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5년 10월 14일(1781년 건륭(청고조) 46년)

25세에 조선의 24대 왕이 된 정조는 삼십대의 늠름한 군왕이 되어 있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특별히 부탁했던 계지술사(繼志述事)의 원칙을 천명하며 정조 초기의 다소 산만했던 국정을 다잡아간다. 영조는 세손에게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하고 또 그리하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했다.

학문과 정사에 근면하고 자신(영조)의 종통을 지키며 평생사업이던 탕평을 계속하고 백성들의 양역을 균등케 한다는 것이었다.

정조5년은 정조가 정치에 자신을 갖던 해였다. 1월에 자신의 측근인 '서명선'을 영의정으로 삼고 4월에는 강릉에 가 있던 '홍국영'이 죽음으로써 정조는 정적 홍인한 정후겸 김귀주 등을 앞장서 제거했던 홍국영에 대한 부채의식과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해이기도 했다.

10월 14일 '성정각'에는 비변사 당상관들 십여 명이 나와 정조와 마주앉는다. 영의정 서명선을 필두로 중추부사 구선복, 공조판서 서유명, 호조판서 이성원, 형조참의 이의관(李意寬) 등이 의전 서열 순으로 앉아 왕 앞에 부복한다. 먼저 서명선이 말한다. 왕대비(정순왕후) 혜경궁(정조의 친어머니)의 건강을 묻고 상(정조)의 건강은 좋아보인다고 말한다. 정조는 다 좋다고 대답한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끝나고 첫번째 국사의 안건이 올라온다. 경기감영에서 올라온 수원부 형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이감 문제와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와 소나무를 함부로 남벌하다 포청에 잡혀 있는 이광복 등 6인에 대한 죄상과 의율(처벌조항) 적용이 논의된다.

이때까지의 말은 대부분 서명선이 하고 있다. 이 자리에 참가한 지중추부사 구선복(具善復)은 홍국영의 뒤를 이은 정조의 친위무장이다. 구선복은 홍국영과 교대로 지난 5년간 오군영의 대장을 역임할 정도로 군문에 밝고 정조의 신임도 각별하다.

구선복은 정통무인이다. 구선복은 정박, 이장오 등 이름을 떨치던 영조말의 무장들의 계보를 잇는 무인으로 뚝심과 충심으로 정조 초기를 잘 보위했다. 정박 이장오 구선복은 바둑을 잘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정박은 남산에서 바둑대회를 열 정도로(이서구 기자소전) 애기가였고 고수기도 했다.
이장오 구선복 등도 기록에 바둑을 남기고 있다. 구선복은 홍국영과 매우 친했다. 홍국영도 바둑을 매우 좋아한 인물이다. 신낙수는 ‘은파산고(恩波散稿)’에서 홍국영을 비꼰 바 있다.

- 홍국영은 바둑을 잘 두었고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 한담을 특히 잘해 한번 시작하면 날을 새우기 일쑤였다. 얼굴이 무척 잘생겼다.

신낙수의 이 기록을 혜경궁 홍씨도 증언한다. 홍씨는 한중록에 생긴 게 계집처럼 곱상한 것이 세손을 꼬드겨 온갖 이상한 것을 다 전한다며 험담을 한 바 있다. 서명선은 죄수들의 문제가 검토된 후 다시 환곡을 거론한다. 환곡은 18-19세기 삼정 중의 하나로 특히 환곡은 백성들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것으로 순조, 철종 연간의 농민항쟁의 빌미가 된 것이다.

환곡은 본래 군량곡을 순환하거나 농민들에게 종자를 대여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환곡이 각 군현의 재정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환곡이 고리채로 둔갑하기 시작하며 조선의 망조의 원인이 된 것이다. 환곡으로 관아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환곡을 빌려 쓸 이유가 없는 농민들에게까지 떠맡기고 이자를 받아내는가 하면 빌려간 환곡을 가족 친척 이웃에게까지 연좌로 받아내어 도저히 떼일 염려 없는 금융업(?)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유배생활을 하던 한 선비가 유배가 풀렸는데도 그 지역에서 빌려 쓴 환곡 때문에 2년간이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까지 생길 정도였다. 서명선의 말에 정조가 이유를 묻자 이의관이 나선다. 이의관은 환곡의 폐해가 이제 평창(환곡 담당청)의 관리들까지 나서 복마전을 만들고 있다 말한다.

환곡이 육조와 각 군영 또는 지방의 아문(衙門)은 물론 창고를 지키는 말단 관원들까지 나서 대여곡업에 열중하여 이자를 취하기 바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창고 주변에 온갖 무뢰배들이 기생, 국가의 곡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일삼고 여항에서 술과 음악으로 낭비하는가 하면 바둑으로 도박을 일삼다가 끝내 채워 넣지 못하고 본인은 물론 국가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의관은 여항에 만연한 낭비풍조와 도박의 극성을 함께 말하고 있다. 도박은 조선의 국가적 관심사항이었다. 골패, 투호, 쌍륙 등은 물론 바둑이 도박으로 변질하여 양반 상민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생활의 저변으로 스며든 것이다. 고종 때에는 포교가 직접 도박장을 개설하여 골패, 바둑으로 부업(?)을 하다가 처벌되는 일도 있을 정도다.

바둑이 도박으로 변질된 것은 중국의 영향이다. 명말 청초 중국에서 바둑은 도박 중의 도박으로 손꼽혔다. 명말청초 중국은 군현에까지 기원(棋院)이 있을 정도로 바둑이 유행했고, 기원에서는 공식적으로 도박 바둑이 성행했다. 고수들이 대국에 구름관중이 몰려들었고 각자 돈을 걸고 관전하며 승패에 목을 매며 열광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문)

上御誠正閣。大臣·備局堂上, 引見入侍, 刑曹堂上同爲入侍時, 領議政徐命善, 知中樞府事具善復, 吏曹判書李衍祥, 江華留守金熤, 工曹判書徐有慶, 兵曹判書李性源, 禮曹判書徐浩修, 漢城判尹李命植, 刑曹判書金魯鎭, 咸春君李昌運, 行副司直徐有隣·李枉國, 大司憲李, 大司諫洪檢, 校理徐有成, 刑曹參議李義寬, 左承旨金尙集, 左副承旨李在學, 右副承旨徐鼎修, 假注書趙衍德, 事變假注書李萬榮, 編修官張顯慶, 記事官金鳳顯, 以次進伏訖。上曰, 俄命少退, 則承旨當在閤外, 而往于政院者, 生疎而然乎? 徐命善曰, 臣久未承候, 俄者勞動之餘, 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命善曰, 王大妃殿氣候, 若何? 上曰, 一樣矣。命善曰, 惠慶宮氣候, 若何? 上曰, 一樣矣。卿之所患, 今則, 何如? 命善曰, 幸得少差, 而頃以賤疾, 不得進參於朝講, 又未登對於賓筵, 臣尙切惶悚矣.(중략) 命善曰, 火巢之限, 亦有等分, 而今玆墓所, 過於陵寢火巢矣。上曰, 爲慮虎患, 向於筵席, 城東墓所植木, 只許一行矣。義寬曰, 臣以民情事, 有所仰達矣, 平倉還上之弊, 其來已久, 而今當捧糴之際, 民訴逐日盈庭, 故査問其委折, 則所謂平倉保人輩, 受出許多還穀, 分給各人處, 而闕輩俱是破落無依之類, 多受餉穀, 暗生分利之計, 誘引閭里間流蕩雜類, 饋以酒食, 多設博奕之戲, 其中稍實者, 驅負賭債, 無錢可出, 則許以還米輸贏, 載其名於還案中, 如是屢朔, 一人之名所負, 爲六七十石者多, 初無粒米分錢入手之事, 分徵於厥輩父兄族屬, 當初出給時, 一包半折價數兩錢, 而目今一包所納, 爲倍簁之費, 其所呼冤, 職由於此, 摠使方入侍, 請令覈實其受食與否, 使其作奸者, 擔當備納, 俾無白徵呼冤之弊甚宜矣。上曰, 摠廳還穀事, 實屬可悶, 今玆爲弊, 專由於募入, 而欲祛此弊, 則必罷北漢之外, 無他道矣, 命善曰, 其所爲弊, 果是不善分給之致, 而流來已久, 猝難變通矣。柱國曰, 昨年則果無願受之人, 故或有如此之弊矣。命善曰, 昨年雖無願受之人, 明春則, 必多受糴之民, 其所分給, 似不難矣)

조선실록의 3배나 되는 방대한 기록의 보고 속에 들어 있는 수백 건의 바둑의 기록이 세상에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국역(國譯)이 아직 8퍼센트도 되지 않은 승정원일기 속에서 바둑의 기록을 찾아내어 國譯을 하고 의미를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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