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저녁상을 받아든 많은 시민들은 티브이 대담에 질겁했다. 그동안 심심찮게 세인의 입살에 오르내리던 사건 · 사고가 하나씩 껍질이 벗겨지자 대다수의 시민들은 믿기지 않았던 유언비어의 실체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기사의 신뢰도를 측정하기 위해 상당수 전문가들이 대담 형식으로 자리를 같이한 이날의 기획특집은 ｢매란방 철학관｣의 김송자 여사를 비롯하여 지리학자 최경조 교수, 역리학회 사무국장 민달호, 황극경세원의 송학수, 그리고 공이오구라는 자폭대(自爆隊)로 한국에 들어온 기미꼬 등이었다. 이날의 방청객은 70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 사람들 역시 신문이며 주간지 · 잡지사 기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사회는 김순원이 몸 담은 H신문 박정율 사회부장이었다. 전격적으로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은 사회적인 파장보다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노민우 장군의 결단에 의해서였다.
“우리 민족은 그동안 숱한 외세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이제는 세계 속의 한국으로 발돋움해 가는 시점에 뜻하지 않게 나라 전체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해 보고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됐는지의 배경과 차후의 방비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볼까 합니다.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건 취재에 온 힘을 경주한 김순원 기자에게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김순원은 그동안 취재를 통한 기자수첩을 펼친 채 사건의 개요를 풀어나갔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으로 불리우며 지구상의 어떤 나라보다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한반도가 침략 당해 문화유산이 파괴된 것은 실로 애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문화유산이 크게 손상된 것은 그렇게 멀리갈 것도 없이 임진왜란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최경조 교수가 거들었다.
임진년 왜란. 이 나라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이나, 조선을 돕고자 명나라에서 원군을 휘몰아온 명장 이여송이나 한결같이 조선의 산천을 훼손했다는 증거는 이 나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른바 대귀지지(大貴之地)의 명당엔 그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철주를 박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백성들의 마음그릇에 담긴 희망을 도둑질했다는 논지를 가볍게 폈다.
“그런 이유로 온 산천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사람도 잠을 잘 때 등이며 허리에 불편한 것이 끼면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하물며 바람과 물을 먹고 사는 이 나라 조선 산천이 군데군데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런 점에서 뜻 있는 인사들은 진즉부터 쇠말뚝 뽑기 운동에 전념해 왔음을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익히 들어왔습니다. 환자에게 고통이 있다면 좋은 약재로서 처방전을 내리듯 우리 산천이 고통받고 있다면 당연히 좋은 처방전으로 그 고통을 해소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제였다. 사회자는 일단 일제시대의 우민정책(愚民政策)부터 짚어나갔다.
“대다수의 식자들은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 정기가 말살됐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우민정책입니다. 이것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황극경세원의 송학수 원장님께서 다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송학수는 준비가 있었던 듯 메모지를 펼쳐놓았다. 그것은 평소 교제해 왔던 종교문제연구소 문태일 소장의 이론 같았다.
“이 문제는 얼마 전 피습 당한 문태일 소장이 말하는 게 적격일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분께선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본인이 그분의 뜻을 대신해 전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정 하에서의 종교 활동은 한결같이 조선 독립을 막고, 조선 백성을 우민화함으로써 허울뿐인 황국신민으로 탈바꿈시켜 영구적으로 식민지화를 시키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송학수는 임진년 이후 [정감록] 신앙이 팽배한 것은 나라가 왜적에게 침탈당한 울분에서 선비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풀이했다. 그런 이유로 수찬 벼슬에 있던 정여립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것은, 난을 일으켜 나라를 전복시키려기보다 안일에 빠진 중앙요로에 정신이 번쩍 들도록 일침을 가하는 게 목적이었다는 게 설득력 있는 답변이라 풀이했다. 물론 다른 쪽으로는 사색당파에 휩쓸리다 보니 정적을 모살하려는 계책에서 그 같은 복수가 자행될 수 있었다는 점도 배제시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흥미로운 화두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바로 [격암유록]의 발현이었다. 사회자는 [격암유록]의 위찬 여부를 놓고 역리학회 사무국장 민달호의 답변을 유도했다.
“[격암유록]은 격암 남사고 선생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지금까지 여타의 기록을 추적해 본 결과 선생과 관계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선생은 중종 4년인 1509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셨으며 본관은 의령이며 역학을 비롯하여 풍수 · 천문 · 복서 · 상법에 통달하여 말씀하시는 예언마다 반드시 맞아떨어져 세인을 놀라게 하신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남긴 비결서가 [남사고 예언서] 또는 [격암유록]이라고 알려졌으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영양 지방을 축으로 인근 수백 리 안팎에는 선생의 행장이 크게 부풀려 구전으로 전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민달호는 뒷수쇄를 채웠다.
남사고 설화는, 천문지리에 능통하고 도술을 부려 이적이 많았다는 얘기다. 선생이 선조 때 천문교수를 지냈다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경력이 없는데도 당대부터 여러 문헌에 괴이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동야휘집]을 비롯하여 [대동기문]에 각 7편의 얘기가 전하고 [계담산수]에 3편 [송와잡설] · [지봉유설] · [어우야담] · [청구영언] 등에 각 1편씩 전한다. 이러한 설화는 선생을 신인으로 극상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20세기에 나타날 여러 징후들을 예언으로 풀어내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사회부장은 의례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부 역학자들은 시중에 흘러 다니는 [격암유록]은 남사고 선생이 집필했으며 오묘불가사의한 내용을 해설했다는 인터뷰 기사도 본 적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연 근거 없는 책으로 치부해 버리는 건 뭔가 앙금이 남는다고 보는데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달호의 답변이 거침없었다.
“조금 전 말씀드렸듯이 남사고 선생은 천문 · 역수에 능하셨습니다. 선생은 선조 8년인 1575년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셨고, 임진년(1592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침범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왜장 가또(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조선을 쳐들어온 것으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선생이 남기신 예언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남사고비결]과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된 것은 [남사고비결]로 이것은 한 장의 참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20세기의 UFO가 날아다는 것까지 예언했다는 것인지 실로 이해되지 않은 대목입니다.”
민달호는 이점을 지적했다. 선조 때 일어난 임진년 왜란으로 허탄해진 선비들이 만들어낸 [정감록] 안에 선생의 비결서가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항간에 떠다니는 [격암유록]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 [격암유록]이라는 이름으로 흘러다니는 예언서는 후대에 들어와 위찬한 것이 분명하다고 못을 박았다.
그렇다면 누가 무슨 목적으로 [격암유록]을 위찬했는가? 이것을 종교적인 문제로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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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