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오는 날의 오후’를 만난 건 <기우회> 가입 인사차 온수행 지하철 7호선을 탔을 때였다. 숭실대역을 지날 무렵 삼십대로 뵈는 중년 여인이 내 옆의 빈자리에 덜컥 주저앉았다.

검은색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그녀는 생일맞이라도 했는지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든 맑고 산뜻한 차림새였다.

두어 정거장 갔을 때 그녀의 가방에서 꺼낸 pmp인가 하는 기기가 클래식한 무대를 자연스럽게 비쳐냈다. 그녀의 시선이 집중되며 한숨을 몰아쉬는 게 내 시선을 자극했다.

손지갑 넓이의 그 기기는 화면이 꽤 커 곁에서 보기에 별 불편함이 없었다. 여전히 ‘D-1911’이란 러시아 발레단이 백조처럼 춤추는 화면이었다.

감동의 여운이 짙게 깔린 화면에 시선을 던지며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꽃보다 예쁜 분이 왜 꽃을 꺾었어요?”

그녀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쿡 웃어대며 장미를 내 쪽에 내밀었다.

“이건 조화(造花)예요. 눈은 보름달밖에 못 보시나 봐.”

자세히 보니 그 꽃은 조화였다. 안경을 썼다 해도 시력이 좋지 않은 내가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조화였다. 어색해 하는 내게 미소를 던지며 그녀가 말했다.

“발레를 보신 소감이 어떠세요?”

나의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듯 그녀는 뒷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전, 이제까지 연극을 해왔거든요. 이것저것 손대다 보니 인디언들의 사랑얘길 그린 것도 했는데 그때 내 이름이 ‘비오는 날의 오후’에요. 그치만 그것도 관 뒀어요. 연출가 선생님이 이름값도 못 한다거든요. 요즘은 발레를 다운 받아 보는데 좀 전에 봤던 감정 표현은 죽어도 못할 것 같거든요. 근데 선생님. 발레단 이름을 왜 ‘D-1911’이라 했을까요?”

“혹시 ‘무도회의 초대’란 발레 들어본 적 있습니까?”

“무도회의 초대? 니진스키와 카르사비나가 주연한 발레인가요?”

“그렇습니다. 본래 이름은 ‘장미(薔薇)의 정(精)’이란 단막극 발레죠. 음···, 이것은 고티에의 시에 웨버가 곡을 붙이고 포킨의 안무로 막이 올랐는데 파리에서 초연(初演)한 건 1911년 디아길레프라는 러시아 발레단이죠. ‘D-1911’은 아마 ‘장미의 정’을 기리기 위해 극단 이름을 그렇게 정한 것 같습니다.”

‘장미의 정’보다 ‘무도회의 초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웨버의 음악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덧붙이자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치뜨려졌다.

“선생님은 뭐 하시는 분이세요? 시인? 소설가? 음악가? 화가?”

“나중에 말씀드리죠. 얘기가 나왔으니 한가지 덧붙이죠. ‘장미의 정’은 현실과 꿈의 중간에서 춤추기 때문에 로맨틱하다고 들었지만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 되물었다.

“선생님, ‘장미의 기사(騎士)’란 말 들어보셨어요?”

“그건 전3막으로 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죠.”

“그 오페라도 1911년에 공연됐다던데요?”

“네. 호프만슈탈이 대본을 썼죠. 초연이 된 건 1911년 1월 드레스텐이라고 들었어요.”

“그럼 은장미(銀薔薇)에서도 대해 아시겠네요?”

‘은장미라···.’

나는 나직이 읊조리며 고갤 끄덕였다. 18세기 중엽 빈의 귀족 사회는 빈번히 무도회가 열렸다. 무도회가 열리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가 마음에 든 남자에게 꽃을 전한다. 구애의 표시다.

‘장미의 기사’로 선택된 남자는 꽃을 준 처녀가 마음에 들면 은으로 장미 문양을 만들어 처녀에게 보내는데 이것이 약혼의 신표였다. 갑자기 그녀가 소리쳤다.

“아, 그래요. 바로 맞혔어요! 내가 이제껏 장미를 들고 다녔지만 그 이율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전 장미의 기사를 찾고 있었어요. 아니 기다렸다고 할까요. 선생님은 결혼하셨죠? 안 하셨어요? 아니 결혼했어도 상관없어요. 애인 하면 되잖아요.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애인, 그게 좋겠죠? 제가 선생님을 ‘장미의 기사’로 선택했어요. 우리 어디 가서 축배 들어요. 지금 바쁜 길 아니죠?”

“아가씬, 아니 ‘비 오는 날의 오후’씬 어딜 가세요?”

“인천이오.”

“그럼 온수에서 갈아타군요. 저 역시 그쪽으로 갑니다.”

“어머, 어쩜 어쩜.”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온수에서 내려 부평으로 가는 지하철 연결 통로를 걸으며 그녀는 쉼없이 중얼거렸다.

“선생님, 내 생일은 양력으로 10월 30일이거든요. 요즘도 촌스럽게 음력 생일 새는 사람 많더라구요. 그치만 난 현대인답게 양력이에요. 그날이 만으로 딱 서른이구요. 그날 선생님을 만나겠어요. 어디냐 하면요, 인천시청역이에요. 지하철에서 내려 출입구로 올라오는 긴 계단이 있거든요. 서른 번째요. 내가 태어난 시각이 12시 정각이니 만나는 건 12시가 좋겠어요. 괜찮죠? 그날 선생님은 은으로 된 장미를 준비하셔야 해요. 아, 멋있어. 정말 멋있어!”

나는 모임을 다녀와 은으로 장미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은을 사용하기에 가격이 만만치 않았으나 그게 대수냐 싶었다.

일과를 서둘러 마친 10월 30일, 인천시청역에서 내려 출입구 쪽 통로를 걸으면서 설렘보다 왠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한편으론 나에게 이런 정취가 남았던가 싶어 어색했으나, 아래에서 서른 번째 계단을 헤아리며 올라가는 날 발견하며 깜짝 놀랐다.

11시가 지나고 정오가 가까워 왔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내 공연을 하는 문화공간에서 청소년들이 소품(小品)을 차린 채 연극을 하는지 관람객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잠시인가 싶게 시간이 흘러 오후 5시 가까이엔 지하철역에 들어선 사람들이 비 젖은 우산을 아무렇게나 흔들며 물방울을 털고 있었다.

이제 그만 모래내시장으로 가 소고기 내장 구이에 쐬주나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출입구로 향하는데 저만큼에서 사내와 함께 깔깔대며 걸어오는 ‘비오는 날의 오후’를 발견했다. 나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비오는 날 오후!’ 접니다, 장미의 기사!”

“장미의 기사?”

사내가 의아스럽게 중얼대자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냉담한 눈길이 날아왔다. 나는 얼른 은장미를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은장미! 날 잊었어요? 장미의 기삽니다!”

그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사내 팔짱을 다시 끼었다.

“원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네!”

그녀는 힐끗 돌아보며 손에 든 은장미를 힘껏 팽개쳤다. 구석에 떨어진 은장미가 내리는 빗발에 달갑잖은 흙먼지를 씻겨가고 있었다.

“어머, 자기가 ‘장미의 기사’래. 돌았나 봐! 베르사유 장민가 하는 만화책 보고 저 사람 뿅 갔나봐. 웃긴다. 그지?”

나의 흐린 시야는 점점 작아져 가는 ‘비 오는 날의 오후’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