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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傳 9회/ 인식육(人食肉)의 전쟁 - 네 명의 장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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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傳 9회/ 인식육(人食肉)의 전쟁 - 네 명의 장군들
2007-08-30     프린트스크랩

 

- 계사년(선조26년 1593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진중에서 순천부사와 충청수사의 바둑 두는 것을 보았다. 종일 시름시름 앓았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장군은 한마디로 열성 애기가였다. 7년 간의 일기 중 바둑에 대한 피력이 수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장군의 기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장군은 외도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전쟁과 남는 시간이 있으면 홀로 점을 치는 것과 일기를 적으며 온양에 계시는 노모를 걱정하는 일 외엔 도무지 잡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만 장군에게 소일이 있다면 오직 바둑이 전부였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자신의 일기장에 그토록 많은 바둑에 대한 기록을 남겼을까.


- 계사년 5월25일 맑음. 당군의 장교들이 진중에 와 묵고 있다. 당군의 사정이 궁금하다는 것이 그날 대화의 화두다. 우수사와 병무를 논의하다 광양 현감이 와 바둑을 두다 갔다.


당군은 명나라 해군을 말한다. 일본과 일전을 앞에 두고 명나라에서 장교들을 보내는 긴박한 순간에도 장군의 막사에서는 바둑이 공공연히 두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쯤되면 장군의 바둑사랑이 짐작된다.


어쨌든 장군은 이 기록을 남긴 4년 후 해전에서 명을 다한다.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수백 척의 적함과 교전하다 5천년 역사에 유례가 없던 대용(大龍)의 명을 접은 것이다. 백의종군  길에서 직첩을 다시 받은 지 1년 만이었다. 

바둑은 장군이 고립무원의 정신세계를 위로하고 지켜주었던 유일한 친구였다. 여기에 새삼 장군의 찬사는 사족이다. 장군과 바둑을 둔 사람들은 이억기 또 다른 이순신, 그리고 박 조방장 그리고 원균의 진중에서 둔 무명인 이렇게 4명이다.


그런데 장군이 바둑을 둔 날은 모두 비가 오는 날이다. 그리고 원균의 진중에서는 기분이 무척 상해서 온다. 장군은 울적하고 심난한 날이면 바둑판을 꺼냈던 것이다.


바야흐로 전쟁의 끝은 아스라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전쟁의 수습책이 바둑판에서 찾아진다.

유성룡이 명장 심유경의 복심을 토로한 서찰을 도당에 올리자 여러 대신들 마음에 한숨이 꺼진다.


“대개 듣건대 치세(治世)에 오제(五帝)가 제위(帝位)를 선양(禪讓)하였다 하는데, 어찌 중국이라 해서 임금이 있고 이적(夷狄)이라 해서 임금이 없겠습니까. 천하가 넓고 크니 한 임금이 홀로 다스릴 수 없고, 우주가 역시 넓고 크니 여러 나라가 나누어 지키는 것입니다.

요·순(堯舜)이 덕이 있으므로 사해(四海)가 복종하였고 탕·무(湯武)가 인(仁)을 베풀자 팔방(八方)이 공경하였으니, 천하는 천하 사람들의 천하이지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닙니다. 신은 원약(遠弱)하고 궁벽한 왜국(倭國)에 살면서 성지(城池)가 6척도 안 되고 봉강(封彊)이 천 리가 되지 않지만 항상 지족(知足)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본디 지족하는 사람은 언제나 지족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중국의 임금으로 만승(萬乘)의 천자가 되었으니, 지극히 존귀한 데도 항상 부족한 마음을 품고 멸절(滅絶)의 뜻을 행하여 군대를 다 이끌고 와서 신의 경계를 침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수택(水澤)·산해(山海)의 고장에서는 자연 그 대비가 있는 것이니 어찌 길가에 꿇어앉아 받들기만 하겠습니까.

옛부터 군대는 항상 승전함이 없었고 장군은 항상 패전함이 없었습니다. 신이 문(文)을 말한다면 공맹(孔孟)의 문장(文章)을 가졌고 무(武)를 말한다면 손·오(孫吳)의 도략(鞱略)을 가졌으나 윗사람이 이미 자애(慈愛)하지 않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불효(不孝)하는 것입니다. 하란산(賀蘭山)에서 만나 바둑이나 한 판 둘까 하는데 신이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전쟁을 그만두고 강화하는 것이 상책이며, 패권(霸權)을 다투어 전쟁하는 것은 하계(下計)입니다. 해마다 진공(進貢)하고 조근(朝覲)할 것이니 백성들의 고통을 애석히 여기시어 도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지금 수장(首將) 합이마(哈哩嗎)를 보내어 주본(奏本)을 가지고 가서 아뢰게 합니다.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실록에 보이는  명군의 책임자와 왜국의 막료 풍신수길의 서찰 내용에 조선은 아예 논외다. 그러나 이런 부당함을 당하고도 약자인 조선은 할 말이 없다. 풍신수길이 말한 하란산은 중국 어디인 듯한데 실록의 원문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풍신수길이 바둑을 입에 담고 있다. 일본 바둑의 고서에 해당하는 좌은담총에는 일본의 선승 닛까이가 풍신수길의 앞에 불려가 바둑으로 병법의 이치를 설파하는 대목이 있다.


- 바둑을 두는데 있어 자기를 지키고 상대를 공격함에 대관(大觀)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황은 싸움에 있지만 승리는 치국평천하를 꾀하는 것이니 지, 인, 용 이 세 가지가 바둑의 덕성입니다.

군대를 움직임에 첫째가 기민과 은밀이지만 이를 기만이라 하지 않습니다. 도리를 따라 움직이고 형세를 따라 순응 변통하는 것이니 이를 거역하고 망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닛까이는 바둑의 고수였다. 풍신수길은 그의 바둑 실력을 높이 사 그를 지근에 두고 바둑을 두며 군사 자문을 맡긴다. 그리고 기소(碁所)를 설치해 바둑 고수들을 그곳에 있게 한다. 닛까이는 본인방이란 호칭으로 당대의 고수로 낙점 받는다.


기소가 설치된 곳이 교토에 있는 적광사였다. 이 유례는 도꾸가와 시절에 이르러 체계화된다. 소위 말하는 일본 바둑의 4가원(4家院)이 생긴 것이다. 본인방, 이노우에가, 야스이가, 하야시가다.


닛까이의 바둑에 대한 생각은 조선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조선도 이미 바둑을 병법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었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의 7장군 중 가토오와 우끼다 히데이야 등이 바둑을 잘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 선조, 풍신수길, 가토오 기요마사, 심유경, 유성룡 등 등장인물 모두가 바둑을 이해하고 잘 두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한중일 삼국의 상층부는 바둑을 모르면 행세를 못하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 광해군이 끼어든다.


“근래 경략 병부(經略兵部)의 소고(疏稿)를 접수하였는데,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한 내용 중에는 세자(世子)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은 청년(靑年)으로서 자질이 영발(英發)하여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모두 경복하고 있으므로 이미 국왕(國王)에게 이자(移咨)하여 빨리 세자를 재촉해서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머물면서 본진(本鎭)과 같이 협력하여 모든 일을 경리(經理)하는 것이 곧 당금의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자 광해군은 나이가 젊고 지기(志氣)가 특출하다는 것은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는 않았으나 이미 소장(疏章)에서 밝혀졌습니다. 더구나 떠도는 잔약한 상황이 되었으니 흉적을 제거하고 치욕을 씻을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정돈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뜻이 간절할 것입니다. 일이 군무(軍務)에 관계된 것이니 마땅히 서둘러 행해야 할 것이므로 이렇게 이자하는 것입니다.

귀국(貴國)에서는 이 뜻을 잘 이해하고 속히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배신(陪臣)을 대동하고 밤낮으로 달려가서 본진의 명령에 따라 군무를 숙련(熟練)하고 병법을 강습하여 국가를 보전할 계책을 세우게 하는 것이 사실상 본국(本國)이 장래에 태평을 누릴 수 있는 복이 될 것입니다.”



전쟁은 조선을 누란의 지세로 몰아갔다. 중국의 황제까지 조선에 보낸 칙서에서 지금의 조선이 바둑돌을 쌓아놓은 듯 위태롭다 적고 있을 정도였다. 이때에도 선조는 무기력했다. 명장 심유경은 선조에게 세자라도 전장에 보내어 흩어진 민심을 모으라는 청을 한다. 광해의 분조(조정을 나눔)는 이렇게 시작된다.


광해는 전란의 중심을 뚫고 경기 서해안을 따라 호서(충청도)로 들어온다. 홍주에서 목사 홍가신과 충청 어사 이시발의 위장을 받고 청양 정산을 거쳐 남원까지 내려온다. 그때 함경도로 근왕병 모집을 나갔던 임해군이 가토오군에 생포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길을 다시 북쪽으로 잡는다.


임해군이 함경도 경흥 땅에 도착하자 관노 몇 명이 합세하여 임해군을 사로잡아 가토오에 넘겨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가토오는 관노들에게 은덩이로 포상을 하고 한심한 조선의 처지를 희롱하는 시를 짓는다. 이 사정이 가토오의 종사관이 남긴 조선 출정기에 전한다.


일국의 왕자가 호종하는 군관도 없이 싸돌아다니다가(?) 관노 몇에게 잡혀 봉변을 당하는 장면은 조선 왕실의 위상이 여지없이 추락함을 뜻한다. 이 비슷한 시기 한양에서는 중종의 능묘가 파헤쳐 지고 시신이 없어지는 사건까지 생긴다. 의주에 피난 가 있던 선조는 기겁을 한다. 거기다 호서에서는 반란까지 일어난다.


조선의 상황은 최악이다. 백성들의 삶은 부박했다. 이곳에서 조선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다.


(興源曰: “飢民死亡, 近來尤多, 盡割食其肉, 只是白骨, 而積于城外, 高與城齊矣。” 成龍曰: “非但食其死人之肉, 生者亦相殺食, 而捕盜軍少, 不能禁戢。” 德馨曰: “父子兄弟, 亦相殺食, 而楊州民, 相聚爲盜, 捉人食之。 必須措置, 開可生之路然後, 庶不相殺。 不然, 難禁矣。” 선조실록)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굶주린 백성들이 요즘 들어 더욱 많이 죽고 있는데 그 시체의 살점을 모두 베어 먹어버리므로 단지 백골(白骨)만 남아 성(城)밖에 쌓인 것이 성과 높이가 같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비단 죽은 사람의 살점만 먹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먹는데 포도군(捕盜軍)이 적어서 제대로 금지하지를 못합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부자 형제도 서로 잡아먹고 있으며 양주(楊州)의 백성은 서로 뭉쳐 도적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반드시 조치를 취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뒤에라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금지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조선은 이미 식인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를 서로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보이자마자 이런 살벌한 장면이 전면에 나선다. 유성룡 이덕형 선조 등이 함께 한 자리니 거짓이 아닐 것이다.


광해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던져진 고깃덩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성난 백성들의 돌 세례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황해도 경상도를 넘나들며 의병을 부추기며 고군분투한다. 광해군의 이 장정은 훗날 그가 왕위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광해군일기의 한 장면이다.


- 일전에 인견했을 때 승지 유공량(柳公亮)이 선혜청(宣惠廳) 작미(作米)의 일이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대략 말하였다. 당초 나의 생각에도 이는 진실로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본청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기에 우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량의 말을 들으니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나라를 소유한 자가 모두 토양의 실정에 맞게 공물(貢物)을 바치게 한 데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방납(防納)으로 교활한 수단을 부리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이 작미의 일이 있었으니, 그 근원은 맑게 하지 않고 하류(下流)만을 맑게 하고자 한 데 가깝지 않은가.


광해의 이 말은 참으로 정곡을 찌른다. 방곡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던 광해는 방곡 보완책을 만들어 보고하라 명을 내린다. 신하들이 이런저런 대책을 올려 보지만 광해의 일갈은 못마땅이다. 혼탁의 근원인 위는 정리하지 않고 혼탁과는 별 상관없는 밑의 일만 만지고자 하는 상층부에 대한 일갈인 것이다.


광해는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보고 듣고 겪은 군왕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치세는 백성들 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기득권들이 보고만 있지 않았다. 개혁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임진왜란은 역사의 굴절까지 감수해야 했다. 광해군 시절 선조실록이 편찬되고 그가 실각하자 다시 선조수정실록이란 또 한권의 실록이 꾸며진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던 선조실록은 선조수정실록으로 호화찬란해진다. 이 속에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같은 꿈과 같은 에피소드가 끼어든다.
율곡은 서인 당파의 비조다. 서인들은 율곡의 성인화가 절실했다. 이곳에 율곡은 이미 임난 10년 전 10만 명(실록에는 10만이란 특정은 없다)의 양병을 하여 전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적어 넣은 것이다.


유비무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은 율곡의 제자들의 작문에 불과하다. 원 선조실록은 부실했다. 전란 중 사초가 모두 불타 버리고 유실된 탓에 실록의 충실을 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정실록도 각 문중의 족보 일기류 문집 등까지 모아 겨우겨우 완성한다. 이 과정에 각 문중이 자파의 부각을 도모하다 보니 선조실록 두 종류 모두가 심하게 왜곡된다.


 

임난 7년을 통하여 조선에 가장 큰 모멸과 모독을 준 일본의 장수는 가토오 기요마사다. 그러나 욱일승천하던 천하의 가토오도 울산성에서 처절한 피의 보복을 당한다.
일본군의 침입으로 조선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비참한 일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임난의 끝에 이번에는 일본군이 고스란히 식인이라는 사태에 직면한다. 명나라 장수 진유격이 선조에게 한 말이다.


“지난해 울산(蔚山) 싸움에서는 12월 23일 기병(騎兵)이 먼저 도착하여 울산성의 외부 방책을 격파하였고, 다음날 제가 보병(步兵)을 거느리고 안에 있는 목책(木柵) 세 겹을 격파하여 석굴(石窟)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성이 견고하여 공격해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풀을 쌓아 태우려고 사람마다 한 단씩을 가지고 오르는데 총탄이 비처럼 쏟아져 가까이 가는 자마다 총을 맞고 넘어졌기 때문에 감히 성에 다가가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포(大砲)로 격파하려고 하였으나 성이 높아 쳐다보아야 하는 형세라서 기예를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토오군은 퇴각을 거듭하여 울산성을 둥지 삼아 웅거한다. 일본군은 2만 3천. 가토오군을 추격해온 조명 연합군 4만은 울산성을 에워싸고 장기전에 돌입한다. 조선에 출병한 가토오군은 일본군의 정예중의 정예다. 진유격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병사들은 약간 강하지만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사는 그렇게 정예롭지 않습니다. 잇따라 배로 와서 구원할 때 우리 군대의 뒤를 포위하려고 진격하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면서 언덕에 오를 기세를 취했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대포로 적선 1척을 쏘아 격침시켰으나 적이 그래도 물러가지 않기에 또 1척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2척을 계속 격파하자 적이 물러나 도망쳤는데, 다시는 언덕에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적이 날 듯이 건너올 용기와 죽을 힘을 다할 능력이 있었다면 어찌 3척의 배가 격파되었다고 후퇴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보아 적들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울산성 전투는 4개월을 끈다. 울산성은 자체로 물이 부족한 성이었다. 샘이 기천을 겨우 먹일 정도로 부족한 곳에 2만이 넘는 군사와 말까지 들어가 있으니 지공전에 일본군이 배겨낼 재주가 없었다. 거기다 조명 엽합군은 초창기의 허접 같은 군대가 아니었다. 전란을 치루어 오는 동안 스스로 강한 군대가 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성을 나와 백병전을 치룰 형편이 아니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말을 잡아먹고 끝내 죽은 동료의 시신에 손을 대는 일까지 생긴다. 가토오는 이때 피눈물을 흘린다. 그의 종사관은 가토오의 눈물이라 적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간 일본군은 수천이다. 그것도 조명군이 철군을 허락하라는 상부의 명으로 포위를 풀어준 탓이었다.


가토오는 일본으로 돌아가 오사카성을 쌓는다. 그때 울산성의 비극적 상황을 떠올리고 우물을 수십 곳에 판다. 그러나 천하의 가토오도 1600년 세끼가와라 전투와 1603년 오사카성의 함락후   숨을 거둔다.


가토오의 바둑 실력은 장군 중에서 제일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전투 능력도 탁월했던 듯하다. 풍신수길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해 조선 출병군의 총사령관이던 나이 19세에 불과하던 우키다히데이야를 극력 추종했다. 그는 풍신수길의 양자다.


이순신, 풍신수길, 광해군, 가토오 기요마사 이 네 사람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속에서 피고 진 영혼들이다. 이곳에서 전쟁의 원죄를 묻는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이들 네 명의 사내들이 전장과 삶 그리고  자신들의 바둑 속에서 울고 웃으며 한판의 후회 없는 바둑을 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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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네 |  2007-08-30 오전 8:07: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평생 벗해온 바둑이 무의미 한것만은 아님이 작가님의 글에서 연원을 얻습니다^^  
노을강 저하고 열성 독자가 되셨군요?
남도사람 |  2007-08-30 오전 9:2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가토오도 세끼가와라 전투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는 것은 혹시 착각이 아닌지요...  
李靑 빠진 글자를 살렸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노을강 |  2007-08-30 오전 9:3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인육식이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말인듯 한데 끔찍 하군요. 아무리 전쟁중라 해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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