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안으로 연락했다. 때마침 우암이 출타 중이어서 초하가 달려왔다. 그녀는 쇳조각에 씌어있는 글귀를 만지작거리며 감회에 빠져들었다.

“아버님이 기다리신 분이 박선생님이셨군요. 언제건 오실 줄 알았지만 너무 뜻밖이에요.”

또 한번 놀랐다. 자신이 나타날 것을 미리 알았다는 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바람이 불거나 눈 내리는 날이면 당신 혼자 대나무 숲을 거닐었어요. 그러다가 돌아오시면 말씀을 하셨어요. 누군가 이 집에 올 것인데 그때를 몰라 답답하다고요.

아버님께선 복술(卜術)을 펼쳐 당신의 운수점을 치셨어요. 그때마다 한숨만 쏟으며 탄식이셨죠. ‘아무리 태을(太乙)과 기문(奇門) · 육임(六壬)을 배우면 뭐하느냐’고요. 자신의 재주는 잡새인 유기(劉祺)에 불과할 뿐이라고요.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는 나중에 알았거든요.”

벽암이 자신을 유기에 빗대 설명한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스승 윤사달 어른이 화두처럼 남기고 간 오죽헌의 비밀을 몇 십 년이 지나도록 깨뜨리지 못한 게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유기는 누구인가? 그는 명 태조 주원장을 보위에 오르게 한 참모로, 자신의 재주가 한나라 때 재사 제갈량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태종 때 서운관 출신 이순풍과 원천강이 공동으로 저술한 [추배도(推背圖)]라는 점법을 꿰고 있었고, 독특한 점법을 계발하여 [소병가(燒餠歌)]라 하였다. 초하는 유기에 대해 살점을 붙였다.

“유기는 천문과 지리 병법 · 역학에 뛰어나 주원장이 대사를 논하고자 그를 부르면 항상 주위를 물리치고 은밀히 얘기를 나눴답니다. 그러기에 그분에 대해 이런저런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음양풍각설(陰陽風角說)이란 복술(卜術)도 나오게 됐어요.”

음양풍각설이란 점술이다. 다시 말해 점쟁이로서의 소양도 충분했다는 뜻이다. 그의 행적을 전설처럼 엮은 [소병가]는 왕과 독대하였을 때 일어났던 조그만 사건이 계기가 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초하는 몇 번이나 부친에게 들었는 데도 도무지 싫증나지 않았던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주원장이 구운 떡을 먹고 있었다. 그때 시종이 문가에서 유기가 왔음을 고하자 무슨 생각에선지 주원장은 먹고 있던 떡을 뱉어 그릇 속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유기를 들어오게 한 후 대뜸 물었다.

“이 그릇 속에 무엇이 들었소?”

유기는 잠깐 생각하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그릇 속에 든 것은 달도 아니며 해도 아닙니다. 오로지 금룡(金龍;황제)이 문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하의 판세가 어찌 되겠느냐 물었다. 유기가 대답했다.

“천기는 입 밖에 내면 누설되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필묵을 꺼내 그 자리에서 시의 형식으로 써 갈겼다. 은어(隱語)였다. 물론 주원장으로선 알 수 없는 향후 1백 년 간에 일어날 사건 목록으로 모든 일이 [소병가]로 예언되었다.

이렇듯 천기를 읽을 줄 알았던 유기의 재주를 벽암은 왜 잡새에 비교했는가? 그것은 계명침(鷄鳴枕)이란 베개 때문이었다. 평소 자신의 재주를 제갈량보다 높게 잡은 유기는 아무리 제갈량이 일세의 재사라지만 언감생심 자신의 재주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제갈량이 바람을 청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진면목을 들여다보면 내 재간의 반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계명침을 손에 넣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 베개는 첫닭이 울 때쯤 그 속에서 닭울음소리가 들렸다. 유기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껏 제갈량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이 강했지만 계명침만은 만들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베개 안에 어떤 장치가 있기에 새벽이면 닭울음소리가 들릴까. 그가 만들었으면 내가 못 만들 이유가 없어.’

유기는 베개를 분해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만큼의 특별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베개 속 깊숙이에 기다란 나무 조각이 있고 거기에 다섯 자의 글자가 써 있었다.

<劉祺破此枕 (유기파차침)>

유기가 이 베개를 깨뜨린다는 뜻이다. 오래 전 제갈량은 이 베개를 만들면서 후대의 인물 유기가 베개를 깨뜨린다는 걸 알았다. 천 몇 백 년 전에 살면서 천 몇 백 년 후의 인물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적어놓았으니 유기는 제갈량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탄식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유기에 대한 비유로써 벽암은 자신의 무능을 탄식했다. 스승이 남기고 간 오죽헌의 비밀을 풀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박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 건 범상치 않은 인연이에요. 우연히 목침을 깨뜨렸다지만 사조(師祖) 님이 남긴 내밀한 비밀을 볼 수 있으니 아버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아버님을 대신해 감사 드려요.”

“별말씀 다하십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이 쇳조각은 예사 물건이 아닌 듯싶어요. 대나무 숲에 있는 오죽헌으로 들어갈 안내판(열쇠)인 듯싶어요. 태극 도형의 중심부가 이 쇳조각과 요철(凹凸)을 이룬 게 분명하거든요.”

그녀의 눈빛은 가벼운 흥분에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