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수 겸 화가인 조영남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요지의 ‘미술의 이해'라는 책을 출간했다. 조영남은 탁월한 예인(藝人)이다. 박학다식하여 지식인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조영남은 미술의 이해에서 바둑을 언급했다. ‘바둑은 몇 가지 방법을 알아야 둘 수 있듯 미술 감상도 그렇다'는 것이다.

두어 달 전에 이어령이 ‘우리문화박물지'란 책을 냈다. ‘64개의 키워드로 본 한국인의 문화유적지도'라는 부제는 자못 의미 있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적 유전인자 속에는 64개의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갓, 거문고, 돗자리, 씨름, 뒤주, 한약, 화로, 붓, 탈 등 이어령의 눈에는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게 이것들이 거론된다. 붓은 정신의 흔적이고 씨름은 긴장속의 탈출구며 뒤주는 집안의 작은 신전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어령이 지목한 64개의 키워드 속에 바둑이 빠져 있다. 바둑이 중국 유입의 산물이란 작가의 염두로 이해되지만 붓, 씨름, 거문고 등도 중국 유입의 산물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고 보면 아쉽다.

조영남의 바둑의 언급은 바둑을 잘 모르고 한 말임을 바둑인은 금방 알 것이다. 이어령의 바둑의 인식도 비슷하다. 이들의 바둑에 대한 인식을 안타깝게 생각하기 전에 오늘날 바둑이 승부만을 다투는 사이 문화적 층의(層意)와 인식이 말할 수 없이 가벼워졌음을 반성하게 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오늘날의 지식인들 사이에 바둑은 별다른 관심 사항이 아닌 것이다.

18세기 기보 한 점

21세기에 와서 한국 국학이 괄목하게 성장했다. 많은 고서가 국역되고 제목조차 모르고 있던 수많은 고문서가 해제되면서 간헐적으로 바둑의 기록이 발굴되어 바둑계를 기쁘게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18세기 위항 문인들의 전적이 봇물 터지듯 소개되면서 바둑의 기록은 한권의 전(傳)을 구성할 정도가 되었다. 그 연구 과정에 ‘장서각(藏書閣)' 소장의 필사본(작자 미상) 기보 한 편이 나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제껏 국내에 가장 오래된 기보로 알려진 것은 19세기 기보 몇 편과 20세기 순장 기보 수십 건, 그리고 최남선이 엮은 ‘기보'에 현현기경의 인쇄본이 있었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19세기 위항 문인 ‘조희룡'은 ‘권렴번(拳濂番)' ‘대소철망(大小鐵網)' 등의 기보집을 언급한 바 있다. ‘사람들이 일을 안 하고 너도 나도 그런 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장서각 기보는 18, 19세기 위항 문인들이 활동하던 때의 것이다.
장서각은 정조 시대에 규장각에 있던 모든 전적과 전국에서 수집된 각종 고서를 모아 놓은 대형 고서각으로(현 서울대 관리) 수십만 종의 고문전적이 보관되어 있다.

조선 사람 이덕무는 바둑의 지나친 인기를 경계했다. ‘왕족은 말할 것 없고 사민(四民)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바둑에 몰두하여 책 읽는 사람 없고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기록하며 바둑을 공맹의 학풍에 도전하는 노자 장자류로 보고 지탄을 가했다.
반면 그의 아들 이규경은 ‘세상에 사람 사귀는 방법으로 바둑만한 것이 없다'라고 상반된 견해를 보이며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가축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바둑에 대한 엇갈린 시각은 다른 학자들의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학규는 ‘바둑 한 판에 만냥을 잃고도 눈 한번 끔뻑이고 태연한 사람을 보았다'고 했다. 세상이 온통 바둑으로 들썩이며 가는 곳마다 횐 돌 검은 돌을 다툰다고 했다. 이익은 ‘바둑으로 날밤을 지새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 바둑에 관한 에피소드는 조선실록에 상당수 소개되어 있다. 후기로 오며 실록의 기록이 희소해졌지만 상대적으로 각종 개인 문집에서는 빈발했다. 동시에 바둑을 묘사하는 초점도 긍정에서 부정으로 변한다. 그것은 공동체가 통제하기 곤란할 정도로 바둑이 유행한 탓이다.
이덕무는 흥청대는 유소년 바둑대회를 보고한 바 있다. 유본학은 ‘조선에 바둑의 고수로 군기(郡碁), 도기(道碁), 국기(國碁)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한번 보기를 소원했다'며 ‘그들이 바둑을 두면 발등에 발을 포갤 정도로 사람의 바다를 이룬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 바둑은 바야흐로 대유행을 하고 있었다. 위로는 궁궐 안에서부터 아래로는 저 바닷가의 염전에까지 남녀노소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었다. 바둑이 유희의 수준을 넘어 사회를 망치는 폐악(?)이라는 인식이 지성인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논쟁될 정도였다. 이런 풍토에서 장서각 속에 기보 몇 점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겠다.

<기보 갑>

기보는 가로×세로 10.5센티미터의 인쇄본 기보용지에 대통이나 기타 용구로 사활 문제를 찍고 여백에 공방의 순서(정답)를 필사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현현기경(玄玄棋經)'류의 사활 문제다.
기보지 위에는 매화문이 천원 자리에 선명하다. 순장(?) 바둑에 꼭 있다는 17개의 매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기보 갑>의 사활을 보자.

<참고도>는 오늘날 전해지는 현현기경의 현기통변세(玄機通變勢)이다. 다만 최초 돌의 착점과 귀의 모양이 조금 다를 뿐이다(흑▲와 백△가 추가되어 있다). 이 점을 최남선은 ‘기보'라는 바둑책을 출간하며 서문에 ‘전해지는 현현기경은 수많은 사람들이 가감·첨삭하여 전말을 알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지적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기보에 보이는 약간 어설픈 현기통변세가 후대로 오면서 오류를 잡아 지금의 형태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기보 갑> 외 <기보 을>에 나온 3개의 사활은 오늘날 중급 사활 수준으로 아마5단이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다.

장서각 소장의 기보 두 점의 중요도는 조선 후기의 바둑의 용어를 전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는 18세기 이전의 바둑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 상태였다. 장서각 소장의 기보는 고대 중국의 기보작성법과 같다. 상평거입(上平去入)은 손간건곤을 뜻하는 중국 바둑판의 의미다. 좌상 좌하 우상 우하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은 1914년 매일신보의 바둑난이 생기면서 기보에 종(세로) 一二三四로 횡(가로)을 壹貳參…伍 하는 식으로 중국식 기보를 변형 사용하기 시작한다. 기보에 보이는 한자는 행마의 순간순간을 나타내는 말로 바둑 용어로 대치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뜻이다.

갑, 을의 기보를 남긴 작자 미상의 인물은 去十二 平七一 등의 부호로 자신이 본, 또는 두었던 바둑을 기록하고 이해하려 한 것이다.(아래 그림 참조) 이 기보는 이전의 문헌에 보이는 쌍립(雙立), 계가(計戶), 패(劫), 형세(局善), 포석(布列) 등과 함께 과거의 바둑을 구성할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18세기라면 순장(?)을 두던 시대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순장 바둑은 각종 문헌에 간헐적으로 보이는 장점(長點) 점(點) 순장(巡將) 배자(排子)가 전부다.

조선실록이나 각종 문헌들 그리고 이번 장서각 소장의 기보에 순장 바둑을 유출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 18세기 문헌 중에 바둑의 실전 내용을 전하는 기록이 여러 점 있다. 그러나 동엄집(정환직) 향은집(이장찬)에 순장이란 말은 기적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 외 유력한 문헌들 속에 조선 바둑과 중국 바둑의 형식을 고민한 기록은 거의 없다.
필자는 조선에 중국식 바둑과 순장식 바둑이 혼용되고 있었다고 본다. 조선이 특별하게 순장식 바둑만을 둔 것이 아니라 중국식 바둑도 그에 못지않게 유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장서각 소장의 기보를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바둑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기보를 처음 지상에 소개한 안대희(한학자)는 ‘조선시대 바둑은 실전 기보가 기록되었고 바둑의 이해로 삼았다'고 말한 바 있다. 필자도 이 말에 적극 동감을 한다. 조선실록 속에 등장하는 수백 건의 바둑 기록이나 수많은 개인 문집을 통해 속속 들어나고 있는 조선시대의 바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대단했다는 것이다.

현현기경의 각 문제에는 ‘○○세'라는 제재(題材)가 붙어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이번에 이청 씨가 본지에 소개한 장서각 소장의 필사본 기보 두 점에도 예외 없이 고제곤형양(高帝困滎陽), 현기통변(玄機通變), 십일면매복(十一面埋伏)세… 등의 제재가 보인다. 다만 제재 중 고제곤형양세(장서각 소장 기보)와 십일면매목세의 제재는 안영이 씨가 이전에 공개한 목판본 「현현경(玄玄經)」의 패공곤형양(沛公困滎陽)세와 십면매목세로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형태이다. 하지만 고제곤형양세의 경우 고제(高帝)와 패공(沛公)은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지칭한 것이고 보면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 출신인 유방은 패공(沛公)으로 불렸었다. 최남선의 「기보(譜)」도 확인해 본 결과 위의 세 제재 중 현기통변세와 십면매목세 두 개를 찾을 수 있었다. 최남선의 「기보」는 「현현경」과 다르게 정답을 기보에 직접 기록하고 있다. <사진1> <사진2> <사진3> <사진1> 「기보」에 고제곤형양세는 발견할 수 없었으나 고조와 관련된 제재로 고조해형양(高祖解滎陽)세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역시도 현재의 현현기경에는 패공해형양세로 나온다. 원전과는 주변과 안쪽 돌이 약간 차이가 있다. <사진2, 3>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앞서 소개한 <기보 갑을>의 문제를 풀어보자. <기보 갑> 을 보면 온전한 형태 2문제와 어찌된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다 만 것으로 보이는 1문제 등 총 3문제가 소개되어 있다. <장면1>   장면1은 <기보 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좌변 △, ▲는 「현현기경」을 참조해 복원한 것). 좌변에 고제곤형양(高帝困滎陽)세, 우변에 현기통변(玄機通變)세, 하변에 십일면매복(十一面埋伏)세 등 총 3문제가 소개되어 있다. 이 중 후대로 오면서 변모된 것으로 보이는 현기통변세에 대해 검증을 해 보았다. 현기통변세는 대형 수싸움 문제이다(장서각 소장의 기보 위와 아래 부분에는 자세하게 정답을 필사해 놓았다). 1도는 첫 번째로 소개된 정답이고, 2도는 두 번째로 소개된 정답이다. 과연 정답이 맞을까? 모두 정답이 아니다. 1, 2도는 두 집을 못나게 하는 수순임에는 틀림없지만 수싸움에 돌입했을 때 문제가 생긴다(3, 4도 확인). 1도는 계속해서 3도 백1로 두었을 때 당장 문제가 되며, 2도는 4도 백1 이하 패가 난다. 이런 오류가 발견되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재가공된 것으로 보인다.           <1도>               <2도>               <3도>           <4도>   <장면2>   장면2는 <기보 을>을 옮겨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중급 사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출기(出奇)세의 필사된 정답이 틀렸다. 5도는 <기보 을>에서 제시한 정답의 수순. 그러나 흑19와 21은 필사하는 과정에서 수순이 뒤바뀐 것으로 보인다.       <5도>       오류를 바로잡은 정답은 6도. 백3 때 흑4가 정수로 이하 10까지 패가 된다. 목판본 「현현경」에는 정답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흑을 둘러싼 주변 백도 약간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옆 사진 참조) <6도>

* 이 기사는 [월간바둑] 10월호에 기고 형식으로 실린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