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파?”

“일종의 장생파(長生派)라고나 할까. 흥미로운 건 수은파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떨친 자 중에 ‘라고’란 자가 있는데 지금은 자신만의 독특한 종파의 교주 행세를 하네. 들리는 소문엔 일본의 ‘옴 진리교’라는 종교 단체의 교주도 라고에게서 떨어져 나온 수은파의  흑마술을 하는 떨거지로 봐야겠지.”

“흑마술?”

“그래. 그 말이 가장 합당할 거야. 내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자들은 죽은 자를 살려내고 산 자를 죽게 하는 묘한 능력이 있다고 믿거든. 주술로 죽이는 것을 주살(呪殺)이라고 하잖아.”

“믿을만한 소식통이야?”

“장담할 순 없지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 그렇게들 믿지. 거 왜 자네가 만났다는 윤일경이 말이야. 그 사람도 ‘라고’라는 흑마술 회원이야.”

‘뭐어? 가만,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묘수풀이를 하던 조관수 선생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거나, 아끼꼬라는 아가씨가 그렇게 죽은 것은 흑마술과 관계가 있다?’

탁원제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긴장은 국과수에 근무하는 최창기(崔彰基) 박사의 근황이 소개되면서 한층 고조되었다.

“닥터 최는 박일우 부장이 소속되어 있는 동양추리문학회(東洋推理文學會) 특별회원 자격으로 가입돼 있네. 박부장은 정식으로 추천을 받아 회원이 된 거구.”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자신들이 사이비기자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을 때, 박부장은 <비문(碑文)의 수수께끼>라는 역사추리로 주목을 끌었었다. 집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문 가운데 일제에 의해 마모되어 버린 글자의 비밀을 추적해 가는 내용이었다. 역사추리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이 작품을 역사편찬위 상임연구원 자격인 윤석호 교수는 달갑지 않은 평을 내놓았다.

<역사는 어느 쪽으로든 추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라는 거대한 강에는 갖은 유형의 물고기와 수초 등이 자라왔다. 우리는 그것을 가꾸고 받아들여야지 추리라는 이름으로 멋대로 뒤집어 생각하거나 가당치않은 추론을 밑바닥에 깔고 이러쿵저러쿵 까부는 것은 옳지 않다.>

이후로도 윤석호 교수는 자신의 강의 시간은 물론, 각종 모임에 나가 박일우의 <비문의 수수께끼>는 잘못 태어난 졸작으로 쳐버렸다. 문단 바닥에 이슈가 된 이 작품이 어느 날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린 이유를 지금도 알지 못했다. 이달호는 그 일을 생각하는지 못마땅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

“나는 가끔 윤교수가 왜 박부장의 글에 대해 그토록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는지 생각해보네. 광개토대왕비의 마모된 글자와 자신의 연구논문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데 말이야. 학창시절 윤교수의 은사인 친일사학자 이공도(李空燾) 박사를 공격한 전력 때문인가? 탁기자가 알아보겠어.”

한반도 내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됐다는 이공도 박사의 논문을 똥개들의 밑닦개 정도로 박일우 부장은 몰아부쳤다. 당시 동양대학교에서는 정년을 앞둔 이공도 교수의 품위를 손상시킨 학생에게 경고 차원에서 정학처분을 내렸고 이에 불복한 박일우와 동조자들의 힘에 이끌려 반성문을 한 장 내는 것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학창시절 일어났던 일에 대해 사람들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치장하거나 미화하거든. 나 역시 겉만 아는 동문들은 은사와 지혜겨루기를 한 박부장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껍질을 벗기고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언제나 내동댕이쳐졌음을 볼 수 있네. 그래서 나와 박부장이 반격할 생각으로 준비해 오고 있었는데 작년 봄 이공도 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접어버렸지.”

이달호의 뇌리엔 또 다른 생각이 꿈틀거렸다. 윤석호 교수가 몸 담은 동양사학회(東洋史學會)는 홍콩 출신의 거부 진달삼(陳達三)이 회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단체다. 그자들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표면적으론 문화 사업이라지만 금전대부업(金錢貸付業)을 비롯해 오락기 사업과 중국 고대의 주류(酒類) 판매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또한 윤석호의 아들 윤일경이가 몸 담은 곳은 구로다 그룹에서 지원하는 연구단체다. 부자가 중국과 일본으로 나뉘어 꾸미는 게 무슨 일일까.

갑자기 삐삐가 자지러졌다. 뜻밖에 동대문 스케이트장 건너편의 오피스텔이었다. 하루 종일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기미꼬는 지친 목소리에 생기를 담고 있었다.

“탁기자님, 빨리 좀 오세요.”

그녀는 하루 전에 서둘러 나가면서도 말라비틀어진 고무나무 화분 아래 열쇠를 두겠다는 탁원제의 말을 잊지 않고 잘도 찾아냈다. 탁원제가 도착하자 그녀는 몇 장의 사진과 숫자가 쓰인 아홉 개의 칸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 들렀더니 내 예상대로 전화기에 자동녹음이 돼 있었어요. 아끼꼬는 자신의 예감 때문인지 내게 줄 물건들을 봉투에 넣어 사진 현상소에 맡겨 놨더라구요. 여러 곳을 취재한 탓인지 사진들도 희한한 게 눈에 띄어요. 탁기자님, 이거 보세요.”

그것은 급히 휘갈겨 쓴 메모였다.

4	9	2
3	5	7
8	1	6

<기미꼬상, 물건은 길 건너 충무로 현상소에 맡겨놨어요. 내가 여직원 보낸다고 했으니까 사진 찾으러 왔다면 내줄 거예요. 봉투에 든 물건들은 시게루(茂)상을 만나면 전해 주세요. 그럼···.>

그녀가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은 정사각형으로 만든 아홉 개의 칸이었다. 거기엔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쓰여 있었는데 5라는 숫자가 쓰인 중앙에만 희미하게 지문이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