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적으로 고려 왕궁이 있는 만월대는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다.

쥐라는 동물은 어떤가? 의심 많고 놀라기를 잘한다. 만월대에서 건너다 뵈는 곳이 자남산(子南山)으로 새끼쥐 형국이니 어미쥐에 해당하는 왕궁(만월대)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 모르는 새끼쥐가 천방지축 날뛰기 때문이다.

불안한 궁안, 위태로운 궁안을 보호하기 위해 자남산에 다섯 가지 동물 유형을 만들어 서로 견제시켰다. 쥐 · 고양이 · 개 · 호랑이 · 코끼리 등이다.
고양이는 어린 쥐가 함부로 나다니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또 개는 고양이의 움직임을 감시했으며, 호랑이는 개를, 다시 코끼리가 호랑이를 감시했다. 이렇게 상호 견제함으로써 만월대에 머무는 늙은 쥐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고려의 도성에서 빤히 바라다 뵈는 곳, 이른바 ‘아이 업은 봉우리’라 불리는 곳이 부아봉(負兒峯)이다. 높이는 1,670자인데 남쪽에서 보면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 등에 업혀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봉우리를 남쪽이 아닌, 서쪽에서 보면 전연 딴판이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순진무구한 아이 모습이 아니라 흙 한 점 없는 땅에 창을 박아놓은 모양이다. 그래서 이름이 극암(戟岩)이다. 만월대의 북방인 이곳은, 날카로운 창을 들고 궁 안으로 달려오는 모습이었기에 부아봉 정상에 풍수등(風水燈)을 걸어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날카롭게 쏘아오는 살기를 다스린 것이다.

“이등박문은 조선의 심장부인 한양의 허점을 발견했기에 희희낙락 만주시찰을 떠났던 거지. 그 자가 얼마나 영악했는지는 훗날 나타나. 즉, 조선총독부 건물과 서울시청을 보면 알 수 있어.

주산인 북악은 웅장한 세로 보면 큰대(大) 자의 줄기를 만들고 그 아래로 쭉 내려오면 조선총독부는 일(日)자 형을 이루고, 서울시청은 모양새 사나운 본(本)이라는 글자 형태야. 다시 말해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산인 북악과 총독부 건물을 합성시켜 대일본(大日本)이란 전무후무한 장난감을 만들어 낸 거야.

지금도 쇠말뚝 뽑기 운동은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쇠말뚝을 뽑아낸다하여 원상복구되는 건 아니지만 그걸 하찮게 여기는 지도층 인사가 많다는 게 문제지. 이게 친일파들을 정죄하지 못한 한심한 작태야.”

탁원제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잔뜩 흐린 날씨처럼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침묵의 터널 속으로 미끄러졌다.

문치수의 집에 도착한 것은 빗발이 추적거리는 저녁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들 부부는 어색한 미소를 일궈내며 낯선 손님을 맞아들였다.

“비 오는데 오시느라 죄송합니다. 그리구 감사하구요.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무엇이 감사하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일우는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준비된 술상이 차려졌다. 보통은 식탁에서 마셨지만 오늘은 홈바 형식의 구조를 이룬 방으로 안내되어 술상을 내왔다.

건물은 현대식 구조를 이루었지만 방안을 메운 집기들은 구닥다리 일색이었다. 정중앙에 걸린 곡창지대로 뵈는 널따란 평야를 그린 그림과, 안개가 감싼 산악 지대를 찍은 사진은 빛이 바랜 채 우중충하게 걸려 있었다.

백 호가 넉넉한 대평원 그림의 좌측 하단엔 흘림체로 1934라는 숫자가 있고, 앞쪽의 장식용 선반에는 바둑 두는 신선들의 모습을 채색한 조개껍질과 자기로 된 필통이 놓여 있었다. 그 오른쪽으로 세로로 한뼘 반, 가로로 네 폭을 이룬 미니 병풍이 알맞게 공간을 차지했다. 병풍에는 우측으로부터 ‘부(不)’ ‘지(只)’ ‘사(思)’ ‘중(中)’이란 글씨가 박혀있고 글씨 옆에 흐릿한 낙관이 드러나 있었다. 일우가 관심을 보이자 문치수가 설명했다.

“저건 조부님의 유물입니다. 특별한 게 아니지만 폭마다 글자 한자씩 쓰여 있는 게 묘한 느낌을 주거든요. ‘부 · 지 · 사 · 중’. 저의 아버님 말씀이 저 병풍은 일본에서 온 바둑기사 ‘야마다’란 사람이 주었다고 조부님에게 들었답니다. 제가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떠돌이 생활을 하던 바둑기사로 알려졌더군요. 박기자님이 마음에 드시면 선물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이구, 아닙니다.”

“우선 한잔 하십시다.”

문치수는 고풍스런 주전자를 들어 잔에 술을 쳤다. 그는 불쑥 한마디 던졌다.

“아참, 우리 마누랍니다. 처녀 땐 인기가 대단했어요. 미스코리아대회에 나갔어도 성적이 좋았을 겁니다. 이 사람 일어에 능통해 처녀 때는 구로다 그룹 홍보실에 있었고요.”

“아, 그랬군요.”

“박기자님, 오늘 음식은 일식과 중식의 절충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드시고 저 좀 살려주십시오.”

문치수는 필요 이상의 제스처를 썼다.

술은 감미롭고 향긋했으나 뱃속에 들어가자 불덩어리로 변했다. 상표엔 알콜 농도가 70도인 청성산의 명물 신선주(神仙酒)로 표시돼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중국산은 빼갈이다. 가끔 죽엽청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지만 잘해야 40도 전후였다. 그런데 알콜 농도가 70도면서 향과 맛이 부드러운 것으로 보면 최고급임이 분명했다.

잔을 비우자 이번에는 문치수의 부인이 술을 쳤다. 그녀는 다소곳이 머릴 숙이며 속삭이듯 이름을 밝혔다.

“이경실이에요. 이이로부터 얘길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