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활달하게 몸을 흔들며 다가왔다. 풀숲이 밀생해 있을 부분으로 생각되는 곳을 책상 모서리에 밀어대며 약간 젖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미스 장에게 말해둘 게 있어. 일 끝나면 요 아래 다방으로 좀 내려와. 오늘 약속 없지?”

다른 직원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요 아래라면 궁전 다방이요? 거긴 싫어요. 지하층이라 화장실 냄새도 독하구. 그곳 말구 건너편 사거리에서 쭉 들어가면 아따미(熱海)라는 일식집 있잖아요. 거기서 만나요.”

아따미라면 장은미가 본사에서 파견 근무차 출근했을 때 환영회를 치른 곳이다. 평소 이곳을 애용했던 곳은 아니었고, 문치수가 친구 소개로 구로다 그룹의 셋째 아들 마사오(正男)를 만났을 때 우연이 이 음식점에서 자리를 함께 한 기억이 있었다.

“그렇군. 배도 고플 시각이니 거기가 좋겠어.”

저녁에 만나 따끈한 정종으로 입안을 헹구고 문치수는 분위기를 다독거렸다. 칸칸을 막은 객실이므로 주위엔 손님이 없었다.

“내 생각엔 누가 뭘 입고 출근하든 상관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니, 개인적으로는 환영한다고나 할까.”

장은미가 환한 얼굴로 웃었다.

“어머, 그래요. 사실은요, 내가 사귀는 분이 노브라를 좋아하거든요.”

“뭐야?”

그녀는 까르르 웃고 나서 주변상황을 털어놓았다.

“회사에 취직할 때 쓰는 자기소개서에는요, 엄마와 아빠 그리구 동생들과 함께 있다고 했거든요. 그치만 그건 뻥이예요. 난 동거하고 있어요. 같은 학교에 다녔던 동창인데요 결혼하기엔 좀 그렇거든요. 이제 대학교 3학년인데 지금까진 먹여주고 있어요. 취직을 하든 고시를 하든 무슨 수가 나지 않으면 꽁지뼈를 차버릴래요.”

“꽁지뼈를 차?”

“차암, 사장님두. 그만 사귀겠단 말이예요. 호호백발 노인이 되도록 먹여 살릴 수는 없잖아요. 능력은 없어도 생긴 건 쭉 빠졌어요. 그 자식이 노브라를 좋아 하거든요.”

장은미는 술기 탓인지 망설이거나 감추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이력서에 있는 집이며 가족 관계에 대해 확인해둔 바 있었다.

“그럼 이상하잖아. 총무부에서 장은미 씨 집으로 전화해서 확인 했다던데?”

“그건 맞을 거예요. 그 무렵에 집을 나왔으닌까. 부모님이 그이를 싫어해요. 결단력이 부족하다구요. 출생이 시골인데다 돈이 없다는 거죠.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끊자는 말에 그렇게 하자고 고함지르고 나왔죠, 뭐!”

“저런, 저런.”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옷이 있어야죠. 가까스로 겉옷은 사입었지만 속옷 살 돈은 없었거든요.”

“지금도 없어?”

“아뇨, 사곤 싶지만 그일 먹여줘야죠. 싫든 좋든 이 가을이 갈 때까진 먹여줘야잖아요.”

“그거 참.”

문치수의 두 팔을 잡아 가슴 쪽으로 당겼다. 스웨터 위에 손이 놓이자 부드러운 느낌이 사내의 욕망에 불을 질렀다.

“사장님이 좀 사 주세요.”

시간은 벌써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문 여는 데를 찾기도 만만치 않을 시각인데다, 부하 직원의 속옷을 사러 동행한다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문치수는 지갑을 꺼냈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혼자 갔다 와.”

“안돼요, 사장님이 골라 주세요.”

“뭘 골라? 그냥 사면 되지.”

“아녜요. 여러 색깔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골라야죠. 그리구요 사장님, 돈을 받을 순 있지만 그걸 받으면 장사꾼 냄새가 나잖아요. 그게 싫어요.”

이렇게 되고 보니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파견 근무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씨가 어떻게 구석구석 지리에 밝은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가게는 큰길에서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실용적이랄 수 없는 브래지어와 팬티에 눈이 휘둥그레질 가격이 붙어 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최소한 다섯 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저기요 아가씨, 옷값은 이분한테 받으시고요. 브라와 팬티를 좀 줘 봐요.”

여점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여러 장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꺼내놓았다.

“브래지어는 얇고 탄력이 있어야 해요. 그리구 팬티는요 여러 색깔이 있지만 침실 분위기를 살리려면 황홀한 칼라가 좋아요.”

여점원은 여러 장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올려놓고 끈덕지게 그 것을 다 팔았다. 정가표에 붙은 금액에서 한 푼도 깎아주지 않았으면서 유리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모두 처리했다. 장은미도 덩달아 거스름돈 8천 원은 ‘됐어요’라는 한마디로 처리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그녀는 문치수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말 비싸죠. 세상에 브래지어와 팬티 몇 개 사는데 10만 원이 넘어. 그러니 봉급 적은 우리가 제대로 사 입겠어요. 사실 말예요, 이 정도 옷을 사줬으면 반대급부가 있어야잖아요?”

“뭐어?”

“왜요, 자신 없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장은미 씨 술 취했어?”

“어머머머, 사장님두 참. 서로 필요할 때 모텔 갔다 해서 문제될 건 없잖아요. 아이만 안 생기면 즐기는 것으로 끝낼 수 있어 좋잖아요. 본사나 한국지사에도 그런 커플 많아요. 상무님과 자주 다니는 일식집 여주인, 총무부장님과 T그룹 김상무님 사모님, 또 영업1과의 김계장과 박지숙 양…, 하여튼요 내가 알기론 3년이나 5년이 넘은 치들도 수두룩해요.”

“그것참.”

“그러니까 사장님두 자신 있게 요구해 봐요.”

“그치만 말이야….”

“제가 싫어요? 그러니까 화끈하게 말하지 않고 뜸을 들여요? 왜요, 전 매력이 없나요?”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미스장처럼 매력 있는 아가씨는 길을 막고 서 있어도 찾을 길 없지.”

“그렇담 요구해 봐요.”

문치수는 더듬거렸다.

“우리가 어울리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라구. 만약 아이가 생긴다든지, 또는 알게 모르게 병을 옮긴다든지…, 그런 저런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괜찮지만 미스 장은 곤란하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뭐.”

장은미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장난스럽게 말했다.

“콘돔을 쓰면 돼요, 사장님.”

“것두 괜찮지. 하지만….”

“어머머, 우리 사장님 그렇게 안 봤더니 꽁생원이다아. 사모님 눈치 보세요?”

“눈치는 무슨….”

“자신 있게 날 원해 봐요. 싸장님, 나 괜찮은 여자예요.”

“알지.”

“근데 가만있어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날 그냥 보낼 거예요.”

“좋아, 오늘밤 일 한번 저지르자! 그렇게 해 줄 거야?”

장은미가 앵돌아진 몸짓으로 중얼거렸다.

“할 수 없죠 뭐. 사장님에게 과용시켰으니까.”

장은미는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가까운 모텔로 앞장섰다. 방에 들어서자 지체하지 않고 스웨터를 벗었다. 둥글고 매끈매끈한 조약돌 같은 유방이 나타났다. 핑크빛으로 번쩍이는 젖꼭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젖무리와 함께 현란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