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이 던지듯 떨군 것은 바둑 도형이었다. 바둑을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현현기경]의 첫머리를 장식한 ‘명주출해형(明珠出海形)'이란 묘수풀이였다. 이 도형이 여상 강태공(姜太公)의 관상이라고 우암이 덧붙여 설명했다.

“세상에 전해진 강태공은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을 살았다고 전하네. 80년은 찌그러지게 가난하게 살았고 다른 80년은  영화롭게 지냈다는 거지. 이렇게 보면 그는 1백 60년을 산 셈이야.”

낚싯대 하나로 출세했다는 그의 일화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건성으로라도 일부분은 알고 있었다. 그는 워낙 가난해 소를 잡거나 밥장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가 낚시한 곳에 대해 [괄지지(括地志)]란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상이 낚시질을 한 자천(玆泉)은 물의 근원이 기주 기산현 서남쪽 범곡에서 시작된다. [여씨춘추]에는 태공이 자천에서 낚시질을 하고 주문왕(周文王)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곳엔 반계(磻溪)라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자천이라 부르며 그 옛날 태공이 낚시질하던 곳이라 했다.>

“자네도 아는 얘기네만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네. 주문왕이 사냥을 떠나기 전 점을 쳤는데 점괘에, ‘용도 아니고 준마도 아니다. 범이나 곰도 아니다. 얻은 것은 패왕의 도다'라고 했네. 사냥을 나간 곳에서 문왕은 강태공을 만나 수레로 모시고 궁에 들어와 스승으로 삼았지.

이때가 어려운 팔십 년의 세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네. 그래서 [마의상법]에는 강태공을 일러 명주출해태공(明珠出海太公) 팔십이우문왕(八十而遇文王)이라 하여 이후 영달한다고 나타냈지.

벽암(碧岩)이 길을 떠나면서 이것을 남긴 건 모두가 깊은 뜻이 있었네. 초하 네가 엉거주춤 망설이며 때를 놓칠 것을 경고한 거야. 벽암은 이 도형 안에 ‘한번 엎질러진 물은 대야에 담지 못한다(覆水不返盆)'는 경고의 메시지를 남겨놓았어.”

물론 이 말은 강태공을 버리고 재혼한 그의 아내가 다시 돌아와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을 때, 모래밭에 물을 쏟고 그것을 다시 동이에 담으면 받아들인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모래톱에 쏟은 물을 주워 담겠는가. 이미 때가 늦었다는 뜻이다.

우암은 말을 마치자 ‘명주출해형'의 도형을 바둑판 위에 깔아놓은 채 말했다.

“내 생각은 그렇네. 저 젊은이가 이 집에 온 것은 강태공처럼 궁팔십(窮八十)의 운수네. 세상의 못된 명리와 온갖 더러움이 자네 앞에 놓인 도형 안에 있네. 그것을 달팔십(達八十)의 운수로 바꾸는 건 자네 몫이네. 벽암이 저 젊은이의 생사를 자네에게 맡긴 게 ‘명주출해형'의 도형에 숨어 있네. 바른 수순으로 풀어나가면 어렵지 않을 것이네만, 다른 생각이라면 저 젊은이의 운은 여기에서 막을 내릴 것이야.”

“숙부님 뜻…. 잘 알겠습니다.”

“내 먼저 들어가 유집사에게 일러두겠네.”

우암이 잔기침을 두어 번 뽑고 나서 그 자리를 물러나자 초하는 바둑돌을 집어 사활의 첫수에 착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