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속에 등장하는 조선의 고수들 중 숙종조의 장문익과 더불어 최고의 고수 중의 한명이 바로 한대수가 아닌가 한다. 아래의 기록은 승정원일기로 영조 7년 4월 1일의 기록이다. 조선실록 속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다.

이 기록은 청국에 동지사절단으로 다녀온 정사 서평군 효와 부사 윤혜교, 승지 이광보 등이 영조를 친견하고 사절단으로 다녀온 사연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영조와 여러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다. 승정원일기는 실록의 3배 분량의 방대한 양이나 아직 번역 작업이 10%도 되지 않았고 이 대목도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 대목 중의 하나다.

橈又曰, 與留保輩, 頻頻往來, 甚爲非便, 故托以爲見朝鮮碁爲言, 連爲往來, 而韓壽大, 碁局善手, 故每與是瑜相往矣。 上曰, 善碁韓壽大何許人耶? 橈曰, 臣之帶去軍官矣。 橈又謂是瑜曰, 留大人, 皇上信任之臣也。 後當大用, 汝若誠心相交, 則必有益於國事矣.

-승정원일기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기록을 너무도 등한시해 왔다. 작금의 바둑 세계의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시대의 국수들을 호산외기니 회조일기니 하는 여항의 야사를 채집한 야담 기사에 의지하여 겨우 바둑사를 꾸며 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기 김종귀니 김한흥이니 이학술이니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야사들 속에서 나온 인물들로 한결같이 등장 인물들의 에피소드도 만화적인 것이어서 아쉽기가 그지 없다. 이런 류의 기사는 후대에 바둑을 희극화하는 측면까지 있어 결코 바람직스러운 것만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둑계가 그동안 전문 역사학자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연유를 알면 이런 야사들속에서나마 조선 국수들의 모습을 찾아낸 것만도 순전히 바둑계의 몇 분 원로들의 공이었다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역사 서적을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면 한대수 같은 출중한 오리지널을 만나게 된다.

사신단은 먼저 영조에게 자신들이 사신 행렬 기간의 건강을 묻고 그 기간에 영조의 딸인 공주가 사망 한 것에 대한 위로를 하고 청국의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을 한다. 그 말 속에 요동 지역에 와 있는 청의 고관 중에 유대인이 있는데 그가 바둑을 좋아하여 조선의 고수 한대수를 자꾸 부른다니 아예 그를 그에게 보내어 지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건의다.

왕이 한대수가 그토록 고수냐 묻자 부사 윤이 말하기를 옛날 자신이 함께 근무해 본적이 있어 실력을 잘 안다며 유대인이 청의 황제의 신복이니 만큼 한대수를 이용하여 그와 잘 교제를 하게 하면 후에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쓸 일이 있을 거라며 말한다.

이 기록 중에 기국선수라는 말이 나온다. 기국은 바둑판을 말함이요 선수는 고수를 말하는 것이니 당대 조선 제일의 고수를 일컫는 말이다.
한대수, 그야말로 조선 영조 시절의 절정 고수라 할 수 있겠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실록보다 더 많은 바둑 기록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필자가 조선실록을 일독하는 데만도 거의 3년이 걸렸으니 승정원일기는 언제 다 읽어 볼 것인지는 요원하다. 이 두 기록 속에서 바둑의 기록을 찾아내는 것은 한국 바둑계의 시급한 과제로 보인다. 이런 것을 누가 찾아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바둑 마니아의 힘을 온전히 빌릴 일도 아니다. 개인의 열정은 한계가 있고 체계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로미디어에서 나의 이런 뜻을 이해하고 출판을 허락해 실록 속의 전체적인 바둑사를 소개하게 되었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로 서인에서 한발 더 진화한 당파 노론의 비호 아래 얼떨결에 왕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형 경종이 불시에 급서를 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워 노론과 서인으로 분파한 당쟁을 조정하며 중립적 왕권을 유지한다.

영조는 부왕 숙종의 즉흥적이고 거친 성격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논리정연한 인물이었다. 영조는 재위초부터 성군의 길을 가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영조는 선대왕들과는 다르게 바둑이나 활쏘기 등의 잡기에 애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대수가 고수고 나라를 위해 훗날 크게 쓰일 때가 있다는 말에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는 융통성을 보인다. 한대수는 훗날 현감과 찰방 들을 역임한다. 바둑으로 군수를 지낸 셈이다.


영조는 재위초 그야말로 불철주야 정사에 매달린다. 업무 강도가 세종을 능가할 정도다. 실록을 따라 영조의 하루를 취재해 보자.

군왕이 만기를 친정한다는 것은 깃발이 아니라 만가지 기교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조선의 군왕에게 주어진 업무 분담은 상상을 초월한다. 왕은 해뜨기 전에 일어나 대비와 왕대비에게(조선은 왕들이 어린 비를 들인 탓에 궁안에 어른이 많았다) 문안을 드린다.

새벽 5시 정도에 왕의 공식적 업무가 시작되는 것이다. 왕은 발길을 새벽 조강장으로 향한다. 조강장에는 이학자 두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왕을 맞이한다. 간단한 이학의 한 구절이 구술되고 왕은 듣는듯 마는듯 조찬(아침식사)을 하고 조회를 연다.

오늘은 마침 월 4회 있는 대조회 날이다. 대조회에는 6조의 당상들과 사관들이 모여 군왕과 대신들의 친교의 기강을 다진다. 조회가 끝나고 왕은 자리를 옮겨 신하들의 윤대를 시작한다. 윤대는 각조의 대신들과 실무자들이 들어와 하는 업무 보고다. 그리고 점심을 먹는다.

그 다음 다시 경언장으로 간다. 경언장에는 성리학자들이 나와 서경의 한 장이 강독된다. 서경에 자신감과 재미도 있던 왕인지라 토의가 활발하게 논의된다. 서경의 요체가 역사냐 아니냐는 문제에 군왕은 신명을 낸다.

순식간에 오후 업무시간이 다가온다. 오전 조계와는 달리 오후 석계는 지방으로 나가는 관원들의 인사나 지방에서 올라온 중요 사안들이 처리된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늦은 오후다. 이 시간이 되면 무장들이 줄줄히 들어온다.

내금위, 겸사복, 내시부의 경호 책임자들이 들어와 오늘 밤의 궁궐의 숙위 군사수와 암호 등을 교부받고 나간다. 조선의 궁궐의 경호 시스템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다. 조선 왕조 5백년 동안 범궐이 허락된 쿠데타가 단 두번 있었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궁은 궁안의 겸사복과 궁밖의 내금위가 양분하여 지킨다. 겸사복과 내금위는 궁을 양분하여 철저하게 위수 지역으로 한다. 궁궐 중의 궁안인 지밀은 왕의 사병인 내시들과 갑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경호망을 펼치고 있다.

쿠데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내금위, 겸사복, 내시부, 갑사의 책임자들이 의기투합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각부의 책임자들의 직위가 이미 종2품관으로 충분히 높기에 다른 마음을 먹을 여지가 적다.

이쯤되면 왕도 출출하다. 그러나 석강이 또 기다리고 있다. 석강장에는 나라안의 내로라는 늙은 신하들이 왕을 기다리고 군기(?)를 잡으려 벼르고 있다. 늙은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仁)이 무엇이냐는 초보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초보적인 질문이 조선 선비들은 죽이는 질문인 것을 다 안다.

유학은 작은 길이 큰 길로 통한다는 궁리를 담고 있기에 왕은 노신들의 성리학적 수준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왕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며 대비 왕대비에게 다시 문후를 드리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나면 3일에 한번씩 있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

조선의 왕은 1년에 50번 정도 제사를 지냈다. 철마다 종묘에 제사를 모시고 직계 4대조를 모시며 산천에 모시는 국사제례와 공자, 맹자, 단군, 기자, 고려 국왕들의 제사도 모셔야 한다. 이 어느것 하나를 소홀히 했다가는 추상 같은 간관들의 시비를 감수해야 한다.

조선 군왕은 10일에 한번씩 휴식이 있다. 그러나 이 휴식날이면 평소 챙기지 못한 가족들을 보듬어야 한다. 첩과 후궁 외 자식들만 수십 명이 보통인 왕인지라 이 일도 보통일이 아니다. 거기다 종친들도 왕의 휴식일을 목빠지라 기다린다.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 연산 같은 돌아 버린 왕이 나온 것도 이해가 간다.

영조는 이 타이트한 업무 속에서 조선 군왕의 유일한 도락인 바둑과 활쏘기를 의도적으로 멀리한다. 그 이유는 영조 자신이 무수리 최씨의 소생이라는 출생에 대한 핸디캡이 작용한다. 도락을 버리고 더 열심히 군왕의 길에 매진하겠다는 결심인 것이다.

영조의 초창기는 노론의 적극적인 개입에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은 이루고 있었으나 엉뚱하게도 민심이 요동을 쳤다. 영조 시대에 갑자기 여항에 기인이사들이 출현하여 백성들이 그들의 혹세무민에 휩쓸려 바람 잘날이 없었다.

혹세무민은 용화세계를 꿈꾸는 미륵파와 정도령 운운하는 감결파로 나뉘어 8도로 퍼져나갔다. 이런 사건은 숙종 때에 한번 큰 사건이 일어났었다. 여환의 난이었다.

여환은 일종의 휴거주의자다. 7월 17일 한양이 물에 잠겨 세상의 종말이 오니 백성들이 모두 모여 그날을 준비해야 된다는 말로 수백 명의 백성을 모아 실제로 도성 안에 들어갔다. 휴거를 기다리던 이들은 체포되어 20여 명이 참수된다. 사건이 희한하기도 했지만 조정은 어쩔 수 없이 주모자급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 고초(?)를 겪는다.

이 도참은 남원, 공주, 가평 해주 등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영조는 밑도 끝도 없는 도참에 현혹되어 억울하게 죽는 백성들을 보고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포청에서 잡아 조사를 해보면 엉뚱하고 아무런 준비도 힘도 없는 백성들이 수없이 다치는 일이 계속 된 탓이었다.

계룡산에는 수백 명이 모여 진인 정씨가 나타났다며 공주까지 행군을 하고 와, 기마병에 짓밟히는 사건까지 나자 영조는 도대체 남사고가 누구냐며 도참의 근원지를 묻는다. 정감록이나 남사고 비결이 모두 감여가(堪輿家) 남사고를 팔고 있었다.

남사고는 선조 때 관상감의 잡급직 관원을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가 죽은 백년이 넘어 영조가 그의 이름을 묻고 있다. 남사고는 앉아 천리 서서 만리를 보던 신안(神眼)이었다. 그는 불운했다. 그는 곤궁했고 병약했다.

한겨울에 추위를 달랠 솜옷 한 벌이 없었고 친구 부모상에 문병할 여비가 없어 외로웠다. 그러나 남사고는 그런 신고를 떨쳐내고 굽이굽이 흐르는 8도의 용맥을 따라 물처럼 바람처럼 떠돌며 밤이면 천문을 보고 시장에서는 손금을 보아 주며 자유를 찾았다.

남사고는 이 여정에서 땅속에 숨은 땅을 찾아냈다. 10승지는 이렇게 태어났고 그의 말은 비결이나 정감록이니 하며 전설이 되어 영조 임금의 귀에까지 들린다. 영조시대 사람 이중환은 이 남사고를 존경했다. 그러나 이중환은 남사고의 도참을 존경한 게 아니다. 남사고는 알려진 대로 뜬금 없는 도참가는 아니다.

남사고는 신안을 얻어 전국 유랑에 나섰다. 처음에는 부모의 유골을 아홉 번이나 이장할 정도로 좋은 땅에 집착을 했다.조금 좋은 명당이 발견되면 그곳에 부모의 유골을 이장하는 식이었다. 그 시간과 과정 속에서 남사고는 원숙해지고 능란해진다. 그리고 어느날 꿈에 그리던 비룡승천(飛龍昇天)의 땅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부모의 유골을 이장한다.그때 한 도인이 나타나 노래를 한다.

 
  구천이장 남사고야
  비룡승천 자랑마라
  고사괘사(枯死掛巳) 아니냐.

남사고는 이 노래에 확연대오를 한다. 용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형국이나 마른 나무에 걸려 있는 뱀의 형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풍수를 통해 개인의 발복이나 복락을 바라는 것이 헛된 미망임을 깨달은 남사고는 활인(活人)의 풍수를 펼쳐 든다.

남사고는 풍수나 도참이 패찰이나 예언 등으로 위장을 하며 세상의 민폐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남사고는 비결로 희망 없는 세상에 희망의 메세지를 담으려 했고 그 점을 이해한 이중환은 택리지를 통하여 조선후기 사회에 다가올 상업과 물상의 교류라는 시대적 조류를 준비하는 토지관을 펼친다.

이중환은 나라의 발전은 상업과 물상의 고른 침투에 있다고 했다. 경제의 원만한 흐름은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10승지니 도원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에게는 이미 중요한 말이 아니다. 실사구시가 중요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무릉도원을 그리는 이상적 세계를 꿈꾸던 조선 민중들은 많았고 그들은 감결파를 이루어 충청도 계룡산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헛되게 죽음을 당한다. 영조는 이런 헛된 백성들의 죽음을 보고 당황하여 정감록등의 감결서를 소각하고 소장 금지령을 내린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적극적 주모자 외에는 방면하는 정책을 고수한다.

영조는 남사고를 묻는다. 실록에 등장하는 남사고의 처음이자 마지막 모습이다. 오늘날 남사고를 염두에 두면 그동안 바둑 고수 한대수는 얼마나 등한시 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영조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아래서 청계천 준설 사업과 신해통상을 반포하여 백성들의 상업적 토대를 닦아주는 등 농업과 상업의 가닥을 잡는다. 영조 시대는 사상과 상업이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한다. 송파장 칠패장 서강장 등의 큰 시장이 생기고 시장에 사당패나 들병이패 깍정이패 등이 꼬여 들며 근대 국가의 길목으로 접어든다.

이중환이 당파에 밀려 전국을 주유하며 택리지를 쓰고 홍대용이 북경에 가 세로운 사조와 교류를 트는 등 조선은 백가쟁명의 기운이 스며든다. 이덕무가 한양의 난장에서 큰 바둑대회를 본 것도 바로 이 때이다.

바둑만이 아니었다. 가야금의 명인 김성기가 활동했고 화사 김홍도가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이다. 이덕무는 이 때의 바둑 두는 소리를 쩡쩡(丁丁)이라 했다.

 手談高堂上(수담고당산)
 丁丁自而烏(정정이조오)
 金昔落何所似(금석낙하소사)
 沙默雁與鶯.(사묵응여앵)

 집에서 한가롭게 바둑을 두니
 쩡쩡 흑백돌 울리는 소리
 뒤섞여 흩어지는 것이 무엇과 닮았나
 모래톱에 점 찍힌 기러기와 오리.

이덕무의 바둑시에 나오는 바둑 두는 소리의 표현이 그럴 듯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바둑판이라면 아마도 오동 나무판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군왕 앞에서 상품을 걸고 바둑을 두는 것은 몇번 보았지만 이덕무의 난장에서 벌어지던 바둑대회의 모습과 바둑 두는 모습을 형상화한 시는 처음이라 반갑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성리학은 논리와 합리를 존중하고 부조리한 제도와 현실의 한계 안에서나마 인간의 존엄과 인간 존중의 사상을 끊임없이 설파하고 권장했다. 바둑은 조선 전기를 거쳐 후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중요 도락으로 온 백성의 사랑을 받으며 유지된다.

물론 성리학이 절정을 구가하던 인조 이후부터 바둑이 조선의 중심(왕실과 사대부 선비)부로부터 조금씩 괴리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 학문의 권장을 요청하는 산림의 요구와 실학파들의 융성 등이 놀고먹는(?) 풍토의 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바둑으로 미치기 시작 한 것이다.

그러나 순조 19년(1819년) 이우신이 올린 책문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우신은 세도정치로 흐르는 조정의 작태를 바둑의 기리를 비교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시는 안동 김문의 천하였고 바로 직전에 홍경래의 난과 전국적인 민란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而圖理, 猶懼其緩, 而乃今不然, 索於嵁巖木石之間, 擇其孱病庸陋之最, 加之以薰沐, 被之以華采, 以重駭四方之觀聽, 此曷故哉? 譬如置棋, 一手誤下, 全局皆敗, 譬如濟川, 一柁虛擲, 千人胥溺。 竊觀今日朝廷, 泄泄沓沓, 無一攸爲, 可謂手手而誤矣, 柁柁而虛矣.

-순조실록

그저 두려워할 일인데 지금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고 두메 산골에서 찾으며 가장 병약하고 용렬한 사람을 선택하여, 훈목(薰沐)을 가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주위 사람들을 거듭 놀라게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둑 두는 것에 비유할 때에 한 수를 잘못 두면 한판이 모두 패하게 될 것이며, 강을 건너는 것에 비유한다면 한 키[柁]를 잘못 조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오늘의 조정을 살펴보면, 답답하여 하나도 되는 일이 없으니 수마다 잘못되고 키마다 헛되다고 하겠습니다. 

이우신은 작금의 조정의 행태를 바다에서 키를 잡고 있는 사공과 바둑을 두고 있는 선기(善碁)에 비유하여 지적하고 있다. 바둑에서 한 수를 삐끗하면 전판을 망치게 되고 사공이 키를 놓치면 배가 바다 위에서 전복되는 것은 이치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한데도 작금의 조정에서 하는 일은 두는 수마다 엉터리고 젓는 노마다 엉망이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이유신은 이 상소를 올리고 얼마 후 귀양을 간다. 그의 쓴소리를 직접 책한 것은 아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철종 때까지 계속된다. 이우신 같은 올곧은 신하의 목숨을 건 이런 상소도 기울어 가는 조선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소의 행간에서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본다.

그것은 중기에 와 바둑에 대한 억제의 지침이 정권적 차원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바둑은 당대의 사조를 담아내는 비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소는 형식상 임금을 향한 건의지만 기실은 당 정권에 대한 건의인 것이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최대 장점은 관료들 모두가 글을 잘 알고 잘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소는 바로 그들 관료들이 자기 능력을 주장하는 자리였기에 그 글의 정치함과 논리정연은 어느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바둑의 흥기를 조희룡의 기록을 통해 본 바 있다. 조희령은 자신이 본 바둑 기보만도 백 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대소철망 권렴번 금정란 등 바둑책의 이름도 적고 있다. 조희룡도 이때 사람이다. 조희룡은 고동을 기록하며 홍국영을 도와 협객으로 자처하던 한 인물을 기록한다. 고동은 정후겸 사람이고 협객은 홍국영 사람이다.

정후겸도 서해에 잠룡이 배 들어 올 때를 기다린 다는 도참을 퍼트리며 난리를 꾀하다 실재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범궐을 감행하기도 한 인물이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인 화환옹주의 양자다. 영조에게는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옹주의 뒷배가 있기는 했으나 28세에 병조참판을 지낸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이런 정후겸이 바둑 고수 고동을 가까이 하며 정감록의 실현을 꿈꾼 것은 참으로 정감록적이다. 해안가의 비천한 신분에서 한 실력자의 양자로 들어가 정감록의 실현을 꿈꾸고 실천을 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고동은 바둑의 수로 그를 도왔던 것이 아니라 아예 나라의 판세를 뒤엎는 수로 정후겸을 훈수한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하게 하는 인물이다.

영조의 뒤를 이어 군왕이 된 정조는 정후겸을 죽이고 화환옹주를 사가로 내치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한다. 정후겸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조리 호서의 염전에 흩어져 징역을 산 것은 물론이다. 고동의 뒷 소식은 이후로 더이상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