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오로관'을 찾았으니 본인도 하루쯤 쉬어갈 요량으로 그곳에 머무는 기인 이사들과 수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늦은 시각 잠이 들었다.

이날도 삼현금(三絃琴)을 든 여인들이 나타나 처연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더니 어느 순간 바람처럼 젊은이 앞에 다가와 그림이 그려진 조개껍질을 내밀었다. 그것은 ‘마합'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명물이었다.

아침이 되어 간밤의 꿈길을 털어놓자 육청하는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불행한 일이 일어났거나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하네. 두 번이나 삼현금을 든 여인을 만났다는 것 역시 불길한 일이야.
삼(三)이란 시작과 끝이 한결같이 죽음(死)이 시작되는 첫 획(一)이니 젊은이 주변에 누군가가 죄를 저질렀거나 그런 일에 연관된 자가 있다는 예시네. 게다가 ‘마합'을 받았다고 했는데···.”

육청하의 뇌리엔 ‘마합'과 관련 있는 사연이 슬그머니 떠올라 자리를 잡았다.‘마합'은 제갈량과 관련 있는 물건이었다. 그는 조개껍질처럼 겉이 단단한 물건에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할 병략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사석작전'이라 하지만 그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선도서(仙道書)]엔 공명이 젊었을 때 구천현녀의 시녀 호리녀(狐狸女)에게 육임 · 태을신수 · 기문둔갑이라는 세 권의 천서를 받아 천기를 보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상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고수였다고 격찬한다.

병법에 달통한 손자(孫子)의 가르침을 받은 중국인들은 불충한 자와 기만한 자를 이용하고 이를 다시 역이용하는 솜씨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특히 바둑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심술(心術)이다. 바둑의 고수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형(死形)을 유도하여 잡아들이고 힘겨울 때는 도마뱀처럼 제 꼬리를 떼어놓고 도망간다.

장의라는 이가 쓴 [기경] 13편은 손자병법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기에 옛날부터 병법에 능한 사람이 바둑에 조예가 깊어 고수가 많았을 것이다.

정문(鄭文)이란 사람이 있었다. 위(魏)나라 진지에서 촉한의 병영으로 도망쳐 온 위인이었다. 그는 제갈량 앞에 나와 세 치 혓바닥을 놀렸다.

“저는 남자다운 의리를 좋아하고 명분을 크게 따집니다. 또한 시비(是非)가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열심히 지략을 모으고 공을 세웠는데도 다른 사람을 승진시켰으니 내가 무슨 즐거움으로 위나라를 위해 싸우겠습니까?”

그윽한 눈빛으로 제갈량이 정문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진지밖에 이르러 적장이 떠들었다.

“말 도둑 정문은 들어라! 너는 어찌 위나라의 봉록을 받아 이제껏 호의호식했으면서 감히 반역을 꾀했느냐. 어서 나와 한 판 자웅을 결하자!”

“진지 밖에 떠드는 자가 누군가?”

“바로 그놈입니다. 소인 대신 승진한 잡니다!”

“그대와 공을 다투던 경쟁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대가 나가 저 자를 죽인다면 그 말을 믿겠네.”

정문은 호기당당하게 뛰어나가 단 일합에 도전자를 쓰러뜨리고 의기양양 돌아왔다. 제갈량의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이 자의 목을 베어라! 죽은 자가 너의 경쟁자가 아니거늘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드느냐!”

정문은 그제야 벌벌 떨며 죽은 자는 자신의 경쟁자가 아니라고 실토했다. 위장으로 투항했다는 점에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불러주는 대로 편지를 써 보내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정문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쓴 편지는 언변이 좋은 군관에게 맡겨 적진으로 보냈다. 내용인즉, 제갈량이 자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과 다음날 총공격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때맞추어 정문이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내부에 혼란을 일으켜 내응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고 적어 넣었다. 유비 휘하에 있으면서 불만이 많은 군관으로 위장해 정문의 투항을 크게 표창하고 그를 선봉에 임명했다는 거짓 사실을 적진에 가서 털어놓게 했다.

적장은 망설이다 총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위나라 군사의 대참패였다. 제갈량이 대승을 거두고 진지로 돌아와 맨먼저 내린 명령은 정문을 죽이라는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일 제갈량의 측근이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떻게 하여 정문이 거짓 투항자라는 걸 아셨습니까.”

“내가 어찌 알았겠소.”

제갈량은 그때의 일을 끄집어냈다.

“정문과 경쟁자라는 자가 진정한 도전자라면 어찌 그 자의 한 칼에 목숨을 잃을 서툰 무예를 지녔겠소.”

그제야 사람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과연 제갈량은 권모술수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자기의 영지에 뛰어든 한 점을 잡지 않고 멀리 본대의 원군이 조롱 속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거에 함몰시키는 고수의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제갈량은 말없이 바둑판 위에 도형을 펼치며 정문의 얘길 마무리 지었다. 백선으로 결과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