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벽암을 만나러 왔소이다!”

진역관의 문을 두드린 인물은 육관도사 송학수와  양택 풍수(陽宅風水)의 대가 송길주(宋吉柱)였다. 서울의 외곽이랄 수도 없는 왕십리에 살면서 열다섯 해가 넘도록 지인(知人)들과 왕래를 끊은 괴벽한 인물이었다. 번거롭기만한 세파의 찌꺼기가 묻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일까? 예순을 다섯 해 전에 넘긴 그의 혈색은 늦가을 능금처럼 고왔다.

“벽암의 신셀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오죽헌에서 기다리던 벽암을 보는 순간 송학수는 그 말부터 꺼내 들었다. 얼마 전 독극에 중독된 처녀를 해독시켜 준 처방전에 대한 인사였다. 그 처방전은 1947년 이종준(李宗準)이라는 의원이 만든 ｢태을자금단방(太乙紫金丹方)｣으로 약효가 워낙 뛰어나 연산 왕은 단방의 명칭 앞에 ‘신선’을 붙여 ｢신선태을자금단방｣이라 부르게 할 정도로 제독(除毒)에 특효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단방(丹方)은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다. ｢옥추단(玉樞丹)｣ 또는 ｢만병해독단(萬病解毒丹)｣이 그것으로 허준의 [동의보감]이나 [납약증치증(臘藥症治症)]에 이용되었고, [제중신편(濟衆新編)] · [의종손익(醫宗損益)]에 쓰임새 있는 비방으로 기록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벽암이 독극을 제거하는 방법을 익힌 것은 [납약증치증]이었다.

조촐하나마 준비된 술상이 들어오고 몇 순배 잔이 돌았다.

“길거리가 외국 명절로 흥청거립디다. 한적한 ｢황극경세원｣ 앞도 난리가 났어요!”

송학수는 창밖으로 뿌린 시선을 거둬들이며 상위에 놓인 잔을 들어 입안을 적셨다.

“이렇게 뵙자는 건 심상치 않은 기류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비는 오지 않고 날씨만 후덥지근한 그런 기류 말입니다. 답답하잖습니까. 뭔가 터질 것 같은 불안한 냄새도 나구요···. 알다시피 중앙 정분 허수아비나 마찬가지고 모든 건 군부가 처리하잖습니까. 차제에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도 알 수 없고요. 더구나 심상치 않은 일을 입암(笠岩 ; 송길주의 아호)이 겪었다니 그 또한 마음자리가 편하질 못해요.”

송길주의 표정이 무거웠다. 왜정시대 잠시나마 이왕직(李王稷)에 몸담았던 게 부끄러워 해방 후에도 부득이 문 밖 출입을 할 때엔 하늘 보기 부끄럽다고 햇빛 가리개용 삿갓을 쓰고 다닌 송길주. 그래서 아호가 입암이다.

“그러니까 닷새 전이었지요.”

송길주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군용 지프 한 대가 집 앞에 멈추었다. 사복이었지만 지프에서 내린 사내가 스포츠형으로 머릴 깎은 것으로 보아 군인으로 보였다. 나이는 대략 서른다섯이나 됐을까. 근처 제과점에서 산 케이크 상자를 든 채 대문을 두드렸다.

“내 나이 예순다섯, 문 밖 출입을 삼간 지 십수 년이오. 예전처럼 세상살이에 욕심 있는 것도 아니고, 점법이니 관상이니 하는 건 손 놓은 지 오래요. 이제 와 새삼스럽게 해몽이니 점혈(點穴)에 대해 수선을 떤다면 강아지가 웃을 일이오. 요즘 신문 · 잡지를 보면 날고 기는 도사와 법사들의 광고가 홍수를 이룹디다. 그들을 찾아가 부탁하는 게 훨씬 나을 게요.”

이름을 마상섭(馬相燮)이라 밝힌 사내는 보안사에 근무한다는 현직 대령이었다. 그는 정색했다.

“풍수학인(風水學人)들은 반드시 송선생님을 찾아가라는 권유였습니다.”

“허?”

“그럼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꿈 얘기부터 꺼냈다.

“꽃이 피어 있는 화원(花園)에 들어가 꽃구경을 했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사이를 오가며 꽃향기에 취한 거지요. 저만큼 탁자 위에 값지고 귀한 화병 하나가 눈에 띄더랍니다. 근방에 여러 개의 화병이 있었지만 유달리 빛깔이 곱고 귀해 보여 집어들었답니다. 그 분은 먼지 낀 화병 속을 깨끗이 씻고 꽃꽂이를 했다는데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묵상에 빠져 있는 송길주를 곁눈질하며 마상섭은 불안스럽게 뒷얘기를 덧붙였다.

“괴이한 것은, 같은 꿈을 다섯 번이나 꾸었으니 이상할밖에요. 송선생님, 이 꿈을 해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