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오후 7시 30분. 김순원은 충무로의 아따미(熱海) 일식집으로 초대받았다. 점잖은 노신사 미우라의 초청이었다. 그는 김순원의 필력(筆力)을 필요 이상으로 격찬했다.

“독일의 유명한 명상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글이란 남을 위해 쓰는 거지 자기를 위해선 쓰지 않는 거라구 했어요. 그런 쪽에서 본다면 신문 기사야말로 그쪽에 포함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김순원 기잘 보면 실감합니다.”

김순원의 기사를 ‘쇄금(碎金)’으로 비유하는 미우라의 표정은 진지했다. 쇄금이란, 금을 깨뜨리면 빛이 더 찬란하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글이나 문장을 칭찬하는 데 사용되었다.

“하하하, 근자에 김기자의 거침없는 필력은 마치 용이 구름바다 위로 승천하는 것만 같습디다. 그래서 뵙자 한 거지요.”

정종을 데워 활어회를 안주 삼아 두어 잔 들었을 때였다. 미우라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낯으로 분위기를 다독거렸다.

“내 본국에 있을 때는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를 좋아했었지요. 그 사람 글에 ‘경신읍귀(驚神泣鬼)’라는 게 있습디다. 비장한 마음으로 쓴 글은 귀신을 감동시킨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기자의 글이 그런 경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우라는 정종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궈냈다.

“사실은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은혜를 입었던 분의 일을 말씀드릴까 싶습니다. 바로 구로다 회장님이십니다.”

“아, 일본 경제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일부 언론에서 그 분을 무당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너무 해괴한 일이어서요.”

“음, 비슷한 얘길 들은 것도 같습니다.”

“일부 언론들은 그렇다 치고 ｢사건과 추적｣이니 ｢스캔들｣ 같은 월간지에선 없는 내용을 억지로 만들어 기사를 확인해 달라고 성화들입니다. 이게 그런 기사죠.”

미우라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기사 내용은 시중에 음성적으로 떠다니는 내용들, 이를테면 근거 없는 미확인 내용들을 확인해 달라는 일종의 주문장이었다. 개중에는 하이틴을 상대로 하는 음악 잡지와 디자인에 관한 사보도 끼어 있었다. 그들이 확인하려는 주요 내용은 동목인이었다.

“우리가 신도원을 나올 때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동목인을 태운 것으로 일부 언론에 기사화됐습니다만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가 그곳을 강제 헌납 형식으로 빼앗기고 나올 때, 마음이야 더없이 아팠지만 깨끗이 손을 털었어요. 전국에 흩어진 48개 지부에서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무슨 조사단인가를 만들어 우리 쪽에서 박정희 정권과 맺은 신도원 임대차 계약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디다. 이 문제는 서둘러 차단하지 않으면 서로가 좋을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김순원은 다소곳이 들어주었다. 미우라는 신도교 내부 사정에 대해 자잘한 일들을 들려주고 나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신도교에 대해 시중에 흘러 다니는 유언비어가 꽤 많은 모양입디다. 이것저것 듣고 있다 보니 기가 차지도 않아요. 그거야 머잖아 해명될 일이니 굳이 해명서를 낼 필요도 없지만, 좀전에 말한 동목인과 구로다 회장님의 신상에 관한 문제만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말씀하시죠.”

“우선 동목인에 관한 껀입니다. 신도원을 출입하게 되면 그 사람에겐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과 신상에 관한 기록이 위로 올라갑니다. 이런 거죠.”

미우라는 향나무 조각으로 만든 목패를 꺼내놓았다. 앞면엔 이름과 직위가 써 있고, 뒷면엔 그 사람의 출생 연월일과 태어난 시가 적혀 있었다. 가장 아래쪽엔 고유 넘버라는 명칭 아래 일곱 단위의 숫자가 있었다.

“우리 신도교에선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도구로 이 목패를 사용해 왔습니다. 워낙 많은 신도가 출입하다 보니 동명이인이 수없이 나옵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습니다만 나름대로 불편한 점은 있습니다. 에, 뒷면 하단부에 있는 고유 넘버는 교도 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신도교 입교시 자동적으로 받게 돼 있습니다.”

김순원은 목패를 집어 앞뒤로 살펴보았다. 미우라의 말처럼 그것은 신분을 나타내는 신패가 분명해 보였다.

“그런 점에서, 언론에 노출된 이런 목패를 동목인으로 몰아치는 건 아주 잘못된 거죠. 한국의 차후 경제개발 사업에 일조하실 구로다 회장님을 무당으로 모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회장님은 충격으로 쓰러지신 후 기동을 못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미우라가 꺼내 놓은 다섯 장의 사진은 문태일 소장을 피습한 범인이 지닌 동목인으로,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형태나 형식면에서 똑같았다. 김순원이 톡 건드렸다.

“사진으로 찍은 이 목패는 동목인이 아니란 말씀이죠?”

“신패죠.”

“신패의 주인공이 강유선(姜瑜瑄) 씨라는 건 아시겠네요?”

“글쎄요. 확인해 봐야죠.”

“어떻게 확인합니까?”

“고유 넘버가 있어요. 그 넘버를 찾으면 얼마든지 신원 확인이 가능해요. 큰 문제는 아니에요. 그건 하시라도 확인이 가능한 작업입니다. 동대문에 있는 본당에 들어가면 얼마 전 본국에서 가져온 컴퓨터가 그 작업을 대신해 줄 겁니다.”

“아, 그래요. 나중에 한 번 구경 가겠습니다.”

“김기자가 오신다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죠. 에, 일의 선후야 어떻든 도와주십시오. 언론에서 때리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잖습니까. 신년 벽두부터 이런 문제로 골치를 썩히다 보니 사업에 신경 쓸 여가가 없어요. 그러니 김기자께서 좀 도와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죠. 어떤 점에 제 힘이 필요한지.”

“우선 동목인이 허위라는 걸 밝혀 주십시오. 또 그러한 동목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울러 밝혀 주시구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중요한 소스를 드리겠습니다.”

“소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여러 가닥의 줄을 잡게 됩니다만, 마씨 3인방이라 불리는 그 사람들은 근자에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포착됐습니다. 예를 들면 동남아를 무대로 삼는 마약 조직과의 연계죠. ‘호시 구미(星組)’로 약칭되는, 저희 쪽 정보에 의하면 상당액의 자금이 마씨 3인방의 구좌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동원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이 기회에 그들의 음모를 깨뜨리지 못한다면 장차 한국의 앞날은 수렁에 빠질 공산이 큽니다.”

“글쎄요. 아직은 어떤 단초도 보이질 않는데요.”

“그러니까 말씀 드린 거죠. 제 생각입니다만 이런 문젠 직접 김기자께서 다루면 위험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독자 투고라든가 또는 광고 형태 등의 방법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효과가 클 겁니다. 물론 경비가 들겠지만요. 경비 문제는 이쪽에서 댈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이 문제는 간단한 듯 보이지만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서두르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구로다 회장님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면 충분한 보상은 해 드리겠습니다만.”

“생각해 보죠. 나름대로 조사도 해봐야겠구요.”

미우라는 세 차례의 손뼉을 쳤다. 문밖에 기다리고 있던 검은 색 양복으로 정장한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준비된 봉투를 들고 왔다. 그는 미우라 옆에 놓아둔 채 뒷걸음으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