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 위에 놓인 봉투에 다시 10만원을 더 집어넣어 차석만이 봉투를 건넸다.

“부장님, 약소합니다만 받으십시오.”

“고맙소. 잊지 않고 챙겨 주니. 그러나 이번은 받지 않겠소. 차선생 상황이 더 나쁜 듯싶소.”

봉투를 받아 탁자 모서리에 놓아두자 차석만은 평소 피우지 않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익숙하게 라이터를 당겼다. 그는 허공에 연기를 뿌리고 나서 상대의 행색을 눈여겨보았다. 하얗게 퇴색한 머리에 치렁한 장발, 거기에다 하얀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으니 영락없는 도인 타입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점쟁이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자신도 역술 공부를 했다는 것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저런 행색인가? 차석만은 편할 대로 생각했다.

“그동안 부장님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어디 물 건너라도 다녀오신 겁니까?”

“물 건너가 아니라 땅속 나랄세.”

“예에?”

“내 오랜만에 지난 인연을 찾아 왔더니만 차선생 행색이 말이 아니오. 무슨 고민 있습니까?”

“부장님과 연락 끊기자 우린 완전히 개털 됐죠 뭐. 일본에서 돌아온 민사장이 취재부 차장 임명장과 쯩을 모두 회수하고 우리를 관명 사칭으로 고소한다고 난리 부르스를 췄죠. 한 사람당 3십만원씩 해서 2백만원을 만들어 줬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싸가지 없는 이부장인가 이동박이라는 놈이 수작을 벌였다지 뭡니까.”

그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2천만원짜리 약속어음 사건을 털어놓았다.

“세상에 그런 놈이 있드라니까요. 부장님, 칠성회 직제표라는 걸 만들었나요? 그런 것 없었잖아요.”

“갑자기 그건 왜요.”

“이동박 그 자식이 부장님 서랍 정리하다 발견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걸 보고 칠성회 회원들을 돌림빵 놨나 했어요. 근데 그게 아니잖아요. 경리 아가씨 쪽이 아니면 우리 회원 가운데 누군가가 손바닥을 맞춘 것 같은데요.”

차석만은 그동안에 일어났던 서러운 사건들을 시시콜콜 까발렸다. 중간 중간에 튀어나오는 욕설을 자제치 못한 것은 그만큼 마음속에 응어리가 깊어졌다는 뜻이다.

“차선생, 정문호 기자 연락됩니까?”

“그 사람 옥필호 사무실에서 살아요. ｢사건과 추적｣이라는 주간지에서 이가 놈을 데려오자, 정기자도 별 볼일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요즘은 완전히 캐세라세라예요. 친척집에 있다가 독립한 지 얼마 안됐거든요. 장안평에 루삥 집을 얻어 자취 한다던가….”

차석만이 몇 군데 전화를 걸었으나 모두 불통이었다. 네 번째로 전화를 건 곳은 지하 다방이었다. 마흔이 넘은 마담이 바꿔 주려는 것을 3층 철학관이라는 말을 남기고 끊어 버렸다. 정문호가 나타난 건 5분쯤 후였다.

“와따, 이놈의 점쟁이 집은 들어오기도 힘들어. 다른 곳은 대청마루에 따뜻하게 온풍기 틀어넣고 점을 치더니만.”

왈칵 문을 열어젖히던 정문호가 반색했다.

“부장님! 박부장님이시죠!”

워낙 행색이 이상했던지 정문호 역시 긴가 민가하는 눈초리였다. 그는 소파 건너편에 앉으며 농을 던졌다.

“부장님, 도 닦습니까?”

“그렇게 됐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뭡니까.”

“탁원제 기자 어디 갔는가?”

“탁기자님요.”

“고향에 갔나?”

“아니죠. 부장님 회사 안 나오시고 얼마 안 돼 취재 갔었죠. 행선지엔 그냥 전라도라고 썼드라고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전라도 간다더니만 뿅 하고 사라져 버렸어요. 하여튼 도깨비 같은 친구 아닙니까.”

“그래서 ｢사건과 추적｣에서 이동박이를 데려온 거구만.”

“부장님, 요즘 사무실 공기 웃기지도 않아요. ‘세상을 울리는 말발굽’이라는 3마씨 중 한사람이 민사장 후배라는데요. 그 자가 칠성회 사무실이 있는 대한오피스텔에 특집부를 만들어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거든요.”

“모종의 일?”

“그런 것 있잖아요. 혁명이니 쿠데타니 하는 것도 돈이 있어야잖아요. 겉으로 보이는 건 부정 축재자들을 몰아치는 것이고, 그쪽 특집부에선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내사해 구렁이알같은 돈을 빼먹자는 거죠 뭐.”

박일우는 금방 눈치 챘다.

“흥, 그렇구만. ‘넣고 2천 빼고 3천’.”

“잘 아시면서···.”

차석만은 약간 망설이다가 서랍 안에서 사각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그는 안에 든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부장님이 사고를 당하지 않으셨다면 진즉 이걸 보냈을 겁니다. 정공칠 실장이 죽기 전에 줬거든요. 메모지는 ｢추사정(秋思亭)｣이란 것인데, 다 죽어가는 말로 내게 말했어요. 물건은 어느 대군(大君)인가 대감의 묘실(墓室)에 숨겨 뒀다는 겁니다. 그곳으로 가는 열쇠가 ‘부지사중(不只思中)’이라나요.”

박일우는 그들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 나서,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주어야겠소. 실종된 탁원제 기자를 찾으려면 우선 이 방법부터 써 봅시다. 정기자는 돌아오는 일요일에 나와 이천의 도요지(陶窯地)나 구경 갑시다. 괜찮죠? 그리구 그곳에 갔다 와서 기사 일부를 이동박이 한테 넘겨요. 가만, 그 문젠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모처럼 만났으니 내가 술 한 잔 사리다.”

참으로 오랜만에 맞이한 즐거운 저녁 시간이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났다. 평소에 그렇게 얌전하던 정문호가 곱추 춤을 춘다, 허수아비에 오징어구이 춤을 춘다고 수선 떠는 바람에 술집을 나서기 전까지 웃어대느라 바빴다.

‘내 행색이 변하고 보니 같이 어울리기도 쉽지 않아.’

그러다 문득 탁원제의 생각에 멈췄다. ｢황극경세원｣을 박일우에게 내어 준 송학수는 무엇보다 탁원제 소식을 궁금해 했다. 그곳 어디에 갇혔다는데 생사를 알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항상 쓸쓸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는 처녀도 소개했다. ‘살인 특공대’라는 우스갯말을 흘리던 송학수는 독물에 중독된 그녀를 살린 게 벽암의 처방전이라 했다. 이름이 기미꼬(君子)였다.

언뜻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발이 아주 게으르게 흩날리고 있었다. 뒷문으로 김순원이 들어와 티브이 수상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7시가 다 됐습니다.”

“여기 앉아요.”

화면이 떠오르자 요란스러운 시그널 효과음이 깔리며 송인하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송인합니다. 오늘은 경신년 새해를 맞아 첫 번째 종합 뉴스 시간입니다. 지금 중계차는 이천에 소재한 ｢한국 부동산 컨설팅｣ 장민호 회장의 도요지에 와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뉴스 중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여보세요. 이주형(李周炯) 기자 나오십시오.”

이제 방송 2년차인 이주형의 긴장된 모습이 화면에 클로스업 되었다. 오리털 파카를 입은 그의 몸집은 에스키모 인처럼 풍요로웠다. 그는 눈송이가 어지럽게 휘날리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취재의 포인트를 들려주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경신년 첫해에 특종을 쫓아 달려온 이주형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늘 아침 뜻하지 않은 제보가 방송국으로 답지하면서였습니다. 지난 1930년 이래 우리는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 운동의 일환으로 벌여 왔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여러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그 가운데 ｢서삼릉의 미스테리｣로 알려진 태호(胎壺 ; 태 항아리)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