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정(1681-1755)은 자신의 문집 자오록초(自悟錄抄)에 지금 세상에 각종 기예로 이름을 떨치는 자가 몇 명 있다고 했다(今之世亦多以技鳴者). 노래로 바둑으로 혹은 거문고로(或以歌 或以碁 或以琴 往往有檀名者) 특별한 사람들이라 했다.
임상정은 바둑 잘 두는 것은 타고 난다고 한다. 근본이 있다는 것이다(夫所謂本者). 근본이 천성이란다(得於天者是也). 바둑의 천성은 거문고의 그것과 같아 독보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타고난 천성에 그것을 깨우쳐 주는 스승의 조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한미한 말단 관원에 불과하던 임상정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거문고의 명인 김성기와 그의 제자 남원군을 기록하며 논의된 이 글은 오늘날 프로바둑의 세계에서 과제가 되고 있는 기재(碁材)를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다.
임상정은 바둑이나 거문고의 독보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必有一段奇氣與生俱生). 임상정은 도학이 문학의 전부일 줄 알았던 어쩔 수 없는 조선 후기의 지성이다. 조선 후기의 지성들은 바둑을 매우 가까이 하면서도 공박을 가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임상정은 가장 친한 친구 조귀명(趙龜命)을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 하여 강력하게 비판할 정도의 우직한 시대의 맹목적 인사기도 했다. 그런 원칙주의자가 바둑과 거문고의 속성을 엿보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임상정은 성리학적 질서와 사유체계에 순응하던 사람이다. 이것은 정조의 정치적 캐치플레이즈기도 했다. 문장은 진, 한 나라와 같아야 하고 시는 당나라 그것과 같아야 한다(文必秦漢詩盛唐)는 사상은 당시대의 완고한 이데올로기였다.
이 사상에서 배치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었다. 바둑사에 가장 중요한 기록을 남긴 이옥(李鈺 1760-1812)이 문체 검열에 걸려 굴욕적 삶을 산 대표적 케이스다.
- 경내에 베오게, 소의문, 운종가에 큰 시장이 서는데 좌우 양편으로 전(가게)이 별처럼 벌려 있다. 온갖 장사치가 저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와 파는데 사방의 물화가 구름처럼 넘쳐난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판다.
볓처럼 바둑알처럼 늘어선(星羅而碁布) 가게에서는 사람들에게 손과 손가락을 팔고 어깨와 등도 판다. 뒷간 치는 일을 팔고 칼을 갈아 소를 잡아 팔고 얼굴을 꾸며 몸을 팔기도 한다(有華嫁者). 세상에 못 파는 것이란 없다. (이옥전)
이옥이 기록한 시장 풍경이다. 이옥의 필치는 박지원의 그것을 능가한다. 한 페이지를 더 살펴보자.
- 서대문 시장은 가짜들의 천국이다. 백동을 은이라 하고 염소뿔을 대모라 하며 개가죽을 초피라 속여 판다. 부자지간에 손님과 주인을 가장하고 물건을 사고 파는 척 사람을 꼬여 열 배의 바가지를 씌우기 여반사다. 소매치기는 순식간에 전대를 찢고 엽전을 빼앗아 간다. 미로 같은 골목을 도망가다가 뒤를 쫓으면 어느 골목에서 광주리 장사가 나타나 추격을 방해한다. (이옥전)
영화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라 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사경적(寫景的)이다. 이옥은 현미경 같은 필체로 당시대의 모습을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정조의 문체반정은 못마땅했다. 정조는 이옥의 글이 불경하고 괴기하다며 과거 응시를 금하고 군형무소로(充軍)로 보내 버린다. 정조의 이 엉뚱한 시비에 박지원이나 남공철 같은 대 문인들도 한번씩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이옥은 반성문과 함께 문체를 고칠 기회를 주는 정조의 과제를 거부하고 충군 생활을 마치고 재야의 삶을 선택한다. 이옥은 자칭 도덕 군자연 하는 정조에게 무언의 항의와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 여기(현재)에 사는 내가 왜 거기(과거)에 연연해야 하나.
이옥은 정조의 문체반정을 벗어나 자유한 글쓰기와 평민과 진배 없는 생활을 시작한다. 오지랖 넓은 정조는 가끔 이옥의 근황을 파악하고 반성을 모른다며 두번이나 더 충군을 보낸다. 이옥은 그런 사람이었다. 충군에서 돌아온 이옥은 한양 근교에 살면서 세상의 온갖 군상들을 구경하고 그들의 삶을 글로 기록한다. 한양에는 별스런 사람들이 다 있었던 모양이다.
시체를 들고 다니며 부잣집에서 구걸을 하는 패들이 있는가 하면 과거시험을 전문적으로 대신 보아 주는 대단한 재야의 문사(文士)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여자 건달패의 두령은 자신을 잡으려는 포도청 군관에게 땅(뇌물)을 줄까 떡(몸)을 줄까 하며 희극적 멘트를 날리기도 한다.
이옥은 백화쟁명의 군상들 속에서 어느날 바둑 고수 정운창을 보게 된다. 김종귀-정운창- 김석신으로 이어지는 조선 국수(國手)의 계보를 잇는 그 사람이다.
- 운창은 정박이 있다는 남산의 바둑대회를 찾아간다(運昌知撲以碁會往觀之南山). 정박은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는 운창을 보고 댁은 뉜고 하며 통성명을 하고, 운창은 기다렸다는 듯 시골사는 바둑을 조금 아는 사람으로 정국수와 한판 겨루고 싶다 말한다. 정박은 운창의 진정성을 느끼고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한명을 지목 하여 바둑을 두게 한다. 한명 두명의 제자들이 나가 떨어지자 정박은 운창을 상대로 세 판의 바둑을 두게 되고 모두 진다.
정박은 운창을 일러 그대가 조선의 국기(國碁)라며 찬탄을 한다. 이때부터 한양의 국기는 정운창이 된다(於是一日遍京師) (이옥전)
정운창은 보성 사람으로 한양에 올라와 당 시대의 고수였던 정박과 김종귀를 꺾은 인물이다. 이옥은 정운창에 매료되어 아예 정운창전(傳)을 자신의 문집 속에 남긴다. 이옥의 정운창전 속에는 정박 김종귀 정운창이라는 조선 후기의 국수급 바둑인들과 그들을 둘러싼 당시 기단(碁檀)의 현실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전한다.
어느날 모 정승이 정운창과 김종귀를 불러 바둑을 두게 했다. 정운창이 실력을 다하지 않는 듯하자 정승은 상품으로 남원산상화지 200번을 건다(南原産霜華紙二百番往之). 상화지는 남원 순천 지방의 특산물로 이름난 종이다. 두꺼운 기름을 먹인 종이로 고급 우산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 것으로 번(番)은 장서각 필사본 '탁지준절'에 보면 상화지의 수량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온다. 정승이 건 상품 상화지 200번은 소를 몇 마리 살수 있는 가치였다.
유본학은 고수 김석신이 바둑만 두며 살았는 데도 늘 그의 곁에는 군식구들이 여럿 따라다니며 흥청대고 먹고 산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고수들의 생활이 그리 가난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유본학은 바둑이 잡다한 것들 중 하나이지만 바둑은 참으로 모를 무엇이라 한다.
이옥과 더불어 조선 바둑의 모습을 가장 잘 전한 '이서구' 도 바둑은 사소한 것이지만 신묘한 무엇이라 했고 국수 덕원군을 전해준 '김도수'는 바둑의 신묘한 경지는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妙而至於通神誰小蓋亦難也)하며 그들의 바둑관에 동조를 한다.
조선의 지성들은 바둑을 잡다한 기예 중의 하나로 치부하면서도 바둑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란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바둑이 담아내고 있는 무궁한 수의 세계였다. 그 수의 세계의 끝을 알아내지 못하는 한계가 조선 지성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머리로써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믿은 자존심 강한 조선의 지성들에게 바둑의 수의 세계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독설로 바둑을 물리치다가도, 도(道)로 끌어 안고는 하던 조선의 지성들이 이율배반성이다. 이 속에서 성리학으로 절대무장을 했던 임상정도 이탈자 이옥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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