 이번 목요일 구민(區民) 바둑 대회서 한 번 해 볼래?”
“생기는 것도 없이 그런 짓을 왜 해.”
“상대방 면전이 아니라도 좋아. 허공에다가라도 자네가 바둑 돌을 던진다면 내가 30만원을 줌세.”
“이거,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거요?”
“대신에 만약 못해낼 경우엔 내게 10만원만 내놓게. 나쁘게 생각할 것 없어. 이건 담력 테스트 겸 내기니까. 어떤가, 역시 못하겠지? 흐흐.”

덕수는 여전히 ‘홍도야 우지마라’를 흥얼대고 있는 대박의 유들유들한 상판을 지긋이 노려보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대박과 바둑을 두어 잃은 돈만 수십만원은 족히 될 것이다. 바둑과 관계없는 내기까지 합하면 아마도 백만원에 육박하지 않을까. 돈을 떠나 그와의 내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고싶다. 그나 저나 아내 서봉숙에게 단 며칠만에 용돈 떨어졌다고 또 손을 내밀 생각을 하니 기가 차던 참이었다. 덕수는 고개를 떨구며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좋소. 내기 합시다.”

구민(區民) 바둑대회가 열리는 구청 강당에는 알 만한 얼굴들이 꽤 많이 보였다. 만방기원에서도 여럿이 출전했다. 제갈길은 웬 중년과 겨루고 있었고, 수염 허연 노인 맞은 편에 자리한 허기진은 바둑을 이겼는지 입이 찢어진 채 돌을 쓸어담고 있다. 성희룡은 아내 오나랑이 젊은 녀석과 대국하는 게 신경쓰이는 지 그 쪽을 자주 힐끔거리고 있다. 오전에 벌어진 2회전까지 통과한 만방 멤버는 허기진, 김대박, 그리고 변덕수 등 3명이었다.

점심을 든 뒤 오후 대국이 속행됐다. 변덕수는 3회전서도 이겨 갑조 4강에 안착했다. 허기진은 8강에 머물렀고, 최강자 조에 출전한 김대박도 오후 첫 판서 패해 탈락했다. 만방기원 멤버들은 이제 유일하게 남은 변덕수에게 전폭적인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우승은 물론이고 준우승까지도 구청 회보에 인터뷰가 실린다는 소문에 오만방 원장은 전날 밤 출전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까지 하며 격려했더랬다.

변덕수와 준결승서 만난 상대는 이지적 분위기가 물씬한 수재형이었다. 30대 초반 쯤 됐을까. 뿔테 안경 넘어로 쏘는 듯 한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 바둑을 이기면 결승에 올라가고, 우승하면 50만원의 상금이 따라온다. 그 경우 함께 오지 못한 봉숙은 아마 남편 덕수를 업어주는 시늉까지 할 것이다. 오만방 씨는 또 얼마나 좋아할까. 선수석 건너 편 쪽으로 눈을 돌리니 동료들 틈에서 성희룡이 큰 동작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덕수도 양 손에 V자를 그려보이며 화답했다.

바둑은 백을 쥔 변덕수의 우세로 진행돼갔다. 상대는 꼼꼼했지만 변덕수도 착실하게 맞받아쳐 거의 종국 직전까지 왔다. [장면 1도] 흑△ 다음 백이 △로 패를 때린 장면. 이제 더 이상의 변화는 없다. 덕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결승 진출이다. 남은 한 판만 더 이기면 우승 상금 50만원이 내 몫이 된다. 그걸로 봉숙이가 몇 차례나 만지작 거리다 놓고 나왔던 봄 코트 한벌 사줄까. 전업 휴식가(專業 休息家) 신세인 자신에게 시집와 고생만 하는 아내다. 이제야 사람 구실 좀 하게된다는 생각에 덕수는 가슴이 가빠왔다.

순간 힘차게 바둑돌 내려치는 소리에 덕수는 눈을 떴다. [1도] 흑 1의 건너붙임이다. 뭐가 어쨌다는 거야? 덕수는 약간은 성가신 기분으로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아! 그러나 문제가 심각했다. [2도] 백 1이면 흑 2 다음 연단수에 걸려 A로 끊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흑 2 때 백 B면 흑 A, 백 C로 대마 전체가 간신히 사는데, 그 순간 흑 D로 백 9점이 떨어져 대 역전극이 이뤄진다.

[장면 1도] 흑△의 공배 메움 때 백은 A의 곳에 한 수 보강해야 했었다. 원래 이 곳은 [3도] 백 4로 치중하는 끝내기가 있는 곳. 그걸 방비하기 위해 흑이 E로 공배를 메웠다고 속단한 게 잘못이었다. 골인 지점 10미터 앞에서 넘어진 꼴이다. 순간 서봉숙이, 50만원 돈 다발이, 그리고 오만방 원장과 만방기원 식구들이 떠 올랐다. 머리를 쥐어뜯던 덕수는 이성을 잃은 채 손에 쥐고 있던 백돌 두어 개를 냅다 앞을 향해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뭇 사람의 경악해하는 시선을 피해 강당 밖으로 뛰쳐 나왔던 것 같다. 잠시 정신을 수습하고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워 무는데 부터는 어렴풋하나마 생각이 난다.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왔었다. 김대박이었다. 그는 빙글거리며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덕수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가 졌어. 30만원일세. 변형 그런 줄 몰랐더니 내기꾼 자질이 충분하군. 하하.”

그 사건으로 인해 만방기원은 차후 마포구청이 주최하는 일체의 바둑 행사에 1년간 출전치 못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신성한 바둑 행사에 바둑 돌이 공중을 난비했다면, 그 소란상은 안 봐도 짐작이 간다. 다행히 돌은 상대방 청년의 안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건너 편 좌석의 철제 재떨이에 정확히 골인했던 모양이었다. 변덕수는 그 후 한 동안 ‘만방기원의 3점 슈터’란 악명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덕수 앞에는 더욱 기가 찬 얘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 다음날이었다. 만방기원에서 마주친 성희룡이 차나 한 잔 하자며 덕수를 불러냈다. 벤딩 머신에서 종이 컵 커피를 뽑아든 희룡은 웃음 반, 의심 반의 표정으로 덕수에게 물어왔다.
“자네 언제부터 바둑 돌을 던지는 습관이 있었나?”
“할 말 없게 됐네. 미안하이.”
“우리 기원의 명예 실추 따위를 말하려는 게 아니야. 난 개인적으로 심각한 재산 손실을 입었다구.”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기막힌 얘기였다. 변덕수가 돈을 잃었던 바로 다음 날, 그러니까 구민 바둑대회 이틀 전 성희룡도 김대박과 내기 바둑을 두었던 모양이다. 세 판을 연거푸 먹은 대박은 “돌을 잘 던져야 바둑이 는다”며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정색하며 “정말로 돌을 공중으로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묻더란다.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소?”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세상 일이란 알 수 없다구. 이걸로 우리 내기 한 번 할까?”
그의 제안은 이랬다. 이번 구민 대회 때 별 일 없이 지나가면 내가 10만원을 당신한테 주겠다. 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진짜 바둑돌을 던지는 상황이 생긴다면 내게 그 다섯 배를 내 놓겠느냐. 성희룡은 기가 찬 김에 수락했고, 결과는 꼼짝없이 50만원을 뜯겼다는 스토리였다.

또 당했다. 천하의 내기꾼 김대박의 치밀한 시나리오에 변덕수 성희룡이 세트로 또 한 방을 먹은 것이다. 이 사실을 오나랑이 알면 아마도 희룡은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덕수는 지갑을 꺼내 펴 보았다. 김대박에게 받은 수표 3장 중 아직 2장이 남아 있었고, 덕수는 그걸 말없이 희룡의 손에 쥐어주었다. 펄쩍 뛰던 희룡도 “우리는 공동 피해자”라는 덕수의 말에 금세 풀이 죽었다. 그나저나 이게 웬 수모인가. 천하의 장난꾼으로 한 시대를 풍미해 온 둘은 훼손된 자존심을 억제치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건 이후에도 김대박은 여전히 안하 무인이었다. 상대가 누구건 한 수 놓을 때마다 대놓고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오직 이쇠돌 군과 강수만 사범만이 여기서 제외됐다. 내기 상대에겐 고객 관리(?) 차원에서라도 체면을 지켜주는 법인데, 그는 일패도지하는 상대의 행마를 면전에서 한껏 비웃었다. 어쩌면 만방기원 손님들 숫자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도 김대박 때문일지 모른다. 상수가 대놓고 무안 주는데 주눅들지 않을 하수가 어디 있겠는가.

다시 사흘 뒤, 그날 대박은 증권사 객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요즘 주식 시장은 정말 개판이다. 만방기원 계단을 오르며 김대박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투자한 종목이 이날도 왕창 빠져 오전 내내 속이 다 거북했다. 울적한 기분을 다스리는데는 바둑 만한게 없지. 만만한 하수들의 팔을 이리 비틀고 저리 꺾다보면 온갖 시름을 다 잊게된다. 스트레스 해소시켜주고 용돈까지 바치니 얼마나 귀여운 하수들인가. 대박의 찌프렸던 얼굴이 기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펴지기 시작했다.

덕수와 희룡이 대국 중이었다. 저 두 녀석이 둘도없는 라이벌이란 사실은 상식중의 상식이다. 한데 오늘은 뭔가 좀 분위기가 달랐다. 쇠돌 군이 옆에 앉아 초시계도 눌러주고, 기보 용지에 기록까지 하고있는 게 아닌가. 원, 촌놈들 같으니. 하수 주제에 꼴 값들 떨고있군. 대박은 바둑 판 앞으로 다가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뭐 국수전 도전기들 하나? 킬킬. 그 실력에 무슨 초시계고 기보 용지야. 집어치우고 나랑 만원빵이나 하자구.”

희룡과 덕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바둑 판에만 눈길을 고정시킨채,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뢰한을 아예 무시하는 듯한 자세였다. 싱거워진 대박은 뒤에서 관전 중이던 제갈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뭣들 한 대요? 집문서라도 묻고 두는 분위기네… 최소한 한 돈 백 정도 씩은 건 모양이지?” 제갈길은 입을 닫은 채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엉? 그렇다면 제법 큰 판이다. 이런 좋은 손님들이 나한테만 걸려주면…. 대박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바둑의 진행을 지켜 보았다.

쌍방 초읽기까지 몰리는 난전 끝에 바둑은 흑을 쥔 성희룡의 승리로 끝났다. 순간 김대박이 뛰어들며 묻는다.
“성형, 이 판 얼마짜리였어?”
“아, 그냥 명예만 걸고 둔 겁니다. 우린 이제 내기 안두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바둑에 매가리가 없었군. 기초가 안된 풋바둑에 투지마저 없으니 내용이 참 한심하더라구. 킬킬.”
“그렇게 엉망이었어요?” 성희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내가 보기엔 어느 한 군데도 제대로 처리된 곳이 없어. 복기를 한 번 해볼까?”

오늘 따라 김대박은 꽤 친절하다. 복기할 시간이 있으면 바둑 한 판을 더 두는 게 생산적이란 게 그의 철학이지만, 하수들이 배울 자세를 보이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는 포석에서 시작해 중반 초입, 중반전 전투에 이어 하변서의 몸싸움에 이르기까지 쌍방 모두 실수 투성이였음을 강조했다. 그의 지적대로라면 이 바둑은 쌍방 더 할 수없는 졸작이다. 김대박이 연신 비웃음을 날리자 변덕수가 입을 열었다. 내용이 나빠 몹시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김선생이 지적하신 수 가운데 엉망인 것만 꼽아도 최소 열 곳은 넘는 것 같군요. 하지만 그 중에 김선생이 잘 못 판단한 곳은 혹시 없을까요?”
“엉? 무슨 소리요? 내 실력을 못 믿는다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선생도 완벽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좋소. 그럼 우리 내기를 하자구. 이건 아주 좋은 내기 꺼리야. 내 지적 가운데 하나라도 틀린 수읽기가 있으면 내가 백만원을 내겠어. 대신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이 각자 20만원씩 준비하시오. 오케이?”
잠시 침묵하던 성희룡과 변덕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번의 내기가 성립된 것이다.

그 때 사람들 틈에 섞여있던 제갈길이 말했다. 마침 프로 기사 한 분이 이 근처에 와 있다고. 그에게 판정을 맡기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김대박, 성희룡, 변덕수 3자가 동의했다. 몇 사람이 나가서 프로 기사를 모셔왔다. 문용진 5단이었다. 박사 학위까지 지녔다는 그였지만 표정엔 한 치의 오만함도 없었고 온화한 미소만 가득했다. 순간 대박이 조금은 비굴한 표정으로 문 프로를 향해 말했다. “사범님. 우리 아마추어들 바둑인데, 복기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보를 보며 돌을 놓아가던 문 프로의 표정이, 10여수가 지나면서 잠시 동요했던 걸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해설을 계속했다. 한데 그의 복기는 두어진 수에 대한 의미를 풀이하는 것으로 시종했다. 이렇게 두어야 했다거나, 저것이 큰 완착이라거나 하는 장면이 도대체 없었다.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던 대박은, [장면 2도]에 이르러선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선악을 물었다.


“아, 백 2요? 멀리 내다본 절대의 한 수입니다.”
“A로 틀을 잡는 것이 모양 아닙니까?”
“이 장면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1도]를 보세요. 백 1이면 흑은 2 이하로 하변에서 움직이는데, 11로 잡으러 가야겠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2도] 처럼 진행되면 B가 선수로 들어 이 흑은 삽니다. 흑이 살면 우하 일대의 백이 오히려 전멸해 버리지요.” 요컨대 [2도] 백 △가 C에 있으면 흑이 살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김대박은 문 프로가 오기 전 [장면 2도] 흑 1때 백 2의 부딪침에 대해 “빈삼각의 우형인 동시에 스스로 빠개지는 모양을 자초한, 10급도 그렇게는 안 둘 수”라고 혹평했었다.

자상한 해설을 마친 문 프로가 일어서면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인문 과학도, 사회 과학도 고전(古典)이 좋고 음악도 클래식이 깊이가 있습니다. 바둑도 마찬가지지요. 공부들을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 참 보기 좋습니다. 금년 말 쯤이면 모두 엄청나게 바둑이 늘어있을 겁니다.” 그는 이 바둑이 오청원 9단과 고(故) 후지사와·호사이(藤澤朋齊) 9단 사이에 1957년에 두어진 제1기 일본 최강 결정전 기보라는 설명을 끝으로 박수 소리와 함께 만방기원을 떠났다. 김대박은 핏기가 싹 가신 채, 석고상 처럼 희고 굳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김대박에 대한 최초의 승리. 그 감격에 성희룡과 변덕수는 전날 밤 기보(棋譜) 외우느라 치렀던 고생도 말끔히 잊었다.
“흐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100수가 넘어서니까 가물가물하데. 자네가 슬쩍 다음 수를 표시해주지 않았으면 수순을 놓칠 뻔 했어. 킬킬.”
희룡이 소주 잔을 쳐든 채 “오청원 선생의 만수무강을 위해!”하고 선창하자 덕수가 “후지사와 선생의 명복을 빌며!”라고 화답했다.

김대박이 신경질적으로 내던지고 간 봉투엔 정확히 수표 10장이 들어있었다. 덕수는 자신의 몫 절반 중 한 장을 기록하느라 애쓴 쇠돌이 몫으로 떼놓으며, 봄 코트 걸친 봉숙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떠 올렸다. 성희룡은 벌써 뿅 갔다. 용감무쌍하게도 술잔을 마구 들이킨 때문이었다. 오늘같이 기쁜 날엔 오나랑이 설거지 하나 쯤은 면제해 주리라고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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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백합 |  2004-04-02 오후 9:57: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더 할수 엄씨 젬잇게 잘 쓰셧내요!!^^* ㅋㅋㅋ~~ 그거....미소만~~^^*  
바둑정신 |  2004-06-04 오후 10:2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놀라움 대박행보  
thxzerg |  2005-01-07 오전 2:49: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브라보  
soul0307 |  2006-01-08 오후 9:40: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한여름 지붕같은 나무그늘 아래의 달콤한 휴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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