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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이창호' 창하오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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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이창호' 창하오 스토리
2008-02-27     프린트스크랩


마침내, 드디어, 기어이 중국이 농심신라면배를 안았다. 아니, 그간 그들의 숙원을 헤아린다면 ‘안았다'란 서술어보다는 ‘안을 수 있었다'라 표현하는 것이 더 리얼하리라.
9년 만에 맛보는 첫 우승. 농심신라면배의 전신인 진로배의 역사까지 포함하면 14년 간이나 애타게 기다리던 우승 축포다. 그 중심에 창하오(常昊, 32)가 있다. 천하가 알아주는 ‘한국의 두 거미손' 이창호와 박영훈을 연파하고 처녀우승을 이룬 견인차가 창하오다.

지금 중국바둑의 일인자는 25세의 구리(古力) 9단이다. 창하오 9단이 갖고 있는 중국 국내기전 타이틀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지난해 삼성화재배에서 이창호 9단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 갑조리그에서 20승 2패의 좋은 성적을 거둔 데 힘입어 랭킹2위 자리까지 다시 치고 올라갔다.

요즘 프로기사의 전성기가 20대로 내려온 것을 헤아리면 그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슬슬 밀리기 시작하는 연령대인 30대에 들어서서야 정작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은 눈길을 끌만한 일이다. 10년 전인 1997~1999년,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3년 연속 중국바둑 일인자로 올라서며 무한한 기대를 받았던 창하오였지만 그 이상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이후 그렇고 그런 기사로 맴돌아 팬들을 안타깝게 했기 때문이다.

중국 발음으로 창하오의 이름은 한국의 이창호와 비슷해 ‘중국의 이창호' 로 불렸다. 게다가 1990년대 말 두 이창호는 한국과 중국바둑을 호령하고 있을 때라 더욱 비교가 됐다. 나이도 동년배(이창호 9단이 한 살 위)였으니 호사가들이 찧고 까불 이만한 라이벌감은 없다.

그러나 ‘중국 이창호'의 벽은 ‘한국 이창호'였다. 중국바둑 랭킹1위로 올라서는 데까지는 질풍노도의 기세로 질주했으나 원조 이창호를 만나면서 바둑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뼈저리게 느껴야했다. 이창호를 넘지 못하면 ‘절대반지'를 손에 쥘 수 없는 시대였다. 녜웨이핑의 뒤를 이어 대륙을 평정했던 마샤오춘 9단이 그러했듯 창하오 9단도 이창호의 ‘불의 산'을 통과하지 못해 페이드아웃(fade out)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창호엔 이창호가 약! 9회 농심신라면배에서 한국은 '영원한 주장' 이창호 9단을 부주장으로 내보내는 깜짝 전술을 구사했다. 하지만 믿었던 '한국의 이창호'는 '중국의 이창호'인 창하오 9단에게 좌초되며 우승컵을 넘겨야 했다.

이창호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고행한 10년 세월
2005년 1월까지 6번의 세계대회 준우승 기록은 그에게 ‘만년 2인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주었다. 1998년 11회 후지쯔배, 2000년 13회 후지쯔배, 2001년 4회 응씨배, 6회 삼성화재배, 2003년 1회 토요타덴소배, 2005년 2회 토요타덴소배 결승에서 한국의 이창호-조훈현-이세돌 9단에게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이 가운데 이창호 9단에게 진 것이 3차례(11회 후지쯔배, 4회 응씨배, 1회 토요타덴소배)나 된다. 나머지는 조훈현 9단(13회 후지쯔배, 6회 삼성화재배)과 이세돌 9단(2회 토요타덴소배)에게 분루를 삼킨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사에 ‘처음'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이던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장사치도 그날그날의 마수걸이가 중요하거늘 하물며 평생을 달려가야 할 승부사임에랴. 그런 의미에서 1998년 후지쯔배는 첫 세계대회 결승진출이었고, 더군다나 상대는 앞으로 세계바둑의 정상을 놓고 숱하게 자웅을 겨뤄야할 숙적(이창호)이었다.

1998년 8월 1일 도쿄에서 벌인 11회 후지쯔배 결승전은 창하오-이창호 두 사람의 첫 세계대회 결승다툼이다. 이때까지 두 사람은 '97년 박카스배 한중천원전(2-1 이창호 승)과 '98년 LG배 본선(이창호 승)에서 4번 싸워 3승1패로 이창호 9단이 우위를 보였기는 해도 세계대회 결승무대가 지닌 무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병아리 때 쫓긴 닭, 장닭 돼도 쫓긴다. 내가 두 사람의 하고많은 대결 중 유독 이 첫 결승전에 주목하는 이유다.

숙명의 만남. 1998년 11회 후지쯔배는 이창호-창하오 두 사람이 세계대회 결승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대회였다.


   

[장면1] 제11회 후지쯔배 결승

백 이창호 9단
흑 창하오 8단

<1998. 8. 1, 일본 도쿄>

                                    [장면1]


중국의 신흥 일인자인 22세의 창하오가 일찍이 세계바둑 일인자의 아성을 구축한 23세의 이창호에게 도전장을 냈다. 이 한판의 승패가 안겨줄 우승 여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향후 세계바둑 패권을 놓고 수없이 다퉈야할 한국과 중국의 이창호가 세계대회 결승무대에서 첫 일합을 겨루는 일전이라는 의미, 그러하기에 이 일전은 향후 바둑계 판도를 가늠하는 풍향계였다.

이미 이때부터 두 사람의 대결 패턴은 이러했다. 창하오가 단단한 포석을 바탕으로 중반까지 앞서나간다. → 그러면 중반 이후부터 이창호가 힘을 내기 시작하면서 추격에 나선다. → 그리고 이창호의 슈퍼컴을 방불케하는 계산력에 걸려 종반에 뒤집어진다.

창하오 9단의 바둑은 이창호 9단 못지않게 두텁고 단단하다. 두 사람 모두 화려한 칼춤을 추는 기풍이 아니라 단단한 방패술을 기반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흐름을 선호한다. 이러한 바둑은 원래 초반보다 중후반에 그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창하오 9단이 번번이 후반에 뒤집어지는 것은 계산력이 이창호 9단에 미치지 못한 바도 있겠으나 그의 담력이 ‘새가슴'인 탓이 크다.

[장면1]은 냉정하게 반면을 살펴보면 흑이 1집반이나 2집반 정도 앞선 상황이라고 한다. 이창호 9단의 진단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큰 자리는 상변 백7의 곳이다. 그러나 백은 이곳을 두지 못하고 1로 두텁게 때려낸 뒤 공을 흑에게 넘겼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이치다.

공을 넘겨받은 흑이 2를 선수했다. 매우 기분 좋은 교환이다. 자, 이때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창하오 9단은 <참고도1>을 결행하지 못하고 흑4로 중앙을 두텁게 손보았다. 흑▲의 얼개가 어딘가 엉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혹 예상하지 못한 이창호 9단의 카운터펀치를 의식한 것이다. 바둑은 심장싸움이다.

아래 <참고도1> 흑1로 잡는 것이 역끝내기 9집. 실전(장면1)처럼 백5를 뺏겨 흑8 후수로 산 것과 비교하면 개운하기 그지없다.

   

참고도는 이후 백8까지 예상되는데, 이 수순을 밟았으면 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흑이 참고도1을 놓치기는 했으나 그래도 형세는 1집반 내지 반집은 앞섰다는데 ‘신산(神算)'의 중압감에 눌린 창하오는 끝내 끝내기에서 실족하며 거꾸로 1집반을 졌다.

275수 끝, 백 1집반 승.

                                  [참고도1]

10년 만에 극복한 '이창호 콤플렉스'
승부사에게 기세와 자신감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이창호에게 얻어터지면서 수수깡 꺾이듯 기세가 꺾였고 가뭄에 저수지 바닥 드러나듯 자신감의 수량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초일류의 수준에서 기실 테크닉이란 그야말로 백짓장 차이다. 승부는 심적인 영역에서 난다고 봐야 한다.

1997년 7월 17일 1회 박카스배 한중천원전 3번기 3국에서 진 뒤 2000년 11월 3일 4회 응씨배 결승5번기 2국까지 창하오 9단은 무려 3년이 넘도록 이창호 9단에게 치욕의 12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특히 2001년 응씨배에서 3-1로 진 뒤로는 본인의 말마따나 “바닥까지 치는” 슬럼프를 경험했다. 중국 내 기전에서는 “2002년 말부터 2004년 3월 러바이스(理光)를 딸 때까지, 1995년 전국개인전에서 우승한 이후 기사 생애에서 가장 오랜 기간 침묵했으며 등급점수도 많이 떨어졌고 타이틀도 모두 잃었다”고 말했다.

잃을 게 없으면 두려움이 없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법이다. 창하오 9단은 이때(2004년)부터 다시 치고 올라갔다. 이 해 응씨배와 토요타덴소배 양 세계대회 결승에 올라 2005년 정초를 달궜고 1월에 열린 토요타덴소배는 이세돌 9단에게 2-1로 졌지만 두 달 뒤 벌어진 응씨배에서는 최철한 9단을 3-1로 꺾고 세계대회 첫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눈물겨운 6전7기(六顚七起)의 재기였거니와 중국인의 숙원이었던 응씨배 우승의 염원을 17년 만에 푼 첫 중국기사였기에, 외양상 2개 대회 중 한 개만 성공한 ‘반타작 우승'이었어도 ‘온타작 우승'에 버금가는 추수였다.

6전7기의 우승. 중국인의 숙원이었던 응씨배를 우승하며 대륙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2005년 5회 응씨배 시상 모습.

자신감이란 이토록 중요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승부사를 춤추게 하는 것은 자신감이다. 2006년에도 창하오 9단은 농사를 잘 지었고 또다시 삼성화재배와 춘란배 양 세계대회 결승에 올랐다. 특히 삼성화재배의 결승 맞수는 지난 10년 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었던 바로 그 상대, 이창호 9단이었기에 각오가 남달랐다. 이때(2006년)까지 기록한 역대전적은 6승20패. 처참한 성적표였다. 이창호 9단이 건강에 이상징후를 보이며 예전 같지 않은 행마를 보이고 있기는 했으나 창하오 9단에게는 ‘그래도 이창호!'였다.

사실 이창호 9단의 급격한 퇴조 기미에 가장 애가 탄 사람은 창하오 9단이었다. 중국바둑이나 다른 맞수들이 겉으로는 “안타깝다”고 말은 해도 속으로는 은근히 쾌재를 불렀을 것이나  10년 라이벌이자 10년 지기인 창하오 9단만큼은 영영 설욕할 기회를 놓칠세라 초조한 심경을 대놓고 드러냈다. 그랬기에 체력과 집중력이 이전만 못한 이창호였기는 해도 지난해 11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3번기를 겨룰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사실 2년 전 생애 처음으로 응씨배 우승컵을 품에 안기는 했어도 뭔가 한구석 허전했다. 이창호를 이기고 거둔 우승이 아니었던 탓이다. 이창호는 창하오가 풀어야 할 평생 화두(話頭)이자 궁극의 목표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지만 그 뜻이 아무리 간절해도 재주가 받쳐주지 않아 울분을 안은 채 스러져간 승부사가 오죽 많은가. 재주가 받쳐주어도 운때가 맞지 않아 하늘을 원망한 천재는 또 오죽했고. 이 점에서 창하오 9단은 재주도 받쳐주었고 뒤늦게나마 운때도 따라주었다.

2007년 1월, 11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마침내, 기어이, 드디어 이창호 9단을 꺾고 우승했다. 그것도 2-0 완봉승. 이창호와 세계대회 결승에서 4번째 마주친 끝에 거둔 첫 승리였다. 두 달 뒤 열린 나머지 결승, 6회 춘란배에서 후배인 구리 9단에게 져(0-2) ‘준우승' 숫자를 하나 더 늘린 것은 더는 아픔이 아니었다.

한번이 어려워 그렇지 두 번째는 쉬운 법. 창하오 9단은 석 달 뒤(2007. 4) 20회 후지쯔배 본선2회전에서 이창호 9단에게 다시 지기는 했으나 2008년 2월, 9회 농심신라면배에서 처음으로 주장이 아닌 부주장으로 출격한 이창호 9단을 잡아 중국의 대회 첫 우승을 이끈 일등공신이 되었다. 예전에는 말로 주고 되로 받았으나(비중 작은 대국에서는 간혹 이겨도 비중 큰 대국에선 번번이 졌으나) 이제는 되로 주고 말로 받고 있는 것이다. 이창호 콤플렉스를 확실히 극복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창하오 9단은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여전히 겸손하다. 

“이창호 9단은 나에게 있어 평생의 라이벌이다. 이창호 9단은 나보다 훨씬 앞섰고 나는 쫓아가는 형편이다. 지난 10년 간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를 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장면2] 제11회 삼성화재배 결승1국

백 창하오 9단
흑 이창호 9단

<2007. 1. 22, 중국 상하이>

[장면2]

상하이는 창하오 9단의 고향이다. 현지 언론은 이창호와 창하오의 대결을 ‘호호지쟁(鎬昊之爭)' ‘10년 숙적의 재회'라며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창하오 9단은 원래 포석이 좋았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하면서' 더 좋아졌다. 황금빛 호른처럼 두터우면서도 유연하게 반상에 울려 퍼지는 그의 포석을 감상해 보자. 나는 창하오 9단의 포석을 보노라면 ‘바둑을 둔다'라기보다 ‘바둑을 연주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창의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모양. 수심 깊은 강이 묵묵히 흐르듯 묵직하고 두터운 유속(流速). 거기에 끊임없이 더해지는 연구.

흑5에 걸쳤을 때 백6으로 한칸 높게 받고 8로 곧장 뛰어든 수가 미니중국식 포석을 깨기 위해 연구된 수법이었다. 성패 여하를 떠나 창하오 9단의 준비가 어떠했는지 여실하게 보여 주는 포석이었다.

   

백6은 보통 <참고도2>처럼 백2의 날일자로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흑3으로 미니중국식을 펼치면 백4에 갈라치고 흑5로 덮어씌우는 수가 유행포석이다.

공이 울리자마자 선보인 실전 백6, 8의 수법에 이창호 9단은 당황했다. 일단 위 실전(장면2)의 수순을 놓아보시기 바란다.

[참고도2]


흑21, 23은 응수타진인 듯하나 그렇다고 방치하기에는 좌하변이 너무 크다. 해서 흑25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흑37까지 현찰을 챙기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백의 두터움이 뭉게구름같이 부풀어 오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창호의 주특기는 두텁고 단단하게 판을 짜놓고 상대가 덤벼들기를 기다리는 타입이다. 그런데 실전 흑45, 47로 초반부터 선공에 나서고 있다.

   

<참고도3>처럼 흑1로 늘다가는 선수를 뺏겨 백2, 4로 우변이 파일 것이다.

강경하게 나서고 싶지 않지만 강경하게 나서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드는 상대의 힘. 원래 이쪽은 이창호의 주무기가 아니었던가.

[참고도3]

실전 백58까지, 백은 흑47의 필살기를 허공으로 돌려세우며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우변을 지웠고 어느새 성큼 한발 앞서 가기 시작했다.

사실 창하오의 고질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확연히 달라진 면은, 예전 같으면 후반부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며 따라잡히곤 했는데 이런 난조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올해 9회 농심배 최종 두 판-이창호, 박영훈 전에서도 창하오 9단은 초반부터 우세를 확립했고 추격자의 흔들기에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다시 승기를 되잡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예전의 새가슴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바둑의 해결사 창하오! 응씨배에 이어 중국바둑의 또하나의 숙원이었던 농심신라면배 우승도 창하오 9단이 이끌어냈다.

대단한 창하오 씨! 겸손한 창하오 씨!
외국 기사이기는 하나, 두 가지 관점에서 나는 창하오 9단을 대단한 기사로 평가하고 있다.

하나는, 그처럼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얻어터지면 그냥 주저앉아 ‘만세'를 불러버릴 법한데도 용케 극복했다는 점.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다. 같은 중국기사인 마샤오춘 9단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마샤오춘에 비해 창하오는 나이가 더 어렸기에 재기의 여지가 더 있었다 반박하지 말라. 창하오보다 어려도 이창호의 장벽에 통곡하다 영영 낙오한 기사가 부지기수다.

또 하나는, 부단히 노력하고 겸손하다는 점.
그의 퇴락의 시작과 부활의 끝에는 이창호가 있었지만 이창호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천은 자신의 부족함을 굳이 감추지 않고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한 그의 성실함이었다. 이러한 저력이 자칫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죽 밀려버릴 수 있는 승부세계에서 되살아나게 했다.

창하오 9단은 프로기사만 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훤칠한 미남자다. 그러고 보니 1960년대 최고의 주가를 구가했던 이탈리아의 명 테너 프랑코 코넬리(1921~2003)가 떠오른다. 영화배우 뺨치게 생긴 미남가수 코넬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민하고 자나깨나 연습에 몰두한 공부벌레였다.   

“수면 중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꿈에 음표가 보이는 거예요.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향상시키고자 정진하기 때문에 절대 편안히 쉬지 않습니다. 만일 내게 완전히 자유로운 석 달 간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오로지 성악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데 쓸 겁니다.”

한국의 이창호나 중국의 이창호나 한결같이 닮은꼴이다. 늘 한길만 달리며 노력하는 자세.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 몸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성품. 한국의 이창호가 그러하듯 지금껏 중국의 이창호에 대한 팬들의 비난을 들어본 바 없다. 그래서인가. 나이는 이창호 9단이 한 살 위이지만 둘은 절친한 친구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혈투를 벌인 날에도 식사에 초대하여 가볍게 술잔을 나누는 사이다. 역사에 남은 라이벌들은 대다수가 으르렁거리며 신경전을 펼쳐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이들은 그 반대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중국의 왕레이(王磊) 8단의 평이 두 기사를 일목요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창호와 창하오는 같은 타입의 기사다. 두 기사 모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거기에다 프로기사라는 업을 사랑하고 있다. 그들의 이런 점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원동력이다. 프로기사 중에 바둑을 좋아하지 않는 기사가 없다고는 하지만 각기 좋아하는 정도가 다르다. 이창호와 창하오가 다른 기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에겐 오직 바둑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열정을 품고 있는 한 이창호와 창하오의 시대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세계 최강의 바둑커플. 5회 응씨배 결승5번기 1국에 들어가기 전 전야제(2004. 12)에서 함께 단상에 올라 임전소감을 밝히며 활짝 웃는 있는 창하오-장쉔 부부.

창하오 재기의 숨은 공신, 장쉔 8단
마지막으로 창하오 9단의 여덟 살 연상의 부인, 장쉔(張璇) 8단의 내조를 얘기하고 싶다. 바둑판 위에 드러나지 않아 우리가 간과하기 쉽지만 창하오 9단이 심적인 안정을 찾고 바둑에 정진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분명 장쉔 8단의 보이지 않는 뒷바라지가 있다.

아시다시피 두 사람의 결혼은 떠들썩했다. 장쉔 8단은 루이나이웨이 9단에 견줄 만한 세계여자바둑의 최강자였고 이들의 혼인은 ‘세계 최강 부부기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측면보다는 장쉔 8단이 창하오 9단보다 여덟 살 연상인 데다가 재혼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소식이 알려지자 장쉔 8단은 “울 오빠 돌리도!”를 외치는 창하오 9단의 소녀팬들의 등쌀에 한동안 시달려야했다.

두 사람은 1997년부터 남몰래 사귀어오다 1999년 2월 결혼수속을 마쳤고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창하오 9단은 23세였고 장쉔 8단은 31세였다. 당시 중국은 폭증하는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남자의 결혼 하한 연령을 22세로 규정해 놓았고, 1976년 11월생인 창하오는 정확히 22세를 두 달 넘긴 직후 혼인신고를 서둘렀다. 남자로선 조혼이었으나 이 무렵 창하오 9단은 이창호의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한 채 길을 찾지 못할 때였으니 이른 결혼이 결과적으로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된 듯하다. 남편을 일으켜 세운 대신 장쉔 8단은 딸을 낳은 뒤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이 기대하고 있는 랭킹1위 구리 9단이 국내에서는 펄펄 날다가도 정작 국제무대에만 나가면 힘을 못 쓰고 있는 데 비해 한물가고 있는 기사로 판단했던 창하오 9단이 벌떡 일어서 중국인이 그토록 염원하던 응씨배(2005년)와 단체전인 농심신라면배(2008년) 양 대회 우승컵을 안기자 ‘진정한 중국바둑의 영웅' ‘중국바둑의 해결사' ‘진짜 남자'란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1988년 세계대회가 시작된 이래 중국의 그 어느 기사도 해내지 못했던 쾌거이다. 이 가운데 한 중국팬의 장쉔 8단에 대한 평가가 내 눈길을 붙잡는다.

“창하오의 성장에 대해서 장쉔의 공로가 절반은 돼. 푸젠(福建) 출신의 이 여자는 상당히 현숙하다고 해.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창하오가 지니까 다들 장쉔을 마구 욕했지만 오늘의 승리는 응당 그녀에게 절반을 줘야 해.”

아래 만화는 1998년 [월간바둑가이드] 9월호에 연재했던 것이다. 창하오-장쉔 커플이 아직 결혼하기 전인, 연애소식이 여기저기 퍼지던 시절의 이야기니 재미삼아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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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부 |  2008-02-29 오전 1:32:4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흠~~~~~~~~~~~~~~~  
석과불식 |  2008-02-29 오후 12:04:2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후후후,,,
1년후를 한번 보자...
그때는 우리 기사들의 용맹은 정말 하늘을 찌를 기세일것이다.
특히 박영훈과 이창호!!
천하제일검 이창호가 이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1년후에 10연승을 해버리겠다.  
별그림자 |  2008-02-29 오후 12:22:2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정말로 이런 글은 혼자보기가 너무 너무 아깝네효^^

창하오는 늘 이창호사범이 벽이었지요.

부딪쳐서 쓰러지면 일어나고 또 쓰러지고 일어나고,
창하오도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돌부처쎈돌 |  2008-02-29 오후 8:28:4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누군가에게 계속 질 때는 무섬증이 생겨나는 법이고 주눅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자국을 대표하는 초일류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중되는 참담함과 고통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의 와신상담은 이창호보다 위대한 창하오의 인생역전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말이지요^^!
그리고 월간바둑 2월호 3월호 잘 받았습니다.  
육묘법문 |  2008-03-04 오후 12:17:0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
창하오 개인적으로는 잘 성장하고 있지만
이 창호와 연관을 짓는 것은 시기적으로 좀 안 맞는 느낌이 있는데요...
연령적으로야 두 사람이 비슷하지만
사실 상 이 창호의 사회적 연령은 유 창혁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라서 말이죠..
.  
선비만석 |  2008-04-06 오후 5:39:5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창하오는 이창호를 만난게 불행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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