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아름다운 한 절의 시
박사주는 남의 일처럼 한소릴 떨구었다.
“일곱 시 종합 뉴스 시간에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거요. 그걸 보고 나서 김기자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리다.”
김순원은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속엔 여전히 의혹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잘 몰랐으나 가까이에서 찬찬히 뜯어보니 잘 해야 서른 안팎이다. 장발에 하얗게 센 머리였지만 그것만으로 나이를 환산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박사주를 경애하는 몸짓이었다. 신문사에 들어가 사회부 기자가 된 이래 그 자신 점복(占卜)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모처럼 점집에 들어왔으니 뭔가 기사꺼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박사주, 아니 박일우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묵상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을 구르는 생각은 구만리장천을 기러기가 되어 날아간다. 그것을 음미라도 하는 것일까.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잠겨 들었다.
일주일 전. 그는 차석만의 점집을 방문했었다. 대충 겉인사는 나누었지만 장발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찾아간 그의 모습을 차석만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만큼 점집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잘 해야 서른 대여섯이나 되었을까. 얼굴에 검버섯이 돋은 여인이 두 눈을 부라리며 차석만을 닦달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그러실 수 있어요. 이제껏 차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그런데도 아들은커녕 냄비 하나 구경할 수 없으니 이 무슨 조홥니까.”
차석만은 낯빛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러잖아도 이제 올까 저제나 올까 조바심을 치던 일이 터진 것이다. 성깔머리 고약한 장금순(張錦順)은 초혼에 실패하고 ｢정금당(正金堂)｣이라는 금은방의 대머리 김씨에게 재취로 들어간 여인이었다. 대머리 남편과의 궁합도 그런 대로 잘 맞고 부부 화합도 좋은 편인데 살림을 차린지 세 해가 되도록 아이가 들지 않았다. 그 동안 공들인다 어쩐다 난리를 치다 조상님네 선영에 잘못이 있다는 말에 선뜻 2백만원을 지불하고 부적(符籍)을 가져갔었다. 그런데도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한바탕 소란을 피우려 나타난 것이다. 여인의 카랑한 목소리가 점집을 흔들었다.
“그동안 차선생님한테 갖다 바친 돈이 일금 천만 원은 될 것이구만요. 하라는 공은 다 들였는데도 아기가 생기지 않으니 이것은 뭐가 잘못 됐어도 한참 잘못 됐구만요. 어디 한 번 들어봅시다. 내가 자식을 가질 수 있겄소, 없겄소? 만약 자식을 갖는다면 아들이오, 딸이오? 그리고 그 자식을 언제 갖겄소. 한 달이오, 석 달이오?”
작정을 하고 온 탓에 장여인은 조목조목 짚어 가며 차석만을 몰아세웠다. 식은땀을 수건으로 찍어내며 차석만은 자꾸만 입맛을 다셔댔다.
“그것참, 이상합니다. 장여사의 사주엔 자식이 셋이오. 아들 둘에 딸 하나···, 으째서 아기집에 자식이 들지 않은 지 그걸 모르겠단 말씀입니다. 어허!”
“그래 하는 말 아닙니까. 병원에 가도 이상이 없다. 궁합을 봐도 이상이 없는데 어디가 어떻게 나쁜지 점쟁이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차선생님이 모르면 귀신이라도 불러와야 합니까?”
식은땀을 흘리는 차석만의 처지가 안 돼 보였던지 박일우가 나섰다. 그가 점잖게 한소리를 뽑아냈다.
“잘못된 곳이 없는데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다면 필경 분복이 없는 탓이오.”
“뭐 분복?”
깨어진 얼음 조각 같은 여인의 시선이 낯선 사내에게 향했다. 송곳같은 말을 찌르려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장여인은 순한 양처럼 부드러워졌다. 차석만이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보시오, 차선생. 이분의 사주는 어쩠씁디까. 살(煞)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차석만이 엉겁결에 말을 받았다.
“아주 깨끗합니다. 영락없이 자식 셋을 생산할 몸인데 아기가 들어차지 않으니 이상하달밖에요.”
“어디 봅시다.”
박일우는 그녀의 행동이 약간 부자연스러운 것을 감지했다. 자꾸만 오른손을 왼손 밑으로 넣거나 아예 탁자 밑으로 내려뜨렸다. 그것으로 원인을 규명했다.
“장여사라 했던가요, 부인이나 바깥양반께서는 머지않아 기쁜 일이 생깁니다. 부인의 오른손 약지(藥指 ; 네 번째 손가락)에 생긴 상처가 완치가 안 돼 그런 것이니 걱정할 일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그녀의 오른손 약지는 상처가 있었다. 세해 전, 시집오기 며칠 놔두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인 일이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한 친구가 실수하여 컵이 깨진 사고나 있었다. 오른손 약지의 흉터는 그때 입은 상처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상처는 겉보기엔 나았지만 날씨가 우중충하고 비가 올 때면 상처 부위가 간지럽고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몰아쳤다. 최근에야 그곳에 유리 조각이 박힌 것을 알고 사흘 전 정형외과에 가서 수술을 받고 보니 자꾸만 오른손이 탁자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람의 길흉화복은 반드시 한 가지 만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관상일 수 있지만 족상이나 골상(骨相)도 있습니다. 저는 수상(手相)으로 장여사의 운수를 보고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길흉을 판단할 때는 엄지손가락을 선조, 집게손가락을 아버지, 가운뎃손가락을 어머니, 약손가락을 부부,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자손으로 하여 그 손가락에 흠이 있거나 이지러진 형상을 보아 길흉을 판단합니다. 장여사는 약지에 이상이 있다 보니 이제껏 자식을 얻지 못했어요.”
장여인의 낯빛이 밝아졌다.
“그럼, 자식을 얻을 수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고말고요. 여기 있는 차석만 선생의 말처럼 자식 셋은 슬하에 두겠습니다.”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어디 봅시다. 장여사는 계미년(癸未年 ; 1943년)에 출생했으니 나이가 서른 여섯이네요. 지금이 12월이니 만약 아이가 들어찼다면…, 태중점(胎中占)으로 보아 첫아이는 아들입니다.”
“어머, 그래요!”
“허나, 지독한 난산입니다. 고생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장여인은 복채로 10만원이든 봉투를 놓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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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