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의 낯빛은 점점 핏기를 잃어갔다.

“다음날 이민우가 찾아오면서 알게 됐지요. 그 자는 평생 동안 나를 괴롭힐 심산이었나 봅니다. 지금까지 내게서 가져간 재물도 적지 않아요.

우리 집 대대로 내려온 비보(秘寶)가 있었는데 바로 ‘화타의 약탕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국에서 명의로 한 평생 이름을 날리고 살았던 분의 손때가 묻은 것이니 그 탕약으로 약을 끓이면 불로장생한다는 귀물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듯 싶지만 소문을 들은 이민우가 그것을 달라는 겁니다.

여러 날 고민하다···, 결국엔 집안의 값 나가는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게지요.”

견디다 못한 이동하는 이 일을 별당 아씨에게 의논했다. 자신의 처지가 궁색해졌으니 한 밑천 도와주면 어디론가 몸을 피해 의원으로 일가를 이룬 후 연락을 취하겠다는 애원이었다. 며칠만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한숨이었다. 그런데 그날 별당이 자신에게 뜻밖의 얘길 했다는 것이다.

“처녀시절 신내림을 받은 별당이 맨발로 북한산을 헤맨 적이 있었답니다. 인근 산자락에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소문이고 보니 모두들 발을 동동 굴렀는데 별당은 다음날 탈없이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전날 별당에겐 큰 변화가 있었답니다. 산중을 헤메다 기진하여 묘각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술에 취한 이민우를 만난 것입니다. 무병(巫病)이란 게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었기에 낯선 사내와 몸을 섞은 것인데 이 일은 두 해가 지나 상대가 이민우란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내가 민치호의 간병차 그 집에 들렀을 때, 별당은 자신의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유혹했습니다만, 묘각엔 덫을 놓은 이민우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날 이후 내가 가진 것을 하나씩 빼앗기게 된 거지요.”

다섯째 날 - 그림자 속에 숨은 계책

경위원 순검들이 그 동안 수사해온 정황을 뒤집기 시작했다. 먼저 탁일환이 입을 열었다.

“해인사로 내려간 해공 스님은 뛰어난 장인이지만 장사꾼은 아니었습니다. 그분과 동고동락했다는 보살들 얘기로는, 해공 스님은 목걸이를 만들지 않았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만들었는가를 수소문해 보니 암자에서 멀지 않은 화전민 마을에 ‘은장이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손재주가 비범하답니다.

내가 그곳을 찾아가 ‘해공의 목걸이’에 대해 아느냐 물었더니 한동안 묵묵부답이다가 한 시각쯤 지나 민치호의 부탁으로 쌀 두 섬을 받고 두 개의 목걸이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민치호가 두 개의 목걸이를 만들어 이민우와 이의원에게 주었다면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것을 정문원이 정리해 보았다.

“여기 일람표를 보십시오. 제가 수사해온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치호는 본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몇 해 전 자살한 부인의 시장을 살펴보니 초검관의 소견에 재밌는 게 있어요. 부인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학대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부인 스스로 그런 것인지 민치호의 손길에 의해 그런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탭니다.

그리고 부인의 사후 재취로 얻은 별당은 무병을 앓은 전력이 있어요. 처녀 시절 무병을 앓던 중 북한산 묘각에서 우연히 이민우와 살을 섞었는데, 그 일은 이민우가 부인을 만나게 되면서 알게 된 것으로, 이무렵 민치호도 알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람표 한 장을 넘기고 나서 장율하가 뒤를 받았다. 그는 민치호의 계획을 풀어놓았다.

“민치호는 별당을 불러 말했을 겁니다. ‘해공의 반지’라는 것을 미끼로 이의원부터 징벌하라 했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이의원과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보니 별 수 없이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묘각에서 만났는데 그만 몸이 뜨거워져 통정하고 맙니다. 이것을 숨어있는 이민우가 음흉한 눈길로 바라보았을 것이구요.

이의원이 산을 내려간 후 이민우는 별당을 협박했을 것이고, 다시 두 사람은 짐승처럼 야합했을 터인데···, 그 와중에 ‘풍지’라는 혈자리에 침을 꽂아 상대를 절명시키고 돌아왔겠지요. 이의원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동행한 사람은 민치호였을 것이고!”

생각할수록 끔찍했다. 상대가 싫으면 내보내면 될 일인데 이렇듯 잔혹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울적했다.

순검들이 민치호의 집으로 향했다. 집안엔 탕약 끓이는 냄새가 은은히 깔려 있었다. 이동하를 빈털터리로 만들고 이민우의 목숨을 빼앗은 뒤의 후련함으로 보약을 먹는 것일까. 순검들의 입가엔 어슬픈 미소가 배어 있었다. 때마침 별당 쪽에서 아낙이 걸어와 고했다.

“아씨께서 약을 드셨습니다. 이의원이 각별히 신경을 써 지었으니 한 모금도 흘리지 말고 드시라 했습니다.”

“모두 드신던가.”

“예에, 나으리.”

“그럼 내것도 가져오게. ‘화탕의 약탕기’에 끓인 것이네.”

아낙이 탕약을 가져올 동안 민치호는 거드름을 피웠다. 그의 눈기엔 엷은 살기가 빠르게 흘러갔다.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정문원에게 한마디 내놓았다.

“누구든 제 분수를 알아야지요.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날뛰다간 불벼락 맞습니다. 어느 선비가 내게서 얼마간의 돈을 조달해 갔는데 저 약탕기를 가져왔지 뭡니까. 흔하디 흔한 모양새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수표교 인근에서 한약방을 하는 이의원 집안에 있던 거랍니다. 탕약을 짓기로 유명한 이의원에게 두 첩을 같은 것으로 지어 와 별당에게 먼저 마시게 했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지 않습니까. 해서···.”

그때 아낙이 탕약을 가져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탕약을 단숨에 들이켜고 박하사탕 한 알을 입안에 넣었다. 부리나케 집안에 뛰어든 것은 이의원 집의 사노(私奴;하인)였다. 그는 서찰 하나를 내밀다가 엉거주춤 물러섰다. 그의 눈엔 탕약을 마신 민치호가 입가로 피를 흘리며 상머리에 머릴 처박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정문원이 서찰을 펼쳐 들었다.

<너무 경황없던 참이라 다른 말은 못했습니다. ‘화타의 약탕기’가 민치호 어른 댁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서찰을 보냅니다. 그 약탕기는 신험하여 틈만 나면 악한 기운이 스며든 탓에 보관할 때엔 ‘복어의 알’로 안을 닦습니다. 약탕기를 쓸 때엔 반드시 탕기 안을 몇 번이라도 깨끗하게 씻어낸 후 사용해야 합니다.>   (제1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