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찬기(文燦基 ; 문치수 사장의 조부)라는 사람이었습니다만,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등기부를 열람하면 주민등록 번호가 나타날게 아니오?”

“해방 이후 등기를 마친 것으로 돼 있는데, 그 다음해에 이 산을 ｢무라야마 역사문제 연구소｣에 담보 설정 형식을 취해 기증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송학수가 혀를 찼다.

“그것참, 묘한 일이구만. 어쨌거나 마을 사람들은 그 산의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알 게 아닙니까?”

“나이든 분들이야 귀동냥으로 들었겠지요. 제가 조사한 바로는 제갈(諸葛)을 비롯하여 주운한(朱雲漢) · 김광석(金光石) · 전기응(全基應) 등이 순종의 능을 정하고 고종으로부터 이 산을 사패지로 하사 받았다는 게 촌로들에게 들은 전설 같은 얘기예요. 모두다 이왕직(李王稷)에 몸담았던 매국노들입니다.”

실내가 밝아졌다. 흐트러진 자료들을 대충 한쪽으로 밀쳐 두고 소파로 돌아온 최경조 교수는 송학수를 향해 신년 운수부터 물었다.

“신새벽에 운수점을 처 보았더니 바람 풍(風)이 떨어지더라니까. 큰 궤(几) 안에 들어가 있는데 내 몸에 벌레(虫)가 달라붙은 형국이지 뭔가. 어찌나 기분이 사납던지 이곳까지 오고 싶지도 않았네.”

그 말을 듣자 김순원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냈다. 일행들이 놀라워하는 것을 밀치며 송학수가 나섰다 그는 품속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 앞에 놓았다.

“기자시라고 했던가, 여기에 아무 글자나 쓰고 싶은 자를 써 보시게. 과연 그 노인네의 말처럼 신고(辛苦)를 당할지 풀어 보세.”

김순원은 좌판을 펼친 점쟁이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노인은 점괘를 풀어놓고 이렇게 말했었다.

‘스물 네 시간 안에 만나는 사람 가운데 젊은이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사람이 있을 게야. 그 사람을 만난다면 능히 물을 얻을 수 있지.’

점쟁이 영감이 한 말 중에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자꾸만 걸렸다. 왜 물을 얻을 수 있다 했을까?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해가 임진년(壬辰年) 용띠이기 때문인가? 흔히 말하기를 ‘좌청룡 우백호’라 했으니 용띠인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런 점에서 김순원은 용(龍) 자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흐음, 용이라….”

송학수는 휘갈겨 쓴 글자를 노려보며 혀끝을 찼다.

“허어, 만약 이 자를 임산부가 썼다면 필경 난산했을 것이네. 아무리 달필이라지만 꾸불꾸불하고 삐딱한 게 도무지 정서법(正書法)에 맞질 않아.”

김순원의 낯빛이 붉어지는 것을 보며 점사가 떨어졌다.

“김기자가 쓴 용 자는 너무 꼬불꼬불해 농(聾) 자와 차이가 없네. 귀(耳)를 하나 더 보탰는데도 듣지를 못하니 답답한 노릇 아니오. 김기자가 임산부이면 벙어리를 낳을 난산이라 했을 게요. 신문사 사회부에 근무하는 기자에게 귀를 하나 더 달았는데도 듣지 못한다면 어찌 되는가? 필경은 크게 봉변을 당해 듣질 못하거나 죽는다는 뜻이 아닌가?”

사색이 된 김순원을 스쳐보며 송학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실마리를 풀어 나갈 방책이 없는 듯싶었다.

“내 한사람 소개시킬 터이니 가 보시게. 박사주(朴四柱)라면 사는 궁도를 만들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어디냐 하면….”

송학수는 메모지 한 장을 쭉 찢어 찾아갈 위치를 그려 넣었다. 메모지를 받아 든 김순원의 눈앞엔 일본 대사관 건너편에서 좌판을 벌인 노인의 모습이 물새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회부 수습기자인 한선주가 한사코 따라오겠다는 것을 어렵게 돌려보낸 김순원은 약도에 그려진 곳을 찾아갔다. 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스물 대여섯으로 보이는 처녀가 맞이했다.

“박사주께선 후원에 계십니다.”

“예에?”

“저를 따라 오십시오.”

처녀는 말없이 걸었다. 몸채를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 오른손 검지 끝으로 앞을 가리키며 돌아섰다. 물안개가 감실거리는 그곳은, 좌우가 열 자 남짓 돼 보이는 연못이었다.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사내가 잉어가 뛰노는 연못 주위에 서 있었다. 하얗게 착색된 사내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전 김순원이라 합니다. 송학수 선생께서….”

사내의 말이 무심히 떨어졌다.

“연꽃을 어찌 생각하시오.”

“예에?”

“연꽃의 본색이 무언지를 아시오. 그 색깔을 보면 시시때때로 변하는 게 마치 살아 있는 카멜레온 보다 더한 변신이오. 햇볕이 쨍쨍 내리 비칠 때가 다르고 눈이 올 때가 다르며, 또한 안개 낄 때가 다른가 하면 이슬 내리는 어둑새벽의 색깔이 다르오.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글…쎄요.”

“연꽃은 일기 변화에 매우 민감한 꽃이오. 그러나 결코 본색은 변하질 않소. 나는 그런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